마법사와 뾰족귀 part 1




쓰레기 혁명



[01] 변태 마법사와 뾰족귀 - part 1



숲에도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불타는 외양간을 지나 내달리던 나와 밀라키는 어깨 높이로 자란 뱀딸기 관목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여기라면 잘 보이지 않겠지. 나는 오늘부로 더 이상 덩치가 커지지 않는다고 내 몸을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안 그러면 이 풀 무더기 밑에 숨어있을 수 없었을테고 그렇게 되면 나와 밀라키는 서슬퍼런 저들의 검에 꿰어져 아마 까마귀 밥이 되어 있었을 테니 말이다. 뒤쪽도 앞쪽도 완전 불바다다. 멍청한 어른들이 안전하리라고 굳게 믿었던 언덕 꼭대기의 대저택도 벌써 화염의 손아귀에 짓이겨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전부 죽여라! 여자든 어린아이든 상관 없다!"


냄새를 쫓는 사냥개처럼 병사들이 으르렁거렸다. 언 땅을 두드리는 말발굽 소리가 북소리처럼 울려퍼졌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들의 시커먼 그림자가 눈 앞에 어른거리는 듯 보였다. 핏빛으로 붉게 빛나고 있는 붉은 적홍기. 나와 밀라키 같은 인간들을 혐오하고 괄시하는 제국 게슈타스의 깃발이었다.


"클라이드… 무서워. 아저씨들이 왜 저러는거야? 왜 우리들을 못 살게 구는거야?"

"우리가 남들과 달라서 그런거야. 어른들은 자신과 다른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클라이드, 다르다는건 나쁜거야? 그래서 아저씨들이 우리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면서 불을 지르는거야?"

"밀라키, 그렇지 않아. 그들은 그저 우리가…"


가까운 곳에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나는 말을 도중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움찔하며 관목 사이로 더욱 깊숙히 몸을 숨겼다. 관목의 날카로운 가시에 옷이 찢겨지고 머리칼이 엉켜 들었다. 꽁꽁 얼어붙은 땅은 서리로 뒤덮여 그 위를 디딘 무릎과 손가락에 온기를 빼앗았다. 두려움에 몸이 떨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어린 짐승의 처지를 몸소 느끼게 되다니. 오, 신이시여. 이제 부터는 절대로 육식을 하지 않겠으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요. 사냥꾼인 요제프 아저씨에게 따끔하게 혼구녕을 낼테니 제발….


신이 내 기도에 귀를 기울어줬는지 그들은 나와 밀라키가 있는 곳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천둥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들이 들고 있는 횃불의 불빛이 조그마한 점으로 보일 때 쯔음 부스스 관목에 빠져나왔다. 주위엔 검과 창이 흽쓸고 간 잔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한때 사람의 형태를 지닌 고깃덩어리들. 비릿한 피냄새가 구역질이 나오는 걸 애써 참았다. 이럼에도 배꼽시계는 눈치 없이 꼬로록 거렸다. 나는 순간 독수리들과 까마귀들이 부러워졌다. 적어도 그들에겐 잔칫상이 펼쳐져 있는 거나 다름 없었을테니까.


"밀라키, 모두 갔어. 이제 나와도 돼."


나의 말을 듣고서야 밀라키도 부스스 뱀딸기 관목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밀라키의 머리카락에 붙어있는 나뭇잎들을 털어낸 뒤 손을 잡고 저택의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길 잃은 고아 아이가 목적지라면 어디가 있겠는가? 불길만 피할 수 있다면, 성난 어른들만 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굵직한 나무뿌리와 이끼로 뒤덮인 바위를 넘고 낙엽이 수북이 쌓인 물웅덩이도 건넜다. 물웅덩이는 커다랬지만 밀라키와 나의 특별한 힘으로 별로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었다.


"클라이드, 배고프고 다리 아파. 잠시 쉬었다가면 안 돼?"

"…그럴까."


아마 괜찮다고 생각했던거 같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엄청 오래 걷기도 했고 뒤엔 물 웅덩이가 있었다. 아마 그들이라면 건너지 못할테지.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렇게 잠시 평평한 돌에 앉아 쉬고 있을 때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물 웅덩이 끝자락에 뭉개져 있는 진흙에 말이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홀로 뒤처진 모양이었다. 그는 땅 위에 우뚝 서서 불같이 화를 내며 검의 평평한 부분으로 말을 내리치고 있었다. 삼 십쯤 먹어보이는 사내였다. 턱에는 바람에 날아온 작은 풀떼기처럼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분노의 눈물이 가득 고인 두 눈은 피에 굶주려져 있었다. 어린 사내놈이나 계집년이든 뭐든 상관 없을 것이었다.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체내의 수분을 응결시켜 차가운 송곳 모양의 얼음조각을 만들었다.


"그 얼음…. 그래, 너도 정커(Junker)로군. 어린아이를 죽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만 죽어줘야겠다. 재앙의 씨앗을 남겨두는 건 제국 기사의 도리가 아니니깐."


그 사내는 그렇게 미친 소리를 지껄이고는 공격할 기세로 달려왔다. 나는 두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간신히 멈추고 송곳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한 번 저지른거 두 번 못 저지를까. 여차하면 찌르고 밀라키를 데리고 도망갈 것이다.


미치광이의 저택에서 밀라키를 데리고 나온 이후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나갈 길을 찾는 것. 이것은 지금 같이 죽음의 기로에 놓여있을 때 굉장히 유용한 능력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을 깼을 때 난 먼저 밀라키가 자고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지붕은 이미 거센 불길에 흽싸여 있었다. 여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남자들은 잠이 덜 깬 얼굴로 몽둥이와 창과 낫을 가지러 달려갔다. 열어젖힌 문밖으로 말을 탄 제국놈들의 그림자가 휙휙 지나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우리의 주인이었던 고함을 치며 달려나가자 검 하나가 주인님의 머리를 뎅겅 잘라갔다. 마치 잘 다려진 단도로 나뭇가지에 매달린 살구를 따내듯 아주 간단하게. 싹둑, 아니 역시 뎅겅이 맞으려나.


벙어리 생쥐 클라이드. 사람들은 날 그렇게 불렀다. 밀라키를 제외하곤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남들의 호위따위 간단히 무시했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물론 밀라키의 생각은 조금 달라보이지만. 여튼 남들이 나를 이용해먹을 건덕지를 남겨두지 않기 위해 관계를 형성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지정된 일만을 했고 일을 마치면 하인들 전용 숙소에 잠을 자거나 날씨가 좋으면 숲으로 나가 작은 짐승들 따위를 잡았다. 생쥐는 어째서냐고? 나는 생쥐처럼 곤경을 피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민첩하고 약삭빠른 생쥐도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함치며 칼을 휘두르는 사내에게. 이번만큼은 두려움보다 분노가 앞섰다. 우리가 무얼 잘못했다고. 우리 같은 자들의 소탕을 결정한 제국과 그 기사들에게 화가 났다. 그냥 조금 다를 뿐인데. 왜 이 난리를 피우는 걸까. 나는 사내를 향해 돌격했다. 그는 움찔거리는 기색조차 없었다. 검을 조금 다를 줄 아는 기사라서 그런지 내가 좀 얕보인 듯 싶다. 이건 행운이었다. 그의 앞까지 달려 간 뒤 재빨리 들고 있던 얼음 송곳을 그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단련된 동체시력의 기사는 고개를 까딱이는 걸로 가뿐히 송곳을 피했다. 하지만 내가 노리는 것은 송곳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고개를 까딱이므로 잠시동안 비게 되는 시야. 게다가 평균보다 훨씬 못 미치는 나의 작은 키!


"어딜!"

"크윽…!"



보통사람이라면 여기서 땅을 얼려버려 발을 묶어버렸을텐데 꼴에 기사라고 재빨리 시선을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나는 그가 휘두르는 칼을 피해 고개를 잔뜩 움츠리며 그의 허벅지에 손을 가져다대는데 성공했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 무서웠지만 여기까지 온다면 일은 식은죽 먹기보다 쉬워진다. 왜냐고? 그대로 얼려버리면 끝나니까!


"여기서 잠깐 머리 좀 식히고 있으라고 아저씨!"


쩌적하고 그의 허벅지에 두꺼운 얼음이 생겨났다. 허벅지의 수분을 그대로 급속냉동 시킨 것이다. 뼈를 뚫는 한기에 긍지 높은 제국의 기사는 통증에 비명을 질러대며 검을 떨어트렸다. 나는 그대로 밀라키에게 따라오라고 소리질렀다. 밀라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쫓아왔다. 하지만 내가 간과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기사의 말이었다. 겁에 질린 말이 근처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진흙범벅이 되어 눈을 희번덕거리며 용처럼 콧김을 뿜어대는게 보였다. 좋지 않은 예감이 뇌리를 뚫고갔다.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했다. 나는 밀라키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겁먹은 말은 물불 가리지 않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그 말을 피하려다 그만 얼음 판에 발을 미끄러져 옆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클라이드!!"


밀라키의 비명과 말 울음소리, 그 밖의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나는 어둠을 뚫고 검은 강물 속으로 첨벙 빠져들었다. 마치 헤아디아스의 궁전에 입궐하는 가엾은 영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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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1-15 17:20 | 조회 : 941 목록
작가의 말
엔니립사

우리들의 과거일 수도, 미래일 수도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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