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여태까지 수고 많았어

찔린 부위가 따끔거렸다. 굉장한 고통이 몸을 흝고 지나가니, 영정은 그제서야 자신이 칼에 찔렸다는 것을 자각했다. 울컥 피가 솟아올랐다. 백모래는 떠났고, 영정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나가가 올리도 없었다. 차라리, 한번 더 자극해볼걸.



'나는 송하가 날 미워하길 바라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저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듯 손을 내미는 그에게, 영정은 차갑게 굴었다. 송하는 살아있었고, 백모래는 영정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죽어야 했고, 그때로써의 최선은 아마 백모래의 과거와 랩터, 그리고 그가 가족처럼 여기는 송하를 이용해 자극하는 것 뿐이었다.



'그 아이는 처음부터 역겨웠어. 난, 그 애에게 정 하나 주지 않았지.'

'...들은 것과는 다르구나, 당신.."

'난 히어로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 제멋대로 날뛰는 그 혼혈과는 다르지.'



백모래가 마지막에 영정을 죽일 때, 그의 눈에는 혐오감이 가득 일어있었다. 영정이 후련함에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사막의 메마른 공기가 더웠다. 내리쬐는 태양에 살갗이 따가웠다.



"다 끝났어."



잘된 일이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띄며 눈을 서서히 감았다. 이제, 자신과 연을 맺은 사람들을 다시는 못본다. 그것 하나만은 슬프지만, 모든 것은 영정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원작을 이어가기로 한것, 자신의 목숨을 백모래에게 내준 것. 많은 사람들에게 악녀이자 흑막이라 욕을 먹어도, 그녀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속죄하기로 했다.

그녀는 영정을 연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실로 영정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쭈욱 그녀의 감정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욕망이 이성을 지배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가득했다. 그녀는 다만 원래의 영정보다 조금의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것 뿐, 솔직히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 데에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실제로도 그녀는 자신의 앞에 방해가 되는 자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쿨럭, 쿨럭..!"



또 한웅큼 핏덩어리가 목구멍에서 솟아져 나오자, 그 비릿한 냄새에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더라. 검은 눈에는 체념이 담겨 있었다. 아, 이제 마지막이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ㄴ!ㅈ...ㄴ! 영정님! 영정님!!"



정말로 환청을 듣는 걸까, 아니면 이 말도 안돼는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버린 것일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스치고 지나갔다. 절박함과 간절함이 가득한 그 목소리는 마치...



"듄..."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머리가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영정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너무너무 아픈데도, 이런 생생한 감각인데도 그녀의 앞에 있는 이 사람들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신 앞에 있을 수 있는 거지? 밀려오는 두통에도 그녀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영정님, 정신 드세요!?"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힐러라도 데려오는 건데.."



듄이 그녀를 살짝 흔들었다. 영정이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 보자, 어깨에 덮여진 겉옷. 언럭키의 것 같았다. 멍해져오는 머리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그녀의 이마에 마고가 손을 가져다 댔다. 싸이코 매트리는 상대의 정보와 기억을 읽는 능력. 마고에 의해 모든 것을 읽힌 그녀가 불쾌하다는 듯 살짝 몸을 떨었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심기를 눈치챈 마고가 곧 용서를 구했다.



"영정님, 돌아가셔야 해요. 일어서실 수 있으세요?"



듄의 여동생 윤의 물음에, 영정은 고통에 찬 신음을 뱉었다. 살아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윤이 고개를 떨구며, 영정의 손을 꼭 잡았다. 차가웠다.



"흐윽...흐...영정님...



나가와 싸우러 가던 그녀를 말리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멈추질 않는 눈물에 듄이 소매로 눈가를 닦아냈다. 언럭키가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작 자신도 우는 바람에 눈가가 빨갛게 부었음에도.



"어쩜 남자가, 쿨럭! 눈물이 이리 많은지. 말했잖아요, 듄."



힘 없이 처진 팔을 움직인 영정이 듄의 뺨을 쓸어내렸다. 피가 묻어있었기에 듄의 뺨은 그대로 피로 뒤덮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듄이 서서히 울음을 그치기 시작했다. 한마디 한마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상처가 너무 쑤셨다. 마고가 한손으로 출혈부위를 막고 있다 해도, 이렇게 큰 상처는 지혈이 어려웠다.



"큭... 이 내가, 이런 꼴이 될 줄이야. 생각도 못했거늘."



헛웃음을 터뜨리자 남은 기력마저 쪼달리는 듯 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리라 본능적으로 깨달은 그녀가 언럭키에게 손짓했다. 저 멀리 떨어져 눈치를 보던 언럭키가 눈가를 비비고 다가섰다. 잔뜩 움츠러든 그의 행동에, 영정은 씁쓸해질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일찍, 언럭키를 거두었다면 좋으련만.



"우리가 일찍 만났더라면, 달라질 게 있었을까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의 수하들이 전부 울컥, 눈물을 토해냈다. 모두가 그녀를 위해 헌신적으로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들의 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힘겹게.



"내가 없더라도 강해지세요. 그래야 내 수하라고 하지."



끝내 한이 맺힌 듯 그녀가 말을 뱉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흐느끼고 있었다. 조용하고도 고요한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나름 행복해햇고, 흡족했다. 자신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기쁜 일이었다.



"영정님! 제발, 제발 같이 돌아가요! 헬리콥터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제발!!"



윤은 절박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넓은 사막에서 메아리처럼 흩어지다 곧 사라져버렸고, 영정은 다만 옅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누구보다 강인하고 아름다웠던 그녀가 이리도 약하고 가녀려 보일 수 있을까.



"[도와줄까?]"



영정의 눈동자가 한순간 부릅떠졌다. 한번, 딱 한번 들었던 목소리였다. 아마, 기억이 온전하다면, 영정으로 태어나기 바로 직전에 들었던 목소리 같았다.



"....아.."

"[도와줄게. 너와 네 가족들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소원을, 들어줄게.]"



다정한 그 목소리를, 영정은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어디든 좋을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그 다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여태까지 수고 많았어. 고마워, 영정님.]"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그녀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옆에서 소란스럽게 들려오는 절규에, 그녀가 생각했다. 이것으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걸까.

그녀에게 허락된 휴가가 시작되었다.
의식이 사라져갔다. 희미하게 보이는 앞에는, 그녀를 따라 털썩 쓰러지는 그녀의 수하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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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9-26 22:30 | 조회 : 1,367 목록
작가의 말
씨시 매그놀리아

담편부터 본격적인 블헤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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