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득 뒤를 돌아보면

고요하게 적막이 감도는 방 안, 피처럼 붉은 소파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이는 민트색과 흰색의 투톤, 갈색이 감도는 검은 눈. 날카로운 눈매와 오똑한 코, 갸름한 턱선은 그녀가 미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영정이었어, 내가."



본인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웃기다는 듯 푸흐흐, 작게 몸을 떨며 웃던 그녀가 손에 들린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모든것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저녘, 그녀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두통을 가라앉혔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 내 사명을 위해, 사랑을 죽였다. 그 사람을 닮아 나를 사랑하는 송하를 이용했다. 강하게 키우겠다는 그 마음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언럭키를 간부들에게 넘겼다. 경험을 쌓아보라는 의미가 그를 불행하게 만들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큭...! 아하하, 아하하하!"



웃음이 멈추질 않아 그녀는 손으로 입을 살짝 가렸다. 몇 초의 공백 끝에, 그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검은 빛의 눈동자가 도륵도륵 굴렀다. 밀려오는 후회감에 죄책감이 생겨왔다.



"설마, 내가 이런 빌어먹을 인생을 살 줄이야.."



그녀의 이름은 영정이었다. 대배우 영정, 약 100년간 사람들을 구원하며 범죄의 80%를 줄였다는 그녀.



"정말, 참 멀리도 달려왔구나.."



바꿀 수 있을까?

눈을 번뜩이던 그녀가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어냈다. 아직 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이 그녀가 있는 건물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아름다운 달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가 테라스 쪽으로 한걸음, 다가갔다.

이제라도 알아챘는데,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모른 척 한다면, 진정한 히어로라 할 수는 없겠지.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붉게 칠한 입술에서 피한방울이 맺쳐나왔다.



"...잠도 안오는데, 가볼까."



테라스의 문을 열어젖히고, 차가운 밤공기를 염력으로 막아낸 그녀가 공중에서 도시를 살폈다. 문득 조금 전 마고와 함께 언럭키를 스푼 쪽으로 지원시킨 일이 떠올랐다. 분명, 연예인 세크룬에 관한 사건임이 분명했다.

언럭키는 불안정하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가 가장 안심할 수 있는 곳은 내 곁이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영정은 곧 포크 라고 쓰인 연예기획사 쪽으로 이동했다.



'와장창!!'



가까이 다가가자 건물의 유리창이 깨지는 것이 보였다. 혀를 한번 찬 그녀가 깨진 창문을 통해 내부를 바라보았다. 잔뜩 웅크린 채 불안해 하는 토끼 혼혈, 어떻게 해서든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거미 혼혈의 싸이코매트리 특기자.



"어?"



책장이 떨어졌다. 우수수, 책장에서 뽑힌 책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이정도 규모라면 수습할 수 있었다.

영정의 손짓 한번에 책들은 그상태로 공중에 떴다.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고, 이어져야 할 굉음도 사라졌다.



"...우아."



누군가의 탄성이 들리자 괜히 기분이 좋아진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아가들~"



무려 몇천살이나 살아왔던 불사족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가 라는 호칭을 사용한 영정이 방긋 웃어주며 손을 흔들었다. 마고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졌다.



"영정님!"

"마고, 순서가 틀리잖아요."



흔들리기 시작할 듯한 건물을 단단히 지지한채, 그녀는 언럭키에게 다가갔다. 여태 많은 몹쓸짓을, 용서해 달라 말하고 싶었다.



"언럭키, 괜찮아요. 이제 아무 일도 없답니다. 자자, 진정해야 좋은 토끼죠?"



손에서 검은 장갑을 빼낸 그녀가 언럭키의 뺨을 살살 쓸어내렸다.



"흐...흑...히끅.. 여..영정..님...흡..."



진정하지 못하고 우는 언럭키를 꼭 안아주며, 영정은 방 안을 정리했다. 손짓 한번으로 책들이 책장안에 꽃혀서 원래대로 세워지는 것을 보던 나가의 눈에 당황이 서렸다.






* * *






"반가워요. 히어로, 영정이라고 해요."



언럭키를 소파에 앉혀놓고 마고에게 맡긴 그녀가 나가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나가가 답했다.



"저 이외에 초능력자는 처음 봐서요.."



소년의 답에 영정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영정을 몰라? 히어로 맞아? 공부 안하나? 심지어 교과서에도 영정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혼란에 잠긴 영정의 속도 모르고, 나가는 살짝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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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3-16 22:30 | 조회 : 2,467 목록
작가의 말
씨시 매그놀리아

네이버나 조아라에서 뵌 분들도 많이 계실거 같네요.. 잘 부탁드려요! 그림은 우리 예쁜 영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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