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프롤로그

"그래,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보자. 가령 내일이 월요일이라던가. 눈을 뜨면 학교로 가야 한다거나, 일을 나가야 한다거나."

"혹은 내일 비가 온다거나, 날씨가 유난스레 맑다던가, 덥다던가, 춥다던가. 그리고 월요일이라던가."

주절주절 내일이 월요일임을 쓸데없이 강조하는 발언들 사이로, 소녀가 툭하니 내뱉었다.

"아주 쓸모없네요."

"원래 그런 거잖아? 세계를 싫어한다는 건 아주 사소한 이유로 충분한 일이라고. 그다지 사소해도 상관없잖아."

남자가 양 팔을 벌리며 과장스런 제스쳐로 주위를 가리켰다.
가로등의 불빛 아래의 벤치에 앉아있던 소녀는 시큰둥한 얼굴로 가로등 불빛 밖의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흥미나 놀라움 같은 것은 일체 없었다.

"그렇네요. 그래서 그 '풍경'은 무슨 사소한 이유죠?"

"뭐, 기분 따라?"

"대단히도 사소한 이유네요."

"그걸로 충분하잖아."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조심스레 드러나며 희미한 빛이 비춰졌다. 가로등의 불빛에도 굴하지 않던 어둠이 달빛에 희미하게 걷히자 주위의 '풍경'이 인간의 망막에 어슴푸레하게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참극이었다.
쓰레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깨끗한 골목과 하얀 담장은 마치 붉은 물감으로 한바탕 축제라도 벌인 듯이 물들어 시체와 피냄새로 점칠되어 있었다.
소녀는 달빛에 희미하게 비친 그 참극을 어디까지나 방관자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디까지고 무심하고 평탄하게.

"설령 길을 지나가면서 '아, 오늘 달이 안 보이잖아.'하는 정도의 이유로도 사람은 죽일 수 있어. 별 이유는 필요하지 않은걸."

"...흔히 사람을 죽이는 데는 이유가 있으나 구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라고들 하는데요."

"이유? 이유라면 있잖아. 넘쳐나도록 많아. 세상은 이유로 넘치고 있어! 오늘따라 일진이 사나웠다던가, 날씨가 서늘하다거나, 하늘이 푸르다거나, 내가 살아있다거나. 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모든 것에 이유를 붙일 수 있다고."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세상에 이유없는 일이 어디있어? 아무래도 좋은 이유야 있지만. 사람을 구하는 데에도 이유는 있는 거야. 이를테면 부자로 보이니까 금전 뜯어낼 목적이라던가 하는 부적절한 이유라던가."

"...흐-응."

"사람을 구하는 데도 이유는 있어. 사람을 죽이는 데도 이유는 있어. 이유가 있고 없고 하는 게 어디있어? 누가 나쁜 일을 하는데엔 이유가 필요하다는 거냐? 성선설 주장?"

"의외로 나쁜 일이라는 자각은 있었네요."

"그야 사회상식이잖아. 여러분, 살인은 나쁜 일입니다."

피가 말라붙은 접이식 나이프를 손 위에서 휙휙 돌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소녀는 매우 드물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명백히 드러내 보였다.

"뭐, 뭐야, 아가씨. 그 표정은."

"뭔가 엄청 와닿지 않는 공익광고를 본 기분이네요."

"이를테면 담배를 푹푹 피워대는 골초가 담배는 몸에 나쁘다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인가?"

장난스러운 비유에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비유가 틀렸어요. 골초는 언젠가 폐암으로 죽으니까 몸으로 신빙성을 입증하잖아요."

"그럼 장수한 골초."

소녀는 무표정하게 손에 든 커피캔을 기울였다. 애초에 골초가 장수할 수 있나? 거기에 대한 가능성의 여부부터 머릿속에서 쌓아올리고 있었다.
모든 것에는 이유나 논리가 있다.

"...확실히 안 와닿긴 하네요. 장수하는 골초가 담배는 몸에 나쁘다고 말하는 건."

"그렇지?"

그는 가늘게 웃으며 동의하고는 달이 다시 구름에 가려져 없어졌을 때를 노린 듯이 소녀가 있는 가로등 불빛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의 모습은 의외로 깔끔했다. 벤치에 앉으며 그는 소녀가 들고 있던 캔커피를 휙하니 빼앗았다.

"아아, 오늘도 수고한 나에게 보상."

"......"

"...그 얼굴 그만두라니까. 무슨 수고를 했는지 물어보고 싶어하는 얼굴인데. 나는 충분히 수고했잖아? 지구의 과도한 인류를 줄여 환경을 평화롭게 하는 공익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일을!"

"어디서 인류 바이러스설을 주장하는 어딘가의 영화에 나오는 악역의 보스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겁니까."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 기세로 맹렬히 손에 든 캔커피를 노려보는 소녀의 기백에 굴하지 않고 그는 커피를 원샷해버렸다.
이제 없어-하며 한껏 장난스럽게 웃으며 빈 캔을 휙하니 던져버리는 남자의 모습을 소녀는 무표정하지만 짜증난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위에서 검은 구름이 흘러갔다.
그 하늘이 한밤중에서 새벽으로 변하려는 기색은 조금도 없음을 가리려는 듯이.

소녀는 턱을 괴며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했다.

"오늘도 싫은 세계네요."

"캔커피 하나로 좌지우지되는 허망한 호감인가. 싫은 세계로구만."

"...새삼스럽게."

"새삼스럽게 싫은 세계지."

그는 손으로 영영 새벽이 오지 않는 한밤중의 하늘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안 그런가?"

이 세상에는 더 이상 '해'가 뜨지 않습니다.
'낮'이라는 시간 절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몹시 안타깝게도, 이런 반푼이 세계지만 오늘도 정상운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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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6 02:21 | 조회 : 1,718 목록
작가의 말
양야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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