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보쿠아카] 화려한 꽃 (1)




붉은 등 아래 아름다이 지저귀는 깃 없는 새들아
어찌 만개한 잎을 가지고도 옭매였느냐
하늘하늘 유려하게 춤추고도 벗어나질 못하니
너 있을 곳 이 철장 외엔 어디란 말이냐







*


보쿠토는 지겨운 회의에서 막 도망쳐 나온 참이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며 숨통이 트임을 잠시나마 만끽했다. 꼬장꼬장한 노친네들 사이에서 거래와 협상의 지루한 줄다리기를 더는 못 듣겠어서였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강요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자유를 갈구하는 법, 보쿠토 또한 그랬다. 뒷간에 간다는 구차한 변명을 대며 나와야 할만큼 견디기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지루한 것을 죽기보다 더 힘들어 하는 보쿠토였기에 그는 자존심은 연못물에 잠시 띄워놓고 발걸음을 가벼이 했다.


소란스러웠다. 분명 아버지가 대동한 하인들이 저를 찾고 있는 것이라 직감하며 보쿠토는 그들의 그물망을 피했다. 낯선 지형에서도 능숙히 도망가는 것을 보면 결코 한 두번으로 따돌릴 수 있는 실력이 아니리라. 그는 부지에 들어올 때 눈에 익혔던 길을 기억해내어 이리 저리 하인들의 눈길에서 빠져나갔다. 아직 부지 안에서 나가시진 못하셨을 거다! 소리치는 사내가 등진 뒷문 그 건너에는 애도의 인사를 날리는 보쿠토가 있었다.


"어디 가시렵니까, 도련님."


그 뒤에는 보쿠토와 이십여년을 함께 한, 그의 아버지가 직접 붙여준 동년배의 하인이 있었다. 그는 황당해하는 보쿠토의 표정을 보고 드러나게 조소했다. 도련님이 날뛰어봤자 제 손바닥 안 이라는 문자를 고스란히 담고있어서, 보쿠토는 당황했다. 분명 안에서 다른놈들과 함께 있던 것을 이 두눈으로 봤는데, 생각하며 보쿠토는 입을 어벙거렸다.


"분명 다른 놈들과 함께 있던 것을 내가 봤는데, 하시는 듯한 얼굴이네요."

"너, 너.."

"제가 도련님을 몇년째 봤다고 생각 하십니까."


그는 보쿠토가 뒷문으로 도망칠 것을 알고 미리 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지에 들어설 때 부터 보쿠토의 눈이 쉴새없이 일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는데, 많은 눈을 피해서 나와야 하는 보쿠토 보다 행동이 자유로웠던 그의 행동이 빠른 것은 당연지사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보쿠토가 뒷문으로 나타났고, 제 할일은 해야 하는지라 그는 보쿠토를 불러세웠다.


본디 학업에 관심이 없고 무예와 밖으로 나다니는 것에 중점을 둔 도령이였다. 우둔한 머리는 아니었으나 글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보쿠토의 아버지는 꽤 큰 상단의 주인이었는데 그는 보쿠토가 상업 마저에도 관심이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해 그를 끌고 인수인계 현장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냥 둔다고 제 뒤를 이을 녀석도 아닐 뿐더러 무엇보다도 밖으로 돌기만 좋아하는 녀석이 괘씸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갈길 가려니 따라오지 마라."

"주인어른이 노발대발 하실게 뻔하지 않습니까."


죄 없는 녀석들만 죽어나갈 거라고, 하인은 덧붙였다. 그러던가 말던가 보쿠토는 막무가내였다. 여기까지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며칠째 마음대로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니 딱 죽을 맛이었다. 더 있다간 아랫것들이 죽어나가기 전에 제가 먼저 뒤질 참이었다. 그는 귀를 막으며 그저 앞으로만 발을 옮겼다. 갈 곳을 찾지 못하는 걸음이었다.


"...어딜 갈지 알긴 하십니까?"


그저 저를 등진 채 앞으로만 도망가는 보쿠토에게 물었다. 정곡인지, 빠르게 전진하던 보쿠토의 걸음이 슬며시 느려졌다. 귀를 막은 채로 곧 멈춰서는 것을 보니 들리긴 하나보다, 생각하며 하인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십 리 떨어진 곳에 요시와라라는 동네가 있는데,"


보쿠토가 슬며시 뒤를 돌아봤다.


"남색까지 즐비한 엄청난 유흥가라더군요. 한번 가 보시렵니까?"

"..나는 색에 관심이 없다."

"그건 저도 압니다만, 혹시 알고 계실까. 본가에 도련님이 불구라는 소문이 가끔 이야깃거리라는 것 말입니다."


고자가 아니냐고, 하인은 농을 던졌다. 보쿠토는 한대 쥐어 박을까, 하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도망갈 곳을 친절히 알려주는 것은 분명 나중에 저를 쉽게 찾기 위함일 것인걸 알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가장 크게 터질 것을 알면서 저를 배려하며 소문을 동시에 잡고, 눈 감아주기까지 하는 녀석의 행동에 보쿠토는 돌아올 때 노리개라도 하나 가져다주마, 하고 받아쳤다. 하인은 빨리 꺼지라는 듯, 솔길을 따라 곧장 왼쪽으로 가라 일러주고 뒷문으로 들어갔다.


보쿠토는 색으로 그 명성이 자자한 요시와라로 별 흥미 없는 발걸음을 떼었다.







*


아카아시는 간만에 사쿠사와 함께 장에 나왔다. 오늘은 한달에 하루 손이 없는 날이었고 그는 이 휴일을 즐겨야만 직성이 풀리겠노라 직감했다. 그는 연분홍의 꽃과 화려한 나비가 수놓아진 부채를 접어들고 앞장서서 걸었다. 간만의 외출이라 꽤나 들떴다.


아카아시는 조곤조곤, 그러나 막히지 않게 이야기를 했다. 오늘도 홍등은 여전히 밝구나. 이젠 날이 풀려 얇게 입고 나와도 될 것 같다. 저 금붕어들은 언제 봐도 질리지가 않는구나.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이 없어 혼잣말이나 다름 없었다.


함께 있는 자는 말이 없지만 둘 사이엔 어색함 또한 없다. 마치 그것이 일상인 듯, 물 흐르듯 흘러가는 아카아시의 흠색을 모두 흘려보낸 사쿠사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저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다했다. 아카아시는 웃으며 물었다.


"단것이 먹고싶지는 않느냐? 저기, 붉은 저것은 어떻느냐."


아카아시는 사과사탕을 들고 뛰어가는 어린아이 둘을 가리키며 붉어진 입술이 꽤나 볼만 할 것 같은데, 덧붙였다. 사쿠사는 아카아시의 손 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제 무릎께가 고작일 정도의 작은 아이들이었다.


"..."


사쿠사가 아이들을 보며 표정을 굳히자 아카아시는 좀 더 웃었다. 원체 표정 없는 사쿠사의 얼굴이 굳어지는게 보기에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사쿠사는 아카아시를 슬쩍 흘겼다. 그만하라는 무언의 협박이 안에 들어있었다. 그것을 읽은 아카아시는 끝까지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농인데 뭘 그리 발끈하느냐."


하고 넘겼다.


그는 벚꽃잎이 흩날리는 기분좋은 저녁바람을 맞으며 그대로 사쿠사와 함께 두어골목 더 들어갔다. 밖에 비해 안골목은 그리 화려하진 않았으나 여전히 붐볐고, 색다른 분위기가 거리를 사로잡고 있다. 여자와 남자, 한 쌍이 주로 이룬 거리는 사뭇 축제와는 조금 떨어진 분위기였다.


아카아시는 망설임 없이 넓게 자리잡은 무기상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이용하고 있는 상점이었다. 그러나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구조라, 그는 벽에 주욱 나열된 검들을 둘러보다 안쪽 깊숙히 돌고 나오더니 사쿠사를 툭 치며 말했다.


"쇠붙이는 암만 들여다봐도 무엇이 강하고 약한건지 나는 모르겠으니 네가 가지 않겠느냐."

"저는 제 검으로 충분합니다."

"너야 그렇지, 옆에서 검집 덜렁이는 소리를 듣는 내가 불안해서야 원."

"..."

"네 검은 날 지키기 위한 것 아니냐."


호위무사랄까, 아카아시가 외출할 때 항상 동행하는 사쿠사였다. 조막만하던 것이 이제는 저보다 더 큰것을 보며 아카아시는 세월 빠르긴 하구나, 느끼며 한편으론 아쉬워했다. 이쁜 구석이 없는 저 성격이 귀염성 있었으면 좀 좋아. 그는 저를 가만 보고있는 사쿠사의 등을 밀었다.


"하나 고르라고."


행동은 민첩한 것이 이럴때만 굼떴다. 눈치도 빠른 편이면서, 모른척 하나는 일등이었다. 결국 아카아시가 주인장을 불러 검 몇개를 그의 눈 앞에 들이밀고서야 사쿠사는 못이기는 척 그것들을 둘러보았다. 검을 내민 사내는 둘을 잠시 살펴보다, 아카아시에게 친근한 척 말을 붙였다.


"또 선물하는거요?"

"그렇게 되었네요."

"전에 사간지 얼마 안되었으면서."

"저 아이가 워낙 험하게 다뤄야지 말입니다."


아카아시는 베푼만큼 갚지 않겠습니까? 하며 웃었다. 주인장과 아카아시, 둘이 소소한 담소를 나누는 사이 사쿠사는 검 하나를 빼들어 돌려 보다 이내 허공에 휘둘렀다. 휙, 칼날이 바람을 가르고 제 자리를 가볍게 지켰다. 사쿠사는 그 뒤로 두어번 같은 행동을 하더니, 곧 하나를 골라잡고 아카아시를 쳐다봤다.


일종의 부끄러움 표시였다. 부끄러워 한달까, 수줍어 한달까. 그는 딱히 정의내리기 힘든 행동을 하곤 했는데 어렸을 때 부터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에 아카아시는 주인장을 쳐다봤다. 하여간 츤데레. 계산을 하는 도중 괜히 벽에 눈을 박고 있는 사쿠사를 보며 속으로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또 오쇼."


짤막한 무기상 주인장의 인사를 뒤로하고 둘은 걸어왔던 거리를 다시 되돌아갔다. 아카아시의 걸음은 느릿했지만 그 안에 분명한 여유가 있었다. 사쿠사는 결코 느리게 걷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군말없이 한 발자국 뒤에서 착실하게 아카아시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돌연 아카아시가 걸음을 멈추더니 사쿠사를 돌아봤다. 거리를 유지하던 사쿠사는 왜 그러느냐는 듯 아카아시를 쳐다봤다. 새 검을 얻어 들뜬 마음을 숨기느라 바빴는데 내가 갑작스럽게 돌아봐서 당황했겠지, 생각하며 아카아시는 여전히 말 없는 사쿠사에게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벚꽃비가 예뻐서 말이다."


그제야 사쿠사는 아카아시와 제 머리, 어깨 언저리로 내려앉은 꽃잎들을 보았다. 잎은 위에서부터 하늘하늘 춤을 추듯 저를 스쳐지나가 바닥에 떨어졌고, 그 사이에 다홍빛 기모노를 입고 활짝 핀 부채로 얼굴 반을 가린 채 웃는 아카아시는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두 눈에 아카아시를 오롯이 담은 사쿠사 그 뒤로 보쿠토가 서 있었다. 그 또한 아카아시를 보았는데, 가히 미인이라 할만한 미모에 그를 꾸며주는 모든 것들이 절묘하게 빈틈을 채워, 돋보이게 만듦에 감탄했다.



길을 잃어 같은 곳을 몇번이고 몇시간이고 배회하던 보쿠토는 못 써먹을 동네라며, 돌아가면 하인놈을 한 대 치리라 하던 보쿠토 안의 짜증이 눈 녹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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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3-12 14:59 | 조회 : 1,80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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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명고자는 오늘도 슬피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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