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The Philosopher King

때려씨가 아직은 목소리도 들어보지 못한 온라인상의 친구, 나사랑을 생각하며 설렘에 상기되어 있는 상황을 흔히들 하는 젊은 남녀간 썸 타기의 한 장면 정도로만 상상한다면 쫌 곤란하지 싶다.

이러한 순간이 도래하기까지는 때려씨가 살아오며 겪어야 했었고 고심해야 했던 인생의 마디마디에 사색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통한 깨달음들에 크게 반응하여 주며 지켜보아 주던 나사랑 이였다.

그가 그녀를 떠올릴때면, 하늘아래 어딘가에 있을 반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하고 지구옆의 달처럼 든든함마져 주던 그녀였다.

만명 팔로워의 시작이 그녀였던 것이다.

때려씨의 삶을 돌아보자면 그에게 온전한 안식처와 보호자 역할을 해준 엄마와 아빠를 돌아보게 됨이 당연하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사내아이가 자라면서 공급 받아야하는 양육의 토대로는 부족한면이 없었다.

물질적으로 호화롭게 넘쳐나거나 고급진거와는 다르지만 개조씨의 노력과 옥순씨의 헌신 덕택으로 궁핍한 적은 없었으며 오히려 정신과 감성의 질적인 차원에 있어선 때려씨에게 커다란 자산이 되어준 셈 이였다.

다만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버지의 골격이 할아버지쪽이 아닌 할머니쪽을 닮아서 무골은 아니였고 어머니도 작고 아담했기에 신체적으로는 평범했다.

때려씨의 얼굴은 아버지쪽 영향이 보이지만 피부나 손가락 발가락등의 골구조와 모양은 어머니쪽의 영향으로 모양새에는 균형감이 있었어도 굵직하거나 듬직한 모습은 아니였다.

때려씨 스스로도 청소년시절 그점으로 인하여 매우 안타까워 하면서 테니스 선수의 꿈을 위해서 우유도 엄청나게 먹으며 노력해 보았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고민의 무게가 커서였는지 그의 키는 170을 겨우 넘기곤 멈춰 버렸다.

그의 성격이나 스케일 면에서는 좀더 덩치큰 남자가 되는것이 어울렸을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학교에서 주로 끝번호대의 키큰 아이들과 어울렸고 특히 초등학교때부터 일생의 친구이자 인생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관찰 대상이 되어준 친구 강오석은 키가 183에 몸무게 80의 근육질 몸짱 이였다.

이러한 신체적 상태가 약간의 아쉬움이고 다른 한가지는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모두 스피드한 면이 없어서 그가 물려 받은 느린 속도감 이였다.

그의 가족들은 걷거나 말을 하거나 무슨 일을하든 하나씩 짚어가며 순차적으로 천천히 하는 스타일들에 해당된다.

그나마 아버지는 오랜 경제 활동과 사회 활동을 거치면서 일과 관련되거나 돈의 거래에 있어서는 순발력이 붙어 있었지만, 어머니는 전업주부와 아버지 회사의 회계와 전화 업무로 투잡 경력이 상당 했었음에도 매사에 찬찬히 또박 또박하는 시골의 아낙과도 같은 모습엔 변함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하여 때려씨가 어려서부터 책을 읽으면 그 속도가 매우 느렸다.

그에게 있어서 속독이란 신비의 세계 같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때는 속독학원에 등록해서 다녀보았지만, 곧 그만두고 만다.

그가 책을 읽을때면 한 문장을 읽고난후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나서야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곤 한다.

빠른 속도로 많은 글자들을 규합해서 요점을 정리하는 것이 어린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로만 여겨졌던 이유이다.

이것이 모두 어머니와 아버지로터 물려받은 영향이라고 할 수 있고 때려씨가 수동적인 교육과 상대평가에 치중하던 학교체제에서 저평가를 받은 원인이며 학교 교육에 흥미를 잃기 시작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덕분에 그는 학교 성적에 얽매이지 않기 시작했었고 그래서 그는 다른 학생들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그만의 사고방식이나 관점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장점 역활을 했다고 봐야 할런지 모른다.

아쉽게도 형제자매는 없이 자라야만 했었지만 개조씨 부부의 권위적이지 않고 편안한 인성은 아들에게 형이자 누나였었고 편협하게 갇혀있거나 치우치지 않았던 그들의 감수성은 아들에게 때론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었고, 아들이 성인이 된 후로는 더욱 격이 없는 동지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곤 했다.

특히 엄마 옥순씨는 여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해준거나 다름없는 어메이징한 감성의 순수엄마 였다.

강요나 지시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 친한 누나 같으며 호칭도 때려라는 이름대신 "아들" 또는 "도련" 이라고 불러왔다.

사실 작명 당시에도 옥순씨는 상당히 반대를 했었다.

TV 앞에 앉아서 노래를 따라 부르며 리듬을 타거나 박수라도 칠때면 여동생 같이 귀여운 소녀의 모습도 보여주곤 했다.

그가 엄마를 떠 올릴때면 하얀 목화꽃 같은 느낌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이유는 그녀가 목화꽃과 그흰색을 사랑했고 그 꽃에 담겨있는 정순왕후의 이야기처럼 그녀의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타인들에게 있어서도 언제나 보살핌의 아이콘으로써 그 자리를 지키며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된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그녀를 지켜보는 아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엄마의 마음이 잘 보이고 느껴졌다.

때려씨는 언젠가는 엄마처럼 하얀 목화꽃같은 느낌을 주는 여인과 결혼을 하겠다고 생각하곤 했었으며, 지금 그에게는 바로 나사랑이 그동안 둘러보며 찾아 해맷던 꽃들중에선 가장 그 목화꽃에 어울려 보이고 있으니 그의 설레임은 가히 그럴만한 것이었다.



목화꽃에 얽힌 이야기

조선왕조의 왕들은 대부분 단명을 하였었고 비교적 수명이 길었던 몇명의 왕들중 영조가 82세로 가장 장수한 임금이라고 한다.

1757년 정성황후가 죽고나서 영조는 후궁들 중에서 황후를 간택하지 않고 궁밖의 처녀들 중에서 간택을 하기로 했다.

66세의 영조가 왕궁으로 사주를 보내온 15세에서 20세 사이의 처자들을 상대로 면접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각기 저마다의 이유로 화려한 꽃들의 이름을 올렸으나 서산에서 벼슬없이 살다 한양으로 이사온 김한구의 15세되는 딸이 유별나게 목화꽃이 가장 곱더라고 말을 한후 그 연유를 묻자 답변이 이러했다.

"목화꽃은 비록 그 화려한 미는 없지만 그 꽃 덕택에 솜으로 백성들이 따뜻하게 지낼수 있으니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살핌의 모성애를 품고 있는듯한 어린 소녀의 성숙한 마음이 상상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우연이라거나 준비된 모습의 일면이라고 말하기 곤란할 정도로 간택시험 내내 계속되었다.

일부 역사를 전하는 시각들은 정순왕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곤 했지만, 그것을 액면대로 받아들이기 곤란했던 옥순씨 가족들은 더욱 정순왕후의 생애에 관심을 가졌었고 정순왕후의 출생지인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까지 찾아가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귀동냥하기까지 했었다.


정순왕후 이야기

1745년 음암면 유계리 한적한 외딴집에 갓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퍼지고, 그 집에는 하늘에서 환한 빛이 내리더니 많은 새들이 날아들어 마치 아기의 출생을 축복하는듯한 장면이 펼쳐졌고 온 동네에 그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 했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김한구씨가 사도세자의 장인이 되는 홍봉한씨에게 신임과 도움을 얻어 한양 남산아래로 이사를 오게되었고 어린 정순왕후가 13세가 되었을때는 [춘추좌씨전] 을 줄줄 외울정도여서 그 영특함과 반듯한 외모로 소문이 자자했었다고 한다.

그무렵이 1757년 영조 33년이고, 이때에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돌아가신다.

그리고 그후에 새로운 왕비를 간택하는 시험을 앞두게 되는데 어린 정순왕후의 가능성을 본 홍봉한씨의 추천으로 김한구씨도 어린딸을 후보로 올리게 되었다.

간택 시험장에 들어선 처자들이 모두 방석에 앉아 있을때 오로지 정순왕후만이 방석에 앉지 않고 있었는데, 관원이 그 연유를 묻자 -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자식된자로 앉을수가 없었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무슨 고개인가?" 라는 질문에는 백두산, 한라산, 계룡산등 저마다 높은산의 이름을 올리적에 정순왕후는 '보리고개' 라 답하며 또 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밖에도 그 유명한 목화꽃 답변과 기와지붕 답변이 있다.

당시 시험장 기와지붕의 골이 몇개인지를 알아 맞추는 문제였는데, 다른 처자들은 밖으로 나가서 지붕의 골을 세고 있을때에 15세의 정순왕후는 방안에 있으면서도 지붕밑에 떨어진 빗방울 자국들을 살펴 그 수를 헤아려 냄으로써 그 총명함을 증명했다.

이리하여 영조 35년 6월에 왕후가 된 정순왕후는 어릴적 서산에서 한양으로 이사올 당시에 추운날씨에 당진 나루터에서 가족의 곤란함을 모면하게 해주고 어린 자신에게 가죽옷을 선물해 주었던 이사관 이라는 사람의 고마움을 잊지않고 있다가 보답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했던 정순왕후가 17세무렵 사도세자의 죽음에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견해는 받아들이기에 무리라는 주장이 있다.

정순왕후가 19세가 되던해, 1763년에는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었었고, 그 수가 어림잡아 50만명이나 되었으니 정순왕후가 영조께 고하여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것은 물론이고 궁중의 양식을 절약하라고 명령하였다.

심지어는 5품이하의 부인들은 아침과 저녁 두끼만 먹되 그것도 죽으로 먹을 것이며 남은 쌀은 모아서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명하였으며, 이에 백성들은 왕후의 어질고 착한 마음씨에 눈물을 흘리며 쌀을 받아갔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순왕후는 영조께 궁중여인들의 가발이 무겁고 둔하여 그 활동이 민첩하지 못하고 게으르니, 그 가발을 못하게 하자고 건의 하였으며 누에를 많이 길러 외국에서 비단을 수입하지 말아야 나라의 부가 축적된다고도 하였다.

당시 도성내에 많은 무당들이 있었는데, 지위가 높은 여인네들이 무당을 믿고 무당에게 돈과 물자를 허비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있어다고 한다.

이에 정순왕후는 영조께 그 무당들을 도성밖으로 내 보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임금을 도와서 어진 정치를 하도록 종용함은 물론이였고 [임진일기] 를 한글 책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과거 일본의 비행을 잊지 않도록 하였는가 하면, 30세때는 효도에 관한 책을 지어 효도가 사람에게 중요한 도리라고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1776년 정순왕후가 32세 되던 3월에 영조께서 돌아가시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니 정순왕후는 대비가 되어 정조가 국정의 안정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정순왕후는 정조에게 명령과도 같은 두가지 건의를 하였다.

하나는 탕평책을 써서 노론과 소론의 두 당파로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여 당파 싸움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정의 안정을 꾀하라는 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물자를 아끼고 절약하여 굶주리는 백성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도세자의 아들이였던 정조는 50대가 되기도 전 정순왕후가 56세 되던해에 운명하고 만다.

최근 들어난 그의 비밀편지에 의하면 막말과 기복이 심한 성정이 담겨있어서 충격을 주고있다.

정조의 사후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순왕후가 임금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기에 이르른다.

그때에도 정순왕후가 신하들에게 강조하기를 "사치스런 마음과 백성들의 재산을 탈취하는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며 나이가 어린 임금이라고 업신여긴다면 백성들에게 본이 되지 못함으로 큰 벌을 받을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전해지는 정순왕후의 삶은, 역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국모의 일생이 아니던가,,

옥순씨와 그 가족들은, 온 나라에 만연했던 친일의 여파로 후대에 길이 추앙받아 마땅한 한 위대한 국모의 삶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채 외곡 되어 왔었다고 생각한다.



때려씨의 어머니 방옥순 여사는 바로 이러한 정순왕후의 마음가짐이 바로 여인이 가질법한 마음이라 여기며 젊어서부터 깊이깊이 마음속에 되새기며 살와왔고 그런 그녀의 마음이 삶에서 베어나왔다.

당연히 그러한 마음 씀씀이가 개조씨에게도 크게 다가와서 두사람이 데이트를 즐기던 시절에는 개조씨가 종종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 얼굴이 고와야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라는 유행가를 자주 흥얼거리며 빛깔만 번지르하고 실속이 없는 개살구처럼 외모의 치장에만 전심인 여인네들을 죽자사자 쫓아다니는 또래들의 헛물키는 경우에 비해서 자신은 행운아라며 다행스러워 하곤 했었다.

그렇다고해서 아내 옥순씨의 외모가 남들에 비해서 좀 빠지기라도 하는 것은 아니였지만 그만큼 그녀의 성품이나 내면의 마음 씀씀이가 가족과 주변인들에겐 아늑한 숲속의 청정한 샘물같이 소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들 때려씨도 엄마에게서 여자들과의 교제나 미래 결혼에 관하여 도움을 주려는 말들을 듣곤했는데 언젠가 언급되어진 목화꽃에 얽힌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서 들은후에야 비로서 그녀가 일상속에서 단아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과 평소 은은하면서도 부드러운 여인의 마음 씀씀이들이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인에게서 남자가 기대할 수 있는 가정의 내조자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참 좋아보이는 모습이라 여겨 왔으며 자신의 미래 아내에게도 기대하고픈 모습들이라고 생각해 왔다.

뿐만 아니라 그 어린 소녀의 처세를 통해서 여인이 자신이 처해있는 시대와 현실을 잘 이해하고 그것에 맞는 자신의 역할을 설정해내는 지적인 센스가 매우 매력적이라고 여기게 되었으며 자신에게 잘 맞는 스타일 이라고 확신했었다.

그와 같은 선상에서 아인슈타인의 아내와 제갈공명의 아내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에서 처럼, 남편의 이름에 비해서 들어나지 않은 그녀들의 영향력에 관한 일화나 고구려의 태조 고주몽의 아내였던 소서노의 삶이 고구려의 건국은 물론이고 백제의 건국과 당시 미개했던 왜구지역이(일본) 국가적인 형태를 형성하는데 기여했다는 이야기들을 매우 흥미롭게 여기는 그이다.

행복한 커플이였던 개조씨와 옥순씨 부부는 당연히 아들 때려씨에게 좋은 부부로서 롤모델이 되어줌에 손색이 없었다.

옥순씨가 가정내에서 가족들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곤해진 일상으로부터 재활과 재충전을 시켜주는 아내의 역할을 훌룡히 해냄으로 인하여 개조씨가 사회 활동을 잘 해올 수 있었음을 아들로서 지켜보며 살아온 것이다.

언젠가 아내를 맞게 된다면 자신과 자신의 일을 잘 이해하여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동반자를 얻고 싶다는 생각을 해오던 그에게 나사랑이 목화꽃 같은 느낌의 관심을 끌어내며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때려씨의 혁신적으로 단순화된 논거들은 새로운 철학적 통찰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었으나, 그들중에서도 나사랑은 그 누구보다도 그의 사상을 잘 이해하고 반응하는 팬 이면서도 종교나 환경에 관한 새로운 생각의 계기가 되어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때려씨가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고민하기 시작하고 그것의 원인을 궁리하며 모색하기 시작했던 것은 학교 생활과 자신의 일상에서 관찰 되어지는 타인들을 지켜볼때 그들이 겪는 삶의 굴곡진 순간들 속에서 같이 해결해 보려는 소년의 순수한 '이심전심' 의 마음 이였다.

그러던 그가 학교에서 철학이라는 내용을 처음 접할때는 삶에서 선택하지 않은 불편함과 고통들이 찾아오는 이유와 그리고 그것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을까,, 나름대로 기대를 했었으나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으며, "더 깊은 내용을 알아봐야 답을 얻을수 있나보다" 생각하며 훗날을 기약하곤 했어야 했다.

친구 강오석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이쁜 여자애들이 많다며 꼬여 내어서 전도상품을 위한 전도의 대상이 되어 주면서부터 시작한 교회생활도 한동안 열심으로 다니며 인생에 관한 해답을 구해보았던 청소년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들 속에서 나름대로 내려버린 결론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우리의 인생과 사회에 대해 언어를 가지고 명료하고도 명확하게 정의해주고 설명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할 철학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말장난 같았고 사람들의 삶에 실질적이거나 직접적으로 관여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 상위층 사람들간의 놀이문화 같기만 했다.

과거에 철학을 논할 당시에는 문맹율도 높고 교육을 받을 기회도 별로 없던 시절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일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늘어 놓았다는 것은 "언어 농단" 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철학은 역시 소수 사람들에 의해서 선택되어지는 관심사안 일 뿐 철학이 사람들을 삶을 지켜보며 다가와서 손내미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런가하면 신앙은 너무나도 감성적으로 느껴지곤 했다.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채 그저 사람들의 기복과 숭배의 본능을 끌어내어 신앙에 심취하도록 유도하는듯 비추기 싶상인 모습들과 수많은 허례 의식들에 너무 의존하는 운영방식은 너무 인위적이라는 생각마져 들도록 했다.

또한 이성이 개입될 기회가 부족한 탓에 신앙의 대상과 신앙 행위자들 간의 역할에 혼선이 있음이 보였다.

예를들면 신앙의 의식이나 삶속에서 어떤 행위를 할때에 그것을 신이 원하거나 요구한다는 믿음을 갖게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그러한 행위들을 원했던 것은 신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 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음에도 그러한 이성이 개입될 만할 틈이 잘 주어지지 않았던 것과 기복적 신앙에 치중하는 경우들에 있어서는 신에게 신의 뜻을 구하고 신이 우리들에게 원하고 바라는 것을 묻기 보다는 신에게 자신들의 처지와 미래에 관하여 일방적으로 바라고 요구하는 경우들이 그것에 해당되었다.

그렇지만 때려씨가 신앙 생활을 했던 기간을 통해서 가질수 있었던 특별한 체험 그리고 일반적이지 않은 생각의 관점을 갖게된 것이 있었으니, 그 시간들은 그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고도 소중한 경험이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것을 약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며,, 보통 신앙인들은 믿음이 있는자와 없는자로 나누려는 경향이 있고 혹은 믿음이 큰자 내지는 믿음이 작은자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타인을 이해하거나 수용하기에는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며, 더욱이 자신을 이해시키거나 설득시키기는 불가능하기에 주입식 강요와 맹목적 순종을 절차와 예식으로 둔갑시켜 사람들을 몰고가는 폐단을 부르곤 한다.

때려씨가 가졌던 그 특별한 체험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였는데, 그렇다고해서 그가 모든 사람들이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아야 한다거나,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것을 사람마다 다른 기능과 역활로 살아가는 "다름" 의 차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타인의 다름에 대하여 호의적이거나 수용적이지 못한 유전성을 갖게된 계기는 바로 그 신앙의 오용들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때려씨는 휴머니스틱 사상가 이고 맨탈릭한 철학자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일반적으론 사람들이 외면하게 되곤 했던 타인들의 삶속에 자리잡은 고통과 불행에 관한 의구심을 그는 누구보다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보다 실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려 애썼으며, 그것은 그가 그만큼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 누구보다도 컷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그가 이 시대에 있어서 커다란 '휴머니스트' 가 될 수 있을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는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또 그가 사람들의 행동과 언어를 주목하여 그들 정신의 체계를 진단해내고 원인과 결과 라는 간단한 논리만을 가지고도 쏟아내는 명료한 해법들은 그가 혼란속에 허덕이는 현대인들의 멘탈을 이끌어낼 철학자의 임을 증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것들의 배경에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적 요인과 자라났던 환경적 영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나 타인들 삶속의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영향들을 관찰하고 그것으로부터 원인을 추론해 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할 수 있도록 해주곤 했다.

논증법이나 논리의 이론을 특별히 공부하지 않았으면서도 추리와 추론을 통해서 서술한 내용들을 '종의 세부진화' 라는 가설에 정리해 놓은 적이있다.

"진리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데에는 연역과 귀납, 이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라고 말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처럼, 때려씨도 이 방법들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었지만, 때려씨는 베이컨의 책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다.

단지 그는 사고를 진행함에 있어서 step by step 이나 단계적 이라는 말처럼 계단타기를 했을뿐인데,, 여러 기존의 사실들로부터 새로운 특정 사실을 추론하여 도출할때는 계단이 오르막을 향하듯 그 범위를 좁혀가며 정상에서 결론을 얻었으며, 반대로 한가지 특정 결과로부터 다양한 원인들과 이유들을 추론할때는 계단이 내리막을 향하듯 단계별로 관련성들을 확장시키며 내려간 것이였다.


그는 사고의 체계를 방법과 형식의 관점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마음과 본능에 쏠려 움직이는 관심사안에 초점을 맞추고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그가 여러 사람이 같은것을 보아도 각 사람의 관심과 우선순위에 따라서 그 관점이 제각각 일 수 있음을 경험했기 때문이였다.

예를 들자면, 같은 주제나 이슈로 여러 사람이 동시에 계단타기를 했을 경우에도 각각의 사람이 각단계의 계단에서 추려내는 내용들이 얼마든지 다를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는 방법과 형식의 장황한 설명을 싫어했다.

복잡해 보이는 것도 간단히 설명해 주어야만 마땅한 것을 반대로 간단한 원리를 복잡하고 길게 늘어 놓는다면 그 만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였다.

그는 공사 현장에서도 작업자들이 후임이나 보조자들에게 방법과 요령은 물론이고 각종 변수에 대한 대처 또는 주의사항등의 핵심내용을 반드시 주지 시킬 것을 강조하곤 했다.


'종의 세부진화' 라는 설은 그가 과학자는 아니지만 인류가 지나온 삶의 흔적들 속에서 나타나는 사실들을 관찰하여 정리해 본 논거로써, 마치 과거 철학자들의 시대에 학문의 유형이나 경계에 뚜렷한 구분이 없이 자유롭게 넘나들던 시절을 연상시켜 주듯 자유로운 사색의 한면을 담아 보여주는 설명들이였다.

온갖 다양한 호기심과 의구심들로 가득했던 청소년 시절, 그것들을 쫓아서 다양한 경험들을 해 보았던 때려씨 였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그 사람들 삶과 사회에 관한 의혹들의 실마리를 잡게된 계기는 아버지의 일을 도와 같이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지금같이 공사의 규모가 커지기 전의 개조씨는 주로 보수공사를 맡아서 해 왔었다.

보수공사의 특성상, 문제가 불거진 부분의 원인을 먼저 대략적으로 추정하여 진단을 한다음, 그것의 원인을 드러내고 규명해내기 위해서 적절한 스케일로 부수거나 파내거나 잘라내는 순서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수리와 고침이 필요한 모든 직업군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부분들이다.

예를 들면 각종 수리공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의사, 정비사, 교육자들에게 까지도 요구되는 필수적인 작업 공정인 것이다.

문제의 진단과 그 원인에 접근하는 이 시작단계에서 이미 그들의 업무적 능력과 경험 그리고 경험해 보지못한 문제를 만났을때의 사고의 유연성과 상상력이 공개되기 시작하고 인간성 마져도 드러나기 시작하곤 한다.

이러한 시작단계가 중요한 이유는 부족한 상황파악이 잘못된 접근과 시작으로 이어지고 비용과 시간의 낭비는 물론 구제와 도움을 기대했던 사람에게 오히려 피해를 가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일단 방향과 스케일이 정해지면 파고 부수거나 절단하여 그 부위를 드러나게 하는 확인 작업이 진행되고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과거에 행해진 작업의 실체가 모두 드러나기 시작한다.

당시의 시공자가 어떤 자재를 가지고 어떤 공정을 따랐는지와 어떤 마인드로 작업에 임했었는지 까지도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런 다음엔 제대로 된 자재를 가져다가 적정한 공정으로 복구를 해나가면 되는 것인데, 이런 부분적인 하자보수 과정의 반복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때려씨가 주목하게 되었었고 깨달을 수 있었던 사실들이 몇가지 있다.


그중 하나 -
자신과 아버지가 애당초 건설이나 건축으로 시작했던 사람들이 아니였지만 다양한 파트의 하자보수들을 해결해 나가는 동안, 자신들이 어느새 건물의 기초 공사에서부터 인테리어와 설비는 물론 공사의 마감까지 해낼수 있게 되었던 경험들을 통하여, 부분적인 결과들을 적절히 조합해 낸다면 전체라는 큰 그림을 그림에 있어서 때론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을 체험을 한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분야이건 우리가 시작을 하게되면 자연스레 그 분야의 과거 타인들의 업적으로 안내 되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곤 그것들을 습득하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 유능함 이라고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누가 무엇을 했고 누가 무슨 말을 했으며, 언제 무슨일이 있었는지를 많이 잘 알고 있는 것이 치부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남의 발자취 만을 따라가고 타인들의 생각들을 자신의 머리속에 집어 넣느라, 정작 자신의 방법과 자신만의 생각이 자리잡을 시간이 부족하지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였다.

그것을 비유하자면 남을 따라서 탑을 쌓기만 해본 사람이 탑을 쌓는 것과 탑을 수리하던 사람이 탑을 쌓는 경우를 비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이 했더대로 쌓기만 해오던 사람은 그 속도가 더 빠르겠지만 수리를 해오던 사람은 부실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쌓을 기회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작은 오류들을 인식해내지 못한다면 원천적인 원인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말로도 가능하다.

그것은 즉 작은 오류들의 원인을 잡아낼 수 있을때 그 오류들의 근원지로 접근할 기회가 더 있다는 것이며 나아가서 예방까지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
건축이 종합 예술이라고들 말하듯이 다양한 분야의 기능자들이 각자의 역할들을 해내어 가며 이루어 내는 공동의 결과물이다.

그 결과물의 방향과 질적인 수준을 이끌어 내야하는 책임자의 역할은 기획 단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의 모든 공정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말 그 책임자에게 중요한 것은 공사가 끝난 시점부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그 건물이 사용되어지는 모든 순간내내 끊임없이 그 책임자는 자신의 작업 결과물로 인하여 평가 받아야 한다.

책임자라는 자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중요하겠지만 각파트의 사람들이 어떤 결과물을 내게 하였는가에 모든것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그 일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해야 할 만큼 중요한 사람의 채용에 달려 있었다.

훌룡한 채용의 결과는 이미 보장받은 것과 다름 없었고 부적절한 채용의 결과는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길이 없었다.

채용의 승패는 곧 책임자의 승패였다.

또한 해야할 일을 익히는 것 ( 기능적인 역할 ) 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 ( 욕구나 본능같은 개인적인 필요나 상황 ) 로부터 훈련되어지기가 더 어렵고 훨씬 더 중요함을 깨달았다.

또 그것들을 인식 시켜주고 지속적으로 주지 시키며 관리 감독해야 하는 책임자의 역할은 너무도 중요하다는 사실이였다.

언뜻 생각하면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대등하거나 대립하는 관계나 개념으로 생각되어지지만 그렇지 않았다.

모든 욕구와 본능과 이성적 필요가 맞물려서 돌아가는 우리의 하루하루가 혼돈에 휩싸이는 순간들은 대체로 이성보다는 욕구와 본능이 더 강하기 때문이고 바로 그것들 중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개인들의 집합체인 사회가 혼란을 겪는 경우를 돌아보니 많은 경우에 있어서 ' 무엇이 더 중요한가 ' , ' 무엇이 먼저인가 ' 혹은 ' 무엇이 더 옳은가 ' 와 같이 기본적인 개념들이 우선순위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양상이였다.

매우 기본적인 개념들의 충돌이지만 뜻밖에도 그러한 일들은 사회 곳곳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본능과 욕구에 해당하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잘 훈련이 되어지면 그것보다 힘이 약한편인 이성적인 일들은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구성원 각자가 하위 개념인 이성에만 익수하고 상위 개념인 본능과 욕구들을 익숙하게 다루어내지 못하는 상태라면, 결과적으로는 상위개념 없는 하위개념 자체가 불완전하기 마련임으로 의견들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대립과 분쟁이 빈번해지는 원인이 된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었다.

때려씨는 이처럼 삶의 현장에서 얻은 체험들을 통해서 개인의 삶과 사회 전체가 간과하기 쉬워 보이는 개념들을 정리해 보는 경험을 얻게 되었었고, 그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색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한달후 -
어느덪 때려씨가 1만여 팔로워들에게 띄운 포스트는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고 "국가 리모델링 조합" 의 팔로워는 한달만에 천만명에 육박하면서 전국은 골씨 가족의 행보로 몸살을 앓아가고 있다.

골씨 부자가 평소에 나누던 대화중에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들이 사회를 위해서 할 수 있고 해야할 일이 있다면, 일단은 시도라도 해봐야 한다는 의견의 일치를 본적이 있었다.

가족이라는 작은 규모의 사명감으로 부자간에 시대에 걸맞도록 최소한의 액션을 취해본 것이 대한민국에 불고있는 태풍의 중심에 개조씨네 가족이 있게된 계기를 주었다.

부자간에 모의를 하면서도 그토록 오랜동안 천천히 바뀌는 세상을 그들이 바꿔야 한다거나, 그들이 그것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다만 ' 개인의 사회적 역활과 사명감 ' 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일만큼은 해보자는 의기투합 이였다.



자원봉사자들 오프라인 미팅날 -
때려씨가 모일 장소에 미리 나와서 그날의 조간 신문을 읽고 있다.

아버지의 인터뷰 기사이다.

신문기자 -
현재 조직중이신 '국가 리모델링 조합' 도 결국엔 새로운 정당의 활동으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개조씨 -
진행하고자 하는 국가 리모델링에는 정당 활동의 조정과 축소가 그 일부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당이란 정치적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단인지라 정치회사로 보시면 맞을 텐데요, 그분들에겐 재정라인 경제적 이권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 입니다만 저희 조합은 가입비나 회비가 일절 없으며 모든 활동의 비용은 당사자들의 자비로 충당 됩니다.

물론 조합내엔 일체의 재무구조가 없는 셈이죠,, 강조하지만 우리는 이익단체가 아닙니다.

국가를 새롭게 재건하고픈 절박한 심정의 시민들의 자발적 활동으로만 진행 됩니다.

때려씨가 신문을 읽고있는 중에, 신문넘어 저만치에서 한무리의 젊은 남녀들이 오는 것이 보인다.

반사적으로 그의 눈은 나사랑을 찾아내고 몸의 털들이 일어서기 시작한다.

하얀색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녀를 쾌속으로 스캔해가며 목화꽃과의 싱크로율을 급하게 가늠해 보느라 숨쉬는것도 잠시 멈춘 상태이다.

"아,, 과연 목소리는 어떨까?" 생각하며 침을 꼴깍 삼킨다.

때려씨는 남달리 음성에 비중을 많이 두는 편이다.

목소리에 보다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음악적으로 심취했었던 시절 말고도 이유가 있었다.

친구 강오석은 초등학교 때부터 가출을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하는 말이 있었다.

" 사람이 보기 싫을땐 고개를 돌리면 되지만 목소리가 듣기 싫으면 집을 나가야 겠더라,,"

강오석이 자신의 엄마 목소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언젠가 한 스포츠 신문 '영어상식' 란의 내용을 보면서 꽤나 동조했던 적이 있다.

남녀간의 궁합을 굳이 영어로 표현해 본다면 "Good Vibration" 으로 표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였는데, 서양의 문화권에서도 자신처럼 남녀 서로간이 음성에서 느낄수 있는게 단순한 호감을 넘어설 만큼의 비중이 있다는 내용이 맘에 들었던 것이다.

이윽고 남녀 무리들이 때려씨에게 다다르고 서로간에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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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8-30 04:26 | 조회 : 82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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