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完)

리한은 어려서부터 사랑받는 것에 익숙했다. 선황은 적장자라며 저를 귀하게 여겼고, 선황의 황후는 제 품에서 나온 리한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으며, 리한의 누이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리한을 동경하였고, 궁녀들은 그런 리한이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남몰래 리한을 흠모하였다.

황제가 되고나서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주 잠시, 비오리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있었으나 그도 얼마지나지 않아 리한을 바라보는 눈빛이 변하였다. 모두가 경애하던 카나산도 리한을 사랑했다. 단지 다른게 있더라면, 리한도 카나산을 사랑했다는 것이었다.

카나산이 죽었다. 선황의 죽음은 이미 예견하고 있어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충분하여 아무렇지 않게 여겼고, 그의 죽음보다는 자신이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어서 그리 슬프다고 느낄 수는 없었다. 무능했던 선황은 죽는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카나산은 달랐다.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조차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카나산이 떠난 이후에도 주변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궁녀들은 리한을 흠모했고, 궁밖의 황녀들은 리한을 걱정하면서도 동경하는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오리는 달랐다. 사랑받고 싶어 안달나있던 눈빛이 달라졌다.

그걸 깨닫고보니 비오리의 주변으로 모든 것들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리한을 흠모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궁녀들은 한번쯤은 자신을 안아주지 않을까 라고 슬그머니 기대를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훌륭한 선정을 베푼다고 말하던 대신들은 황족을 생산해 나라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히 카나산이 살아있을 때도 리한의 주변에 있는 자들은 늘 리한을 경애했고, 그에따른 조금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왜 이리도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리한은 머리가 아팠다.

비오리는 리한에게 사랑받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리한은 그에게 사랑같은것을 나누어 줄 틈조차 보이지 않았고, 결국 비오리는 리한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저버렸다.

기대를 저버린다. 나라의 기반을 다지라던 신하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된다면? 언제나 자신을 따르며 존경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리산의 기대를 저버리게 된다면?

"리산을 지켜주세요."

이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리한은 쌓여있던 상소문들을 전부 바닥에 쓸어버렸다.

"젠장.."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숨이 막혔다.

"... 폐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내관이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리한을 바라보았다. 순간 살기가 가득 담긴 리한의 두 눈동자가 내관의 눈과 마주쳤다.

늘 완벽했던 황제였다. 비록 멸망한 왕국의 공주를 황후로 들였다고는 하나, 문제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나라에 도움이 되었다. 황후가 죽고난 이후 조금 흐트러지는 모습이 있었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잃으면 누구나 당연스럽게 보이게 되는 모습이었을 뿐더러, 리한은 황제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절대 게으르게 하지 않았고, 능숙한 감정조절로 대신들과 논의를 할 때엔 슬픔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저 눈빛은 대체 무엇인가. 당장에라도 누군가가 그의 손에 죽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여겨질 정도였다.

"나가."

죽여버리기 전에.

뒷말은 분명 리한이 내뱉지 않은 말이었건만, 내관은 제가 꼭 그 말을 들은 것 마냥 꽁지빠지게 밖으로 나갔다. 내관이 나가자마자 리한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꿈속의 장면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가녀린 카나산. 자애롭고 따뜻하며 강인한 그녀였지만, 멸망당한 고국과 제 지아비 손에 죽어버린 부모를 잊어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리한을 깊이 원망하고 있었으리라. 그러고보니 가끔 카나산의 시선이 이질적일 때가 있었다. 같은 눈빛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으며 리한의 품속에 안겼건만, 그 속에 담긴 것은 평소와는 달랐다.

리한은 머리를 감싸쥐었던 손을 떨어뜨렸다. 잔뜩 헝크러진 머리를 정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리한은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비오리.."

그러고보니 비오리가 또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런걸까. 제 고국에서 받지 못했던 대접과 사랑을 잔뜩 받아놓고, 하나뿐인 핏줄도 받았고, 내 사랑을 받기를 거부해 사랑을 주지도 않았는데.

문을 나선 리한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비오리의 방이었다. 리한이 도착하자마자 문은 당연하다는 듯이 열렸고, 그 안에는 저 구석으로 도망쳐 잔뜩 겁먹은 눈으로 리한을 쳐다보고 있는 비오리가 있었다. 리한을 경계하는 모습이 꼭 포식자를 경계하는 토끼같다는 생각에 리한은 피식 웃었다.

"이리와."

움찔, 하고 비오리의 몸이 움직였으나 비오리는 리한의 곁에 다가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구석으로 도망치려고 몸을 뒤로 내빼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혀를 한번 찬 리한은 성큼성큼 비오리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꽉 움켜쥐고 침대로 끌고가 내팽겨쳤다.

"윽..!"

순식간이었다. 리진이 떠나간 이후 궁은 커녕 이 방 밖으로 조차 잘 나가지 않은 비오리는 얇은 옷을 입고있었고, 덕분에 리한이 비오리의 옷을 벗기는건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가는 몸에 살짝 드러난 뼈대가 보이자 리한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시, 싫어..!"

"시끄러."

억지로 파고드는 품은 너무 비좁았다. 리한에게 그 무엇도 내어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마음 한 구석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이 순간만 즐기면 되니까.

강간과도 같았던 관계가 끝나고 지쳐 잠든 비오리를 내버려둔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상 가득 놓여져 있는 많은 종이들과 그 위에 쓰다 만 글씨. 한참 쓰고 있을 때 리한이 들어왔던 것인지 아무렇게나 놓여진 붓이 글 위에다가 먹을 어질러 놓았다. 글을 조금 읽어보던 리한은 그 글이 리진에게 보내는 것임을 알아챈 리한은 고개를 돌려 잠들어있는 비오리를 보았다.

울다 지쳐 잠든 비오리는 눈가가 잔뜩 빨개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땐 외모도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귀여운 구석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한은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며 재빨리 도리질을 치고는 미련없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비오리를 찾아가는 것을 관둘 수 없었다. 날이 가면 갈 수록 비오리는 점점 더 쇠약해졌고,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리한이 비오리를 찾으러 갈 때마다 가장 많이 듣게 된 소리는 비오리의 울음소리였다. 비오리는 단 한번도 쉬지 않고 내내 울었다. 너무 울어서 리한마저 비오리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엉 울었다.

리한은 비오리가 안타깝다고 생각하면서 또한 그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저렇게 세상이 떠나가라 하루종일 울어재끼는 것인지. 울다가 지쳐 잠에 든다거나, 쓰러져 의원을 부르는 건 리한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 날, 황궁이 어수선했다. 리한은 아침부터 왜 저리 사람들이 창백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지 궁금해했고, 또한 불쾌함을 내비쳤다. 아침 정무가 끝날 때 까지 그 불쾌함은 가시지 않았다. 대신들은 정무에 의견을 내놓기는 커녕 리한의 눈치만 살피기 바빴기 때문이다. 덕분에 리한은 정무를 서둘러 마쳤다.

"태자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리산이 문안을 하러 오지 않았다. 제 몸에 병이 나더라도 문안인사는 꼭 해오던 아이가 이제서야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라고 생각한 리한은 리산을 들였다.

안으로 들어온 리산의 얼굴은 창백하니 질렸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리한은 깜짝놀라 리산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라도 있는게야?"

".... 귀비께서.."

"..? 귀비가 무얼.."

무언가 쎄한 공기가 리한을 감쌌다. 점점 무거워지는 공기는 리한의 숨을 쉬기 힘들게 만들었고 심장을 가쁘게 만들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고..."

리산이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리산의 어깨를 잡았던 리한의 손에 힘이 쭉 풀려 스르륵 내려갔다. 그러고보니 오늘 궁안의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왜 그런가 했더니 비오리가 죽어서 그랬던 것이다.

부여잡은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다.

이상하다. 비오리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카나산과 리산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도대체 뭘까,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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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2-23 12:42 | 조회 : 3,909 목록
작가의 말
류화령

열린결말.... 이상하게 끝나서 죄송합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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