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2)

리한은 후계자로 내정되기 이전부터 거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선황의 황후에게서 태어난 직계이자 유일한 사내아이로, 날때부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세상 모든것이 그의 손아귀안에서 움직였다. 리한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리한을 흠모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고, 타고난 두뇌와 외모는 그런 리한의 자신감을 더욱 돋구어 주었다.

선황이 돌아가신 후, 리한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얼마지나지 않아 라인국에서 화친의 조약이라는 이유로 리한에게 왕자를 바쳤다. 처음보는 순간부터 리한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내놈이라면서 후궁으로 바쳐진 것에 대해 수치심도 없는 것인지, 첫날밤에도 순순히 리한에게 안기고 낯뜨거운 신음소리까지 냈다. 남자와 자보면 어떤 느낌일까, 라는 호기심에 그를 품에 안았던 리한은 손쉽게 다리를 벌리는 비오리가 창부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첫날밤이라고는 하나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는 것이 익숙해보이기 까지 해 리한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첫날밤을 지내고 나서, 리한은 의도치않게 황궁안에서 비오리를 종종 보게되었다. 우연히 보게 된 비오리는 자신을 모시는 시녀들과 함께 산책을 즐기면서 행복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리한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귀신이라도 본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곧바로 웃음을 거두어버렸다.

리한은 비오리가 마음에 들지 안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비오리에게 반황족 세력이 접근하였다. 그들에게 어떤 소리를 들은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반황족 세력의 입김이 닿자 리한을 바라보는 비오리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리한은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비오리는 눈에띄게 리한의 곁에 있고싶어 하였다. 그리고 곁에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랑받고싶다는 눈으로 리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눈빛에 익숙한 리한은 그제서야 무언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때때로 리한은 발정난 똥개마냥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비오리를 바라보며 대신들의 상소도 있고 하니 비오리와 하룻밤을 다시 지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럴 때 마다 비오리의 곁에 있는 반황족 세력의 녀석들이 너무 거슬렸다. 그들이라면 무슨 짓을 써서라도 비오리가 회임을 하게 만들것이며, 사내가 아니라면 바꿔치기를 해서라도 적자를 만들어 비오리를 황후의 자리에 올려놓으리라.

결국 리한은 고개를 내저으며 비오리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려고 하였다.


"힘든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황제가 되기 전에 정벌한 테나국의 공주였다. 빼어난 외모를 지녀 곁에서 차나 따르게 시키려고 데려왔으나, 그녀는 리한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똑똑했고, 감히 황제인 리한에게 충고를 할 줄 아는 여자였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대우에 리한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결코 나쁘지는 않았다. 리한은 때때로 그녀와 국정에 대한 내용을 논하기도 했으며, 결론을 내지 못할 학문과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새기도 했다.

리한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건 그녀역시 마찬가지 였다. 리한은 그녀와 앞으로의 생을 약속했고, 곧 그녀를 황후의 자리에 앉혔다. 황족들만이 입을 수 있는 화려한 황색이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황후는 자리에 오르고서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내명부를 다스리는데 온 힘을 쏟아부어 황실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때때로 황제에게 간언을 하기도 했으며, 리한은 그런 황후를 총애했다.


"감축드리옵니다. 용종을 잉태하셨나이다."


황후가 회임을 하였다. 아마 이 때가 리한이 기억하는 가장 기쁜 날이었다. 리한은 황후가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황후가 회임을 하고 나서도 리한은 종종 그녀를 찾아가 점점 부풀어오르는 황후의 배를 쓰다듬으며 행복에 젖어있었다. 가끔씩 힘차게 발길질을 해대는 아이를 보아 모두들 황태자가 태어날 것이라고 한입으로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어느 새 황후가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배가 부풀어 올랐다. 리한은 그런 황후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곁에 머물고자 이미 수십개나 지어놓은 이름을 다시 지어야 할 것 같다는 우습기도 짝이없는 핑계를 둘러대고 있었다.

드디어 황후가 출산을 하는 날, 리한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아이를 안고 행복에 젖은 얼굴로 웃고 있어야 할 황후가 미소는 커녕 혈색조차 띄지 못하고 있었다.


".... 우리만 남게 되었구나, 리산."


황후 카나산과 리한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리산은 푸른 눈을 반짝거리며 리한을 향해 손을 뻗고 빵긋 웃어보였다. 하지만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신들은 리한에게 어서 황족들을 더 생산하여야 된다며 추궁했다. 황후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럴 수 없다는 말은 3년이 지나고 나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비오리 외에는 어떠한 후궁도 들이지 않은 리한은 결국 비오리와 합방을 치루게 되었다. 방에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침상위에 고상하게 앉아있는 비오리였다. 그는 떨리는 시선으로 감히 리한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리한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귀비."


사랑하는 이가 죽었는데, 다른 사람을 품에 안는다니. 리한은 카나산에게 드는 죄악감에 비오리를 어떻게 안았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비오리의 몸이 많이 굳어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지만 별로 신경쓸 일이 아니었다.

그 뒤로, 리한은 비오리와 몇번의 합방을 치뤘고, 1년이 지나자 비오리가 회임하였다. 이제 비오리가 회임을 하게 되었으니 리한은 더 이상 비오리를 찾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제 리산을 제외하고도 다른 황족이 생기게 되어 나라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며 기쁜듯이 말했다. 하지만 리한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산을 지켜주세요."


리산을 출산하기 전 카나산이 했던 말이었다. 비오리가 아이를 낳으면 반황족 세력은 어떻게든 비오리의 아이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리산을 암살할 것 이었다. 그렇게 되면 카나산과의 약조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 리한은 초조했다.

드디어 비오리가 출산을 하던 날, 리한은 그를 찾아갔다. 제 어미의 품에서 잘게 숨을 고르고 있는 아이는 계집아이였다. 아이를 낳느라 힘을 많이 쓴 까닭에 지친 비오리가 초췌해진 얼굴로 저를 찾아온 리한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리한은 비오리가 계집아이를 낳았다는 것에 내심 안도를 하며 수고했다는 짧은 한마디만을 남기고 궁을 나왔다.


"... 아바마마, 리진을 보러가도 되나요?"

"리.. 진..?"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비오리가 아이의 이름을 리진으로 지었단 얘기를 들어본 것 같았다.

리한은 잔뜩 기대에 부푼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산을 보았다. 서출이라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리진은 본궁으로의 출입을 금지시켰으니, 리산이 리진을 보러 궁을 나가야만 했다.

비오리가 리진을 지극히 아끼어 그도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본궁을 나가 내내 리진과 함께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 리한은 리산을 보내지 않았다. 비록 비오리의 곁에서 반황족 세력이 조금 떨어져 나갔다고는 하나, 여전히 반황족 세력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리산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무를 마친 리한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황족을 더욱 생산해 내셔야 합니다 - 라고 한목소리로 목청껏 울려대는 말에 리한은 이제 질릴 지경이었다. 리진이 태어나고 6년이 지났다. 리한은 그간 비오리와 합방을 치루지 않았으나, 술이 조금 들어간 리한은 충동적으로 비오리를 찾아갔다. 서책을 읽고 있던 비오리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리한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 폐하..?"


리한은 곧장 비오리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침상위로 쓰러졌다. 리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밑에 깔려버린 비오리가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리한을 바라보았다. 그에 리한은 화가 났다. 왜 화가 나는건지 리한은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거의 강제적인 정사가 치루어지고, 리한은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내관에게 말했다.


"피임약을 준비해라."


시꺼멓게 꿀렁거리는 약이 비오리의 방에 들어왔고, 리한은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이후에도 리한은 종종 비오리를 찾았다. 그 때는 업무에 지쳐 피로할 때도 있었고, 어서 황족을 생산하라고 노래를 불러대는 대신들에 골이 아파 찾을 때도 있었고, 그도 아니면 카나산이 생각나 울적해 술을 들이키고 충동적으로 찾을 때도 있었다.

점점 비오리는 리한에게서 멀어졌고, 그러다가 도망가기를 마음먹은 것인지 황궁 어디에서도 비오리와 리진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리한은 얼른 비오리를 찾아오라고 명령했고, 비오리는 국경근처에서 리진과 함께 발견되어 황궁으로 끌려왔다.

그 날, 리한은 비오리를 찾았다. 이제 더 이상 리한에게서 사랑을 갈구하던 눈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비오리는 몇 번이나 리진과 함께 황궁에서 도망쳤고, 리한은 그런 비오리를 찾기 위해 사람을 풀었고, 그렇게 되면 비오리는 리진과 함께 감옥에라도 끌려가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황궁으로 끌려들어오기 마련이었다.

그런 일이 몇번이나 반복되다, 어느 새 리진이 열두살이 되던 해였다. 대신들과 국정을 돌보던 도중, 신하 한명이 리한에게 아뢰었다.


"리진공녀께서 폐하를 닮아 영특하다는 이야기가 있어 소신이 직접 공녀를 만나 담화를 나누었사온데, 결코 열두살의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대신의 말에 리한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확실히 리진이 뛰어난 것은 황궁에도 널리 퍼져있는 사실이었다. 리한은 리진을 불러 직접 대면하였다. 리진이 리산의 열두번 째 탄신제에 온 후로 두번째로 본궁으로 들어온 날이었다. 제 어미인 비오리와 같은 회색 눈동자가 리한의 푸르른 눈과 마주쳤다. 어째서인지 그를 추궁하는 듯한 눈이었다. 리한은 그 눈이 보기 싫다고 생각했고, 마침 대신의 말도 있었으니 리진의 학문을 명목으로 비다국으로 보내버렸다.

그러자 리한이 찾아가야만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비오리가 눈물을 폭포처럼 쏟아내며 리한을 찾아와 다리에 매달려 엉엉 울며 리진을 자신과 떨어뜨리지 말아달라고 빌었다. 리한뿐만 아니라 리산도 있는데 이게 무슨 망측한 일인가 싶어 리한은 비오리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나가버렸다.


"... 아바마마, 귀비께서 저리 간청하시는데 리진의 유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심이 어떠합니까?"

"리산. 너는 장차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될 사람이다.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서는 안돼."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였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니. 그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황족을 생산해 나라의 기반을 다지지 못했고, 저를 두려워하는 비오리를 억지로 취해 더 이상 회임을 하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버렸고, 자식을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어미에게서 억지로 자식을 떠나보내는 리한이 아니었던가. 리한은 속으로 그런 자신을 비웃었다.

리진이 떠난 이후, 리한은 비오리를 찾았다. 매정하게 딸을 떠나버리게 했던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두 눈이 퀭한 상태로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는 비오리의 모습에 저절로 혀가 쯧 하고 차였다. 처음 비오리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적어도 그 땐 자존심은 없다고 생각했을지언정 이렇게 초라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 리진이 보고싶어.."

"리산을 지켜주세요."


카나산이 보였다. 리한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정원. 언제 관리를 받았는지 엉망으로 보이는 정원에 카나산이 홀로 앉아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리한은 깜짝놀라 카나산에게 달려갔다. 카나산이 리한쪽으로 쓰러지자 리한이 재빨리 그녀의 몸을 받쳤다. 품에 들어온 카나산이 리한을 올려다 보았다.


"... 왜 그러셨어요."

"..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

"폐하."

"당신이 싫어요."


품에 안겨있던 카나산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 자리엔 비오리가 있었다. 잔뜩 원망스러운 눈으로 리한을 쳐다보던 비오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미워요. 당신을 저주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리한은 숨을 크게 내쉬고는 땀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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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2-17 02:06 | 조회 : 3,485 목록
작가의 말
류화령

오랜만입니다!!! 그나저나 폭스툰 참 많이 바꼈네요... 글 올리려니까 사진? 을 안올리면 못올리게 해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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