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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를 타고 30분이 조금 넘게 걸려 도착한 하이드나 공작의 저택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범위를 대신 나타내기라도 하는 듯, 정말 거대하고 웅장했다. 도대체 집에만 얼마를 처발라야 이 지경이 되는 걸까 진지하게 가늠해보며 경비병에게 초대장을 보여주고 안내받은 곳, 지옥이 시작되는 곳, 화장품 냄새에 머리가 아픈 곳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대충 훑어보니 테라스가 꽤 많은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르페는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따님, 즉, 여자의 생일을 위해 열린 파티라서인지 정말 다행히도 여자보다는 남자가 훨씬 많았다. 아마 이 자리에서 잘 보였다가 신랑감으로 뽑힐 계획이겠지. 참 힘들게도 산다, 그들이 모르게 안타까움을 표하며 빈 테이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런데 왠지 여러 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르페는 귀족도 아닌 하찮은 용병 나부랭이가 와서 언짢은가보다,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째 간간이 살기도 섞여있는 것이 영 아니다 싶어서, 그제야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예상대로 자신을 힐끗거리며 노려보는 남자들이 대다수였고, 공작 따님의 지인으로 참석한 여자들도 힐끗거리고 있었다. 그에 상당히 불편함을 느끼며 이대로 테라스로 직행해버릴까, 고민하다가 생각할 가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려서 그대로 시행하려는데, 마침 예의 그 따님께서 공작과 함께 등장하셨다.


“아, 흠흠. 안녕하십니까?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은 저, 바알 드 하이드나의 자랑스러운 딸, 라헬 드 하이드나가 태어난 지 19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모쪼록 이 파티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하르페는 왠지 그의 시선이 잠시 자신을 향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진짜 이 사람들이 단체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속으로 절규하며 테라스가 아니라 아예 길드로 돌아가 버릴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늘따라 고민을 정말 많이 하는데 나 이러다가 정신연령이 호호백발 할아버지 되는 거 아냐? 헛생각을 하고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타이밍을 어림하기 시작했다. 마침 라헬도 지인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느라 아직 하르페를 발견하지 못한 터라 도망간다면 지금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곳까지 와서 차마 오자마자 다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에 동물원의 원숭이 신세로 전락한 하르페가 하릴없이 허공이나 쳐다보며 멍하니 있을 때, 그에게 라헬이 다가왔다. 하르페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려 얼굴을 확인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서 처음 뵙겠습니다, 하이드나 공작 영애님. 저는 하르페 라인하르트라고 합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소문대로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후후후... 초대에 응해주신 것 정말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름답다니 이게 갑자기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지.. 그새 거울을 보셨나? 그건 아닌데. 서, 설마하니... 나요? 남자인 내가 아름답다고? 오, 신이시여. 부디 제 시력을 뺏어서라도 이 영애에게 제대로 된 시력을 하사하소서. 혼돈의 카오스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하며 하르페는 굳어가는 얼굴을 막아내고 아주 자연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아니요, 이런 호화스런 자리에 초대받게 된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래, 일단 아름답다는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자. 그건 나한테 한 말이 아니야. 암, 그렇고말고. 자기세뇌를 반복하던 하르페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따로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라헬의 말에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당장이라도 가녀린 두 손을 붙들고 당연히 가야죠. 당장 갑시다! 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주 침착하고 조신하게 내숭을 떨며 좋습니다, 간결하게 네 글자를 말했다. 도대체 이 상당히 비뚤어지고 깐죽거리는 성격을 어찌해야 쓸까 진지하게 고민하며 라헬의 뒤를 조용히 따르던 하르페는 한순간 강하게 밀려오는 살기에 흠칫했지만, 파티장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으며 차단했다. 이제 난 살았어, 난 자유다! 얼굴이 잔뜩 풀어져 은은한 미소가 아니라 아주 싱글벙글하는 하르페의 얼굴을 흐뭇하게 올려다보던 라헬은 파티장 뒤쪽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라헬의 하나뿐인 오라버니 라위스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걸 모르고 있던 하르페는 그저 많은 사람들로부터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행복감에 심각하게 싱글벙글한 상태일 뿐이었다. 자신의 깐죽거리는 성격 따위는 이미 뒷전이었다.
그런 하르페의 얼굴에서 행복한 오오라가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약 0.01초였다. 라헬이 하르페를 끌고 간 정원 중앙의 분수대 근처 의자에 앉아있던 라위스를 발견하자마자 다시 고뇌는 시작되었다.
분명 어제 굉장히 재수 없게 하고 나왔던 것 같은데. 어떻게 했더라? 아주 재수 없게 방긋방긋 웃으며 나 남자니까 건들지 마라, 하는 동시에 귀하신 분의 순정을 깨버렸으니, 하르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5개뿐이었다.

1. 죽는다.
2. 뒤진다.
3. 스스로 관에 들어간다.
▲ 선택하시겠습니까? [YES]/NO
4. 고문을 당하다가 죽는다.
5. 산소를 배척한다.

음... 4번이 가장 고통스러울 것 같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하르페에게 어느새 라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제의 무례에 대해서는 정말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마 그쯤에서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면 일이 더 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르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일단 몇 대는 맞을 각오를 단단하고 굳건하게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라위스의 입에서는 정말 예상치도 못한 말이 튀어나와 하르페의 고막에서 맴돌았다.


“제논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는가?”


아니 이것 보게? 어제 타의에 의해 여장을 하고 있었을 때에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챙겨 하더니 이제 남자라는 걸 알았으니 정중히 대할 가치가 없다는 거야 지금? 기분이 무척 나빴지만 익숙한 이름에 잠시 고민했다. 제논.. 제논.. 아, 생각났다.
허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과거에 겪었던 끔찍한 사고의 원흉인 그 녀석. 하르페는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살았던 자신에게 질려하며 그 화제를 입에 올린 라위스를 경계했다. 그 사건으로 잠시간 떠들썩했지만 사건의 피해자였던 당시의 어린아이들이 입을 다묾으로서 정보는 단 하나도 유출된 것이 없었고, 그냥 암암리에 묻혀온 사건이다. 그 후로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하르페는 초인의 인내를 발휘하여 끝까지 존댓말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말이지. 어떻게 고작 빈민가 고아 출신이었던 꼬맹이들이 출세했는가. 나로썬 무척이나 구미가 당기는 주제거리야.”


이거, 상당히 질이 나쁘다. 하르페는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해서 뒤돌아 성큼성큼 걸었다. 자식 중 한 쪽이 바르게 크면 다른 한 쪽은 망나니라더니 딱 그 짝이군. 저 녀석은 결혼하기 틀렸어, 따위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는 귀족과 엮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혹시 무슨 꼼수를 쓴 건 아닐까. 가령, 몸을 팔았다든지.”


하르페는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우뚝 선 채로 고개만 돌려 라위스를 노려봤다. 하르페에게서 뿜어져 나온 살기는 상당했지만, 라위스에게는 다섯 명의 호위가 항상 모습을 감춘 채 그의 주위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긴장하게 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농이 지나치시군요. 아무리 공작가의 자제라고 해도 넘어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큭큭.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이것 참, 어디 무서워서 말을 하겠나?”

“쓸데없는 가설이라면 속으로만 해주십쇼.”

“하하하! 역시 자네는 달라. 정말 흥미로워... 뭐, 어쨌든 당분간은 몸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무섭기는 개뿔이. 잘도 나불대는구만.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투덜거리던 하르페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마나를 발에 집중시켜 하이퍼소닉스텝으로 순식간에 저택 밖으로 빠져나왔다.
─부디 다시는 자네를 볼 일이 없길 바라네.
마지막으로 그가 덧붙인 말이었다. 분명 겉으로는 어제 하르페가 했던 말과 똑같았지만 그가 한 말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버릴 것이라는 살벌한 의미가 내포되어있었다.
그곳에서 빠져나왔다는 것만으로 몸이 가벼워져 느긋하게 걸으며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하르페는 채 2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동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정리를 시작했다.
자신의 여동생의 생일을 명분으로 라위스가 하르페를 초대했고, 그는 하르페에게 6년 전 사건의 원흉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걸 하르페에게 물었다는 시점에서 이미 하르페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도대체 그걸 그 자식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 사건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귀족 가문은 순식간에 몰락하여 다른 제국으로 넘어가서 죽은 듯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 그걸 일부러 수고스럽게 온 대륙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조사하지 않는 이상 하르페가 연루되어있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아니면 그 사건의 또 다른 생존자가 주변에 있다던가.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하르페는 흠칫거리며 굳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낯선 땅에 당도하여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만 했고, 그러다가 루미엘 용병 길드 3대 단장에게 주워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6년을 살았다. 그때까지 자신 이외에 다른 생존자에는 관심도 없었다. 솔직히 자기 먹고 살기에도 벅찼다. 그 무관심에 대한 대가가 이딴 거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하르페는 절망하며 터덜터덜 길드로 돌아갔다.



“단.. 어라? 부단장? 단장은요?”


몰라, 알 게 뭐야 그 자식! 하르페로부터 넘겨받은 서류를 모조리 처리하고 수척한 모습으로 책상에 쓰러져있던 레인이 몸을 일으키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아까 그렇게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더니 결국 간 건가?! 이건 너무나도 서프라이즈한 대혁명이야! 단장의 뇌에 혁명이 일어났어! 물론 속으로만 감격하던 제로는 얼마 안 가 파티장 구석이나 테라스에 가서 혼자 짱 박혀 있을 단장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럼 일 보십쇼. 전 이만 나가겠...”

“제로.”


예, 짧게 대답한 제로는 의문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레인을 쳐다봤다. 레인이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가령, 하르페의 뒷담을 깔 때, 단장의 뒷담을 깔 때, 마스터의 뒷담을 깔 때. 어라, 셋 다 동일인물인데. 단장과 부단장의 사이가 매우 좋지 못하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깨닫고 보니 너무 심각해서 조금씩 걱정이 되는 제로였다.


“우리 길드에 커플 되게 많아. 걔들은 안 건드리거든. 어제 그 자식이 왜 너를 건드린 줄 알아?”

“호, 혹시.. 절 싫어하시..는? 크흡...”


그동안 완전 열심히 따르고 존경해 마지않던 사람이 자신을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제로는 너무 슬퍼했다. 한순간에 축 처지는 제로의 모습을 보던 레인은 혀를 차며 저건 도대체 언제쯤에야 진지한 사고가 가능할까를 걱정했다. 사실 정말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앞으로 이들에게 시달릴 본인의 운명이었지만, 그런 걸 알 턱이 없는 레인은 친절하게 걱정하며 설명까지 몸소 해줬다.


“그 반대다. 널 아껴서 그래. 다른 녀석들도 아끼지만 그 중에 유달리 널 더.”

“저, 저를요?”

“그래. 네가 너의 소중한 사람들로 인해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야.”


어머어머, 나 완전 감동이야. 단장님께서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다니, 훌쩍. 레인은 환하게 피어오른 제로를 보며 작게 한숨 섞인 중얼거림을 덧붙였다.


“그 녀석에게 잃을 것은 이제 얼마 남아있지 않거든...”


제로는 못 들었는지 여전히 감격에 복받쳐 자신의 주변 공기를 천국으로 개척해내고 있었다.
잠시나마 설명충이 되어 간단하게 설명을 한 레인은 한껏 침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하늘이 어두운 걸 보니 곧 비가 잔뜩 내릴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인이 생각하기가 무섭게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더니 곧 줄기차게 내리 퍼붓기 시작했다. 뭐, 그 녀석은 극초음속으로 뛰어다니는 녀석이니 적어도 비에 쫄딱 젖어서 오는 일은 없겠군.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일랑 집어치웠다.
흠칫. 갑자기 도는 한기에 고개를 홱 돌려 어느새 제로가 나가고 열려있는 문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안심하고 문을 제대로 닫고 가지 않은 제로에게 언젠가 잔소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뒤로 돌리자 바로 코앞에 우뚝 서 있는 수상쩍은 사람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검을 소환했다.


“정체가 뭐냐.”


상대방은 대답이 없었다.
바로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고 저절로 식은땀이 났다. 레인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을 내려놓지 않은 것은 검사로써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레인은 검사가 검을 들었으면 종이라도 잘라야 하는 것이라고 무척이나 따르고 존경했던 3대 단장 라울에게 전수받았었다. 살기로 인한 서늘한 공기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레인은 앞의 침입자가 손을 조금 움직이자마자 즉각 반응하여 검을 그의 목에 들이댔다.


“정체를 밝히라고 했다.”

“..페...”


뭐? 반문했던 레인은 침입자의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고개를 조금 가까이 했다. 그리고 본 것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자신보다 더 큰 키를 소유한 거대한 사내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봐요, 울고 싶은 건 난데요? 그 어이없는 모습에 당황하여 꼼짝도 못하고 굳어있을 때 사내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소리라는 것이 흘러나왔다.


“하..르페...”


진짜 듣기 좋은 목소리다. 사내가 말한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뒷전이고, 같은 남자로써 정말 부럽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얼굴도 심상치 않은 것이, 여자 깨나 울렸을 거라고 생각하며 감탄에 감탄을 더했다.
어어, 가만 보자. 누구랑 닮은 것도 같은데..? 레인이 자신이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비교해보고 있을 때 사내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레인 등 뒤의 문을 응시했다. 레인은 그것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눈앞의 사내를 경계하며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하르페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 레인은 그제야 사내가 말한 단어를 떠올렸다. 하르페에게 볼일이 있는 것이리라. 상황으로 봤을 때 사내가 딱히 하르페에게 해를 가할 것 같지 않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순순히 몸을 옆으로 비켜 문을 보이게 했다. 사내의 목에 겨눈 검은 거두지 않았다.


“나 왔어.”


온몸이 비에 쫄딱 젖어 빗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오던 하르페가 멈칫했다. 레인은 설명하기 위해 검을 거두고 옆의 사내를 가리키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사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엄머, 내가 꿈을 꿨나? ‘황당함’이라고 얼굴에 크게 쓰여 있는 레인은 뒷전으로 한 채 하르페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냅다 허공에 대고 멱살을 잡았다. 물론 허공으로 보인 것은 레인의 시선이었다. 사내는 하르페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클로킹으로 재빨리 자신을 투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과 태생부터가 달랐던 하르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사실 하르페는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낯선 기운과 냄새에 동공의 형태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곧 사내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레인은 당황하여 상황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레인.”


고작 이름을 불린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 하르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레인은 잠시 둘을 번갈아가며 응시하다가 문을 닫고 단장실에서 나갔다. 그걸 확인하기가 무섭게 하르페의 시선이 다시 사내를 노려봤다.


“보고 싶었다.”

“난 전혀 반갑지 않은데. 이제 봤으니 나가주지 않겠어?”


내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 무진장 거슬려서 그냥 죽여 버리고 싶어지거든. 하르페가 노기 띤 눈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당장 달려들 기세로 노려봤다.


“날 기억해줘서 너무 기뻐. 내 이름도 기억해?”


차라리 모르는 척 할걸. 속으로 뼈저리게 후회하며,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여기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 뻔한 붉은 머리칼의 사내에게서 눈을 돌렸다.


“잊으라고 해도 절대 잊지 않을 테니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제논.”

“싫은데.”


하? 어이가 가출하셔서 따지고 들려던 하르페는 텔레포트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제논의 행동에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하르페의 경고를 듣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연히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기분이 나빠진 하르페는 괜히 혼자 툴툴대며 제논을 열심히 씹어댔다. 쫓겨나는 주제에 뭐가 그리 기쁘다고 실실 웃고 앉았어.


“아앗, 난 멍청인가!”


그 녀석이랑 하이드나 공작의 그 재수 없는 아들내미랑 무슨 관계인지 물어봤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감정에 휩쓸리다니, 젠장. 미간을 찌푸린 채 제논이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던 하르페는 똑똑, 제로의 정중한 노크 소리에 표정을 풀었다.


“들어와.”


문을 닫고 하르페에게로 머뭇머뭇 다가가는 제로의 손에는 편지 한 장이 들려있었다. 제로는 망설인다는 것을 아주 대놓고 티내다가 한숨을 쉬며 하르페에게 편지를 건넸다.
이게 도대체 뭐라고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망설이는 걸까, 궁금했던 하르페는 제로를 힐끗 쳐다보다가 시선을 편지로 돌렸다. 그리고 제로는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는 하르페를 보며 역시 전해주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땅을 치며 후회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너무나도 끈질겨서 엿 같은 단장께.

혹시나 해서 미리 말씀드리지만 여기서 말하는 엿은 절대로 욕이 아닙니다.
절대로 욕이 아니라 먹는 엿입니다. 네, 그것처럼 끈질기시다구요.
그러니 빨리 제게 단장 자리를 물려주십쇼.
아니, 본론은 이게 아니라, 정말 뜬금없지만 당분간 마이 스위트 러블리 홈에서 쉬겠습니다.
단장도 양심이 있다면 아시겠지만, 아까 맡기고 간 서류들 2시간 만에 처리를 끝내느라 정말 제 생명도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도대체 기한이 내일까지인 서류를 쌓아뒀다 뭐에 써먹으려고 그랬습니까? 설마 그거 묵혔다가 드시게요? 그건 건강에 해롭다고 분명 누누이 말씀드렸을 텐데요.
뭐 어쨌든, 그런 이유로 약 93퍼센트를 소비한 생명 게이지를 다시 채우기 위해 잠시나마 휴식을 갖고자 합니다.
그러니 한 2주 동안은 제가 죽었다고 생각해주십쇼. 그럼 이만.

p.s 죽었다 생각하랬다고 장례식을 치르면 그 날은 단장의 제삿날이 될 겁니다.

루미엘 부단장 레인 아카브레아 올림.]


“아주 싱글벙글이었겠네, 그 녀석.”


헉, 그건 또 어찌 아셨답니까. 단장님 사이코메트리도 쓸 줄 아세요?! 제로의 놀란 얼굴은 고맙게도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정직하게 그대로 드러내줬다. 그래, 날 엿 같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후후후...”


흠칫.


“다.. 단장?”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하르페의 음흉한 웃음소리에 제로는 당황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확 그냥 이대로 토껴버려?! 그러나 아까 레인에게 들은 내용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라 감히 의리를 지고 가버릴 수가 없었다. 겉만 보면 참으로 멀쩡한데 말이야.
가만 생각해 보니 제로가 처음 이 길드에 들어왔을 때의 하르페는 아주 멀쩡했고 성격도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걸어 다니는 얼음 조각상이라고 불리던 하르페가 이렇게까지 칠푼이가 된 원인에 우리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요즘 들어 더욱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하르페를 떠올리며 제로는 동정의 눈길을 하르페에게 보냈다. 물론 양심 따위 엿으로 바꿔먹어서 배설물로 흘려보낸 지 오래인 하르페는 레인을 어떻게 굴려먹어야 잘 굴려먹었다고 소문이 날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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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7-04 22:20 | 조회 : 491 목록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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