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따사롭고 행복한

"한진욱."

서원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진욱의 귀에는 똑똑히 박혀 들어왔다.

깨끗한 분위기가 한껏 묻어나는 목소리로 불린 자신의 이름은,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이 느껴지게 해주었다.

"잊지 않겠습니다."

눈꼬리를 접으며 웃는 모양새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진욱이 이내 마주 웃어보였다.

"예."

하지만 그 꿈만 같던 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버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서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제 뒤로 보내며 자신을 향하는 목소리의 주인을 자신은 알고 있었다.

이 참판 댁 아들.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는 모르겠으나, 제게 말씀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어차피 혼인을 올릴 것, 이제 곧 한 몸이 될 터인..윽! 아프지 않소."

당당하게 제 한 몸이 될 것이라 이야기하던 사내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모습이 보였다.

적당히 발갛게 달아오른 예쁜 얼굴이 살포시 찡그려저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사실이 아니더냐. 얼마 안 되 혼인을 올리면 우리가 한몸..."

"쉿! 그 입 좀! 조심하십시오. 남사스러워서 참. 아직 올리지도 않은 혼례를 가지고."

저들 나름대로는 목소리를 한껏 줄이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진욱의 귀에 들리지 않을리가 없었다.

"뭐? 그러면 나와 혼례를 올리지 않겠다는 것이냐?"

"목소리 좀 낮추십시오! 확 정말 도망가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누구와? 설마 저 자는 아니겠지?"

"누구든요! 한 번만 더 그러시면 정말 도망가겠습니다. 그러니 헛소리 그만 하시고 조용히 좀 하십시오!"

서원이 그리 말하며 제 나름대로 매서운 표정을 지어보자 그제야 사내의 입이 다물렸다.

눈빛으로는 사납게 자신을 경계하고, 애 마냥 입술을 삐죽대기는 했지만 서원이 말한대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소란스럽게하여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즐거웠습니다. 감사하기도 하고요."

진욱의 대답에 또 사내가 무어라 하려는 것은 서원이 미리 팔을 툭하고 쳐서 막았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늘은 이만 가보는 것이 좋을 듯 싶군요. 그럼 즐겁게 즐기다가 가십시오."

'다음에 또 만납시다.'

진심은 사내의 흉흉한 눈빛에 잠시 접어두었다.

진욱이 예의를 차리며 허리를 숙이자 서원 역시 마주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내만큼은 빳빳하게 서 있었다.

서원이 다시 눈치를 줬지만 꼼짝하지 않아 작게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곱디 고운 사람을 이리 두고가려니 마음이야 무거웠지만, 제가 지나가자 또 티격태격하며 알콩달콩한 싸움을 하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걸을 수 있었다.

저를 빛으로 이끌어준 여인의 옆에 있는 사내는, 그 여인처럼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럼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평소와 다르게 약간의 미소가 걸려있는 얼굴로 여울이 배웅했다.

그런 여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한울과 연지는 손을 꼬옥 붙잡고 집을 나섰다.

앞으로 같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하고 처음 하는 데이트였다.

어딜가고 싶냐는 물음에 놀이공원이라고 신나게 대답하는 연지에 한울은 그저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어디가?"

잔뜩 들떠서 밖으로 나가자 하품을하며 잔디와 식물들에 물을 주던 진욱이 손을 흔들었다.

"데이트하러 간다."

한울이 잡은 두 손을 흔들면서 대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아직도 저러는지...

"어디가는데?"

"놀이공원!"

"여튼 옛날부터 안그런 거 같으면서 노는 거 엄처 좋아한다니까."

진욱이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호스를 들어서 연지와 한울에게 향하게 했었다.

차가운 물이 살짝 튀기자 둘 모두 깜짝놀라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린 진욱이 재밌게 놀다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데이트 코스의 정석이라고 불리는 놀이공원에 도착하자 연지는 한껏 들떠있었다.

"그렇게 좋아?"

"그럼요! 엄청 오랜만에 오는건데!"

눈을 반짝이는 연지를 한울은 마냥 귀엽다는 듯이 보고 웃었다.

데이트니까 알콩달콩해보고 싶었던 한울은 부끄럽다는 연지를 데리고 머리띠를 파는 곳으로 끌고갔다.

"으아... 이런 거 쓰고 다니기 부끄러운데..."

"잘 어울리는데 왜. 데이트 하고 싶다면서~"

이것 저것 연지의 머리에 씌워보다가 토끼 머리띠로 결정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초롱초롱한 눈에, 겁도 많고, 하얗고 딱 토끼가 어울렸다.

너무 귀여워서 앙 하고 살짝 볼을 물어더니 파드득 놀라서는 주위를 살펴보는 연지였다.

그러다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고는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알바생을 보자 연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원래 놀이동산 오고 그러면 그러는거 아니야?"

"그런 게 어딨어요.... 다른 사람도 보잖아요."

"나는 안 보여."

어느새 능글거리는 모습으로 돌아온 한울이 싱긋 웃어보였다.

"나도 골라줘. 같이 하자."

금새 화제를 돌려보이는 모습이 얄밉기는 했지만, 또 이것저것 살펴보는 옆 모습이 너무 멋져서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종이만큼 하얀 피부에 그와 반대되는 진한 검은 머리 빨간 입술은 백설공주 같기도 했다.

호리호리하지만 꽤나 다부진 몸 때문에 오늘 입은 캐주얼한 옷도 멋지게 잘 소화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여자들이 흘끗흘끗 쳐다볼 정도로 멋진 남자가 제 남자라서.

언제 어떤 모습으로 만나도 좋을 남자라서.

행복함에 절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저는 이거요!"

잔뜩 신이 나서는 한울에게 빨간 머리띠를 씌워줬다.

백설공주에게 딱 어울리는 빨간 머리띠였다.

"이거?"

한울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오빠는 백설공주 닮았으니까!"

"내가?"

"네!"

"그래?"

다른 커플이라면 그 말에 부끄러워 하며 뺐을지도 몰랐지만 한울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좀 예쁘긴 하지?'라며 웃고는 계산대로 바로 향했다.

그리고서는 바로 연지에게 머리띠를 씌워줬다.

"예쁘다. 진짜 토끼같네. 이제 나도 씌워줘."

코 앞에 얼굴을 두고 자신을 향해 눈을 반짝이는 한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무 부끄러워 하는 거 아니야? 사귀는 사이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던 연지가 리본이 달린 머리띠를 한울의 머리에 조심스레 씌워졌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왠만한 여자들보다 훨씬 더 잘어울렸다.

"됐어요."

연지의 말에 쪽-하고 입을 맞춘 한울이 싱긋 웃어보였다.

"고마워."

300살이나 먹어가지고는, 갓 입학한 새내기들을 울린다는 환상속의 선배마냥 웃어보이는 한울에 연지의 심장도 쿵! 소리를 내며 내려 앉았다.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하지만 그 싱그러움은 얼마 가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서 탄산을 들이키고는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연지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괜찮아요?"

"응. 이제 괜찮아."

"아직도 얼굴이 하얀데......"

"나 저승사자잖아. 핏기야 원래 없는데 뭐."

잔뜩 걱정하고 있는 연지에게 한울이 웃어보였지만 아까와 다르게 힘이 없다는 것은 저도 느낄 수 있었다.

놀이공원에 와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몇 번 영혼을 데리러 와 봤던 곳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형태였고, 인간의 몸도 아니었으니 놀이기구라고는 제대로 타보지도 않았다.

신기해서 앉아보기는 했었지만 사람의 몸이 아니니 제대로 무언갈 느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서 즐거워 하는 사람들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처음부터 롤러코스터를 탄 것이 문제였다.

잔뜩 들뜬 연지와 함께 탄 롤러코스터는 한울에게 지옥을 선사해줬었다.

내리자 마자 어지럽고 죽을 것 같았는데 흥이 오른 연지에게는 그런 한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자이로드롭까지 타고나서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눈에는 걱정이 가득 들어있으면서도 연지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기구를 이렇게 못 타는지 몰랐어요."

놀이공원이라면 환장을 하는 연지는 탑승가능 키를 넘기자마자 모든 놀이기구를 휩쓸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도 진욱이네 가족과 함께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해외의 놀이공원까지 정복했던 연지였다.

"못 타는 거 아니거든?!"

그런 연지의 말에 괜시리 한울이 자존심을 세웠다.

뻔히 화장실까지 달려가는 것까지 다 보인 마당에 쓸모없는 발악이긴 했지만.

"못타는 거죠. 저런 거 무서워하나 봐요."

"속이 안 좋아져서 그러는 거지.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야."

한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무서워서 그런거 아닌걸로 할테니까 음료수나 다 드세요."

"어어?! 겁은 제일 많은 애가 지금 나한테 뭐라는 거야?"

"겁은 누가 많다고 그래요. 저는 겁 하나도 없어요."

연지의 말에 한울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주변을 살폈다.

"저 여자 보이지. 핑크색 원피스 입은."

한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긴 웨이브 머리를 가진 여자가 보였다.

"네."

"저거 귀신이야."

"네?!"

"죽은지 얼마 안 된 것 같네. 네가 나랑 처음 만났을 때 만났던 귀신들이 너무 무섭게 생겼었어서 다 그렇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니야. 집같은 데는 내가 손을 써놔서 귀신들이 근처에도 안오겠지만 밖은 달라. 오늘도 몇 번이나 마주쳤는데? 진짜 겁 없으면 한 번 불러볼까? 거기..!!"

장난스레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드는 한울의 모습에 연지가 기겁을 하며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 울상인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안돼요! 진짜 오면 어떻게 해요."

"뽀뽀해주면."

"네?"

"뽀뽀해주면 그만 할게. 여기는 근처에 사람들도 없으니까 괜찮지?"

"무슨 뽀뽀에요."

저번부터 뽀뽀에 한이 맺힌건지 또 뽀뽀타령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거기!"

한울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그 여자를 부르려고 하자 연지가 재빨리 한울의 입에 입을 맞췄다.

너무 짧다고 뭐라고 할까봐 이번에는 꾸욱- 한 번 누르고 나서야 입술을 뗐다.

꼬옥 감았던 눈을 뜨자 해사하게 웃고있는 한울이 보였다.

자신의 몰에 쪽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한울이 싱긋 웃고는 그제서야 다시 얌전히 몸을 벤치에 뉘었다.

연지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는다 싶더니 연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뭐예요......"

"어지러워서 그러지."

"아까는 괜찮다면서요."

"다시 속도 매스꺼운 것 같아."

괜찮다는 말은 어디로 갔는지 천역덕스럽게 말을 뒤집은 한울이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맨날 놀리기만 하고."

퉁명스레 말을 내뱉으며 아프지 않게 한울의 앞머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귀여워서 그렇지. 귀여워서. 물론 그렇게 무시무시한것들을 타고도 좋아하기만 하는 모습도 좋았어. 내가 구해주지 않았어도 저승사자랑 옥황상제랑 싸워서 이기고 살아날 것 같은 점도 귀여웠거든요."

"그게 뭐에요!"

"그래서 좋다는 거지."

슬쩍 눈을 뜨고는 웃어보인 한울이 연지의 배쪽으로 얼굴을 돌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콩콩 뛰는 심장의 느낌에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평화롭고 행복한 따스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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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2-16 21:45 | 조회 : 1,391 목록
작가의 말
브리사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방학이 얼마 안남아서 너무 아쉽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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