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나에겐 빛인 사람

진욱의 집에서 맛있는 저녁까지 배불리 먹은 연지가 행복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다.

진희는 저번에 새로운 반찬을 해준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또 다시 바리바리 먹을 것들을 싸주었다.

갈비찜에 잡채에 후식이라고 한 그릇 가져다준 시원한 냉면까지 거하게 먹고도 잔뜩 손에 쥐어진 다른 먹을거리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청소를 하고 있던 여울이 인사를 건넸다.

"저녁 잘 드시고 오시는 거에요?"

"네."

짐을 받아들고는 여울이 물었다.

"케이크도 있어요. 청소하고 계시는 거에요?"

"위층에 계신 어떤 분 때문에 안 끝나네요."

여울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연지의 앞에서는 마냥 기운 없는 풀죽은 강아지였지만, 제 앞에서는 패악질을 부리기 일쑤였다.

열심히 청소를 해 놨더니 일부러 주스를 흘리지를 않나, 헹구던 빨래에 세제를 더 부어버리지를 않나, 이리저리 반찬투정에 시비를 걸지 않나.

"선배 좀 골리려다가 제가 죽어나가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여울의 모습에 연지가 숨죽여서 웃었다.

"이제 슬슬 그만하려구요."

"더하라고 하고 싶은데 선배님보다 제가 더 힘든 것 같아서 그건 못할 것 같네요."

"죄송해요. 괜히 고생하시고."

"괜찮습니다."

나름 만족스러웠어요.

그 말을 뒷붙이고서 연지와 여울은 다시 한 번 숨을 죽이고 키득거렸다.

"연지님 방에 들어가계셔요. 오신 건 알고 계실겁니다. 괜히 불쌍해보이고 싶으신 것 같기도한데 적당히 맞춰주세요."

여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2층으로 올라온 연지는 조심스레 방 문을 열었다.

"..."

문이 열리자 잔뜩 시무룩해보이는 한울의 뒷모습이 보였다.

웃음이 나올까 입술을 한 번 앙 문 연지는 고민하다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약간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선 가디건을 벗어서 걸어두려고 옷장이 있는 구석으로 향했다.

그 짧은 이동시간 동안에도 멀어지는 발걸음소리에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옷을 걸어두고 타박타박.

조금 얄밉고, 조금 서운하기는 했었지만 제가 사랑하고,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상대에게 다가갔다.

한울의 뒷편에 살포시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한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빠."

부드러운 팔이 제 허리를 감고, 등 뒤로 따스한 온도가 전해지자 한울이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연지의 품 안에서 크게 움직였다가 연지가 다칠까봐 조심스러웠지만, 끌어안을 때에는 온 힘을 다해 제 품에 넣었다.

얼마나 안고 싶고, 얼마나 같이하고 싶었는데.....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나날동안 하고싶은 게 많았는데...

품에 한 가득 끌어안고, 맛있는 것도 나눠먹고, 연인들이 가보는 곳들도 모두 가보고, 입맞추고 끌어 안고 싶었다.

하지만 연지의 냉대 아닌 냉대를 받고 있던 턱에 뭐 하나 제대로 해 볼 수 없던 터였다.

"미안해..."

그렇지만 다 제 생각이 짧고, 제 잘못이었기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그저 관심을 달라는 표현을 온 몸으로 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내가 너를 지켜준다고 했으면서, 혼자 둬서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너랑 더 같이있고, 너랑 더 행복했어야하는 건데."

영원같았던 형벌의 끝을 고하는 포옹에 그제야 용서의 말을 꺼내는 한울이었다.

"알면 됐어요. 앞으로는 그러면 안되는 거 알죠?"

"응. 앞으로는 안그럴게."

"알았어요. 앞으로는 같이 행복하게 지내는거에요. 그게 나 지켜주는 거니까. 알았죠? 약속."

"약속."

한울의 말에 장난스럽게 답한 연지가 쪽 한울의 입에 입을 맞췄다.

"....아쉬워."

"네?'

작은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순진한 얼굴을 한 연지가 물었다.

"아쉽다고."

"뭐...뭐가요!"

아까 다 죽어가던 불쌍한 강아지는 어디로 갔는지 불순함을 가득 담은 눈빛에 바로 그 의미를 알아차린 연지가 볼을 붉혔다.

괜시리 부끄러워져서 도망가려고했지만 한울은 연지의 허리에 감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다시 제 품에 들어온 연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며칠 동안 진짜 힘들었어. 엄청 속상했고. 그런데 너무 가벼운 거 아니야?"

"뭐,뭐가요?"

"그냥 입술 스치는 정도가 끝이야? 너무 아쉽잖아. 오랫만인데."

"뭐...요."

"알잖아. 굳이 말해줘야해? 이런 애기들이 하는 거 말고 어른들이 하는 찐한..."

낯 간지러운 말에 연지가 손으로 한울의 입을 막아버렸다.

"...!!"

잠시 가만히 있는 모습에 이제 좀 잠잠해졌나 했더니 자신과 눈을 맞추고는 말캉한 혀로 천천히 연지의 손을 핥아올랐다.

연지가 부끄러워 바로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를 어떻게 알았는지 얇은 손목을 잡아챈 한울이 손가락 끝까지 천천히 입을 맞추며 올라갔다.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거 뿐인데 부끄러움과 알 수 없는 열기로 몸이 떨렸다.

이제 도망칠 전의를 상실한 연지가 조용히 한울의 품에 가만히 안겼다.

"너무 부끄러워하니까 오늘은 내가 봐줄게. 다음에는 꼭 먼저 해줘야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연지가 볼을 붉힐만한 이야기를 하던 한울이 천천히 연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조시므레 살살 입술을 몇 번이나 물고서는 입 안을 탐닉했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걸 또 일러바치냐?"

음식물쓰레기와 일반쓰레기를 들고 나오면서 한울이 투덜댔다.

다시 달달한 분위기로 돌아갔던 둘이었는데, 여울 때문에 망해버렸다.

사건의 발달은 케이크였다.

진짜 맛있는 케이크를 받아왔다는 연지가 거실로 내려와 행복한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빵 칼을 찾던 연지에게, 이 집에 사는 사람처럼 능숙하게 여울이 빵칼을 내밀었다.

싱긋 웃은 연지가 그런데 밥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들 많이 먹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했고, 여울에게 괜찮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여울이 '밥을 못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왜냐는 물음에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본 것이었다.

이리저리 심통을 부리느라 제대로 밥을 먹을 시간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 꼬맹이 덕분에 연지가 여울이 하고 있던 일들을 죄다 자신에게 맡기면서 화를 냈었다.

저승사자들은 굳이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항상 잘 먹는게 가장 중요하다던 진희의 보살핌 아래에서 자란 연지에게 그런 말이 통할리 만무했다.

"화해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거 알면서."

괜히 툴툴거리며 쓰레기를 내 놓고 몸을 돌렸다.

"저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째 연지가 살다싶이 했던 곳의 주인공인 진욱이였다.

"왜."

한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자신과 연지가 조금 소원해져있는 동안 또 연지와 둘이서 함께 했다는 것이라는 생각에 불쾌하기 짝이없었다.

사실 그런 것으로 치면 진욱 역시 같았지만, 꾹 누르고 부드럽게 답했다.

"할 말이 있어서요."

"뭔데."

"그 원령에 관해서 해결방법을 찾았어요."

진욱의 말에 한울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게 뭔데!"

"제 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거기까지는 신경쓰지 않으셔도되요."

"그저 다른 원령 수준이 아니었어. 방법을 찾는 것도 어려웠고.... 대체 어떻게..."

"제가 다른 인간이나 다른 저승사자보다 더 뛰어난가보죠. 깨비도 계속 도와줬고. 다른 것도 아니고 연지에 관한 겁니다. 연지가 그쪽에게 중여한만큼 저에게 중요하면 더 중요하지 덜하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생각보다 쉬운 일이에요. 확실히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진욱의 말에 살짝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연지를 구할 수 있다는 말에 한울은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고마워."

"됐어요. 감사인사 받으려고 한 건 아닙니다."

"넌..!!"

"연지랑 행복하세요."

발끈하는 한울을 무시하고 진욱이 말했다.

"꼭 행복해지셔야해요."

"너...뭐 다른 큰 일 있는 거 아니야? 불안하게 그게 무슨 소리야."

평소와 다른 느낌에 한울이 느낌이 이상해 물었다.

"곱게 키우는 딸 시집보내는 느낌이 들어서 그럽니다. 둘이 그만 싸우고 행복해져야 저도 행복하게 제 인생 살 수 있지 않나, 그런 말입니다."

한울의 표정에 진욱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비웃으며 대답했다.

"꼬맹이 너 그 웃음 뭐야! 그거!"

"아니, 뭐..... 연지가 화해하러 간다고 들어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고새 뭔 일이 있었는지 이렇게 처량맞게 나와계시는 모습을 보니 걱정되서 그렇죠."

"뭐?!"

"그래서 잘 지내시기나 할런지... 대학 가고 그러면 잘생기고 어린 남자애들도 엄청 많을텐데."

"나도 잘생겼어!"

"어리시진 않잖아요."

"진짜 어린게 까분다!"

"딱히 안 어리거든요. 여튼! 그 원령관련된 문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테니까 연지랑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피식 웃는 진욱이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집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도대체 그 긴 세월은 어디로 간 것인지, 조금만 건들이면 발끈해가지고.

질투심에 눈이 멀어 7살 먹은 애 같인데다가, 흥분해서 말 싸움 하나 이기지 못하는 우스운 모습이 예전이랑 달라진 것이 하나 없는 양반이었다.







"감사합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이 자그마한 여인에게 커다란 위로를 받고는 해사하게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필요에의한 억지 웃음이 아닌, 책임감이나 불편함 따위도 하나 섞이지 않은 진정 행복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리 웃으시니 더욱 환하십니다."

그에 잠시 놀란 얼굴을 짓던 서원이 마주보며 예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얼굴을 붉힌 사내가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 모습이 재밌는지 이번에는 소리를 내며 서원이 웃어보였다.

"아, 그런데 이름이 어찌되십니까?"

눈꼬리가 발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웃던 여인이 예쁜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는..."

자신을 어둠에서 빛으로 꺼내준 사람.

아버지와의 약속을 다 잊을만큼. 진심으로 진심으로 갖고 싶은 사람.

저를 잊지 말아달라는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한 글자, 한글자 힘을 줘서 이야기했다.

"한가의 진욱이라고 합니다. 진.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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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30 16:40 | 조회 : 1,200 목록
작가의 말
브리사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설날 연휴도 마지막 날이네요. 다들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잘 지내고 계신가요?//그리고 댓글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힘내서 쓰고 있어요~^^//죄송합니다. 내용이 업로드가 안되어있었네요 ㅠㅠ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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