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3장 드라마틱(Dramatic) - (3)

“헤에, 꽤 굉장하네요.”
“뭐, 그래도 영화촬영이니까.”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의 모습에 감탄의 말을 늘어뜨리는 채희의 솔직한 한 마디에 은성은 무심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확실히 어릴 때부터 이런 현장을 자주 봤던 그로서는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었지만, 촬영과 관련도 없는데다 평범한 일반인인 채희에겐 일생에 한번 볼까 말까한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한껏 들뜬 표정 한참동안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채희는 이내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은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
“왜?”
“이따가 사인 받고 사진 찍어요!”
“......꼭 그래야 돼?”

정말 귀찮은 것인지 은근히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채희는 단칼에 그의 말을 끊으며 그를 향해 소리쳤다.

“사장님!”
“알았어, 알았다고......”

한층 시무룩해진 모습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은성의 모습에 채희는 그제야 만족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스태프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제 막 촬영을 시작하려는 것인지 스태프들은 장비들의 방향을 카페의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차분하게 막바지 준비를 진행하는 스태프들의 모습에 은성은 조심스럽게 감독을 향해 다가갔다. 촬영이 시작하기 전에 간단히 말이라도 나눌 요량으로 말이다.

“촬영 준비는 순조롭게 잘 되가세요?”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은성의 말에 감독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은성 씨 다 덕분입니다. 흔쾌히 자리를 빌려주신 덕에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별 말씀을요. 어머니 일인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뭐 불편하신 건 없으세요?”
“불편하긴요, 원래 계획했던 곳보다도 훨씬 더 좋은 곳인데 불편할 리가 있겠습니까?”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칭찬을 쏟아내는 감독의 모습에 은성의 입가에 난처한 미소가 어렸다. 자신의 카페를 저렇게 좋아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이가 들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그것이 돈 한 푼 들지 않는 립 서비스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감독은 조금 머뭇거리며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실례되지 않으신다면 후에 있을 촬영도 이곳에서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금은 지불하겠습니다.”
“그, 그건......”
“꼭 좀 부탁드립니다!”

은성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크게 소리치며 허리를 숙여 보이는 감독. 그런 감독의 모습에 은성은 속으로 낮게 욕을 내뱉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대번에 거절하기도 힘들게 크게 소리까지 치며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 자신에게 허리까지 숙여 보이는 모습을 보였으니 대놓고 거절하기엔 그는 물론, 연기자인 서현의 이미지에도 타격이 갈 수 있었다. 과연 밀림이나 다름없는 연예계답게 언행 하나하나가 곤란할 정도로 영악했다. 하지만 은성 역시 만만치 않았다.

“저희 내부 일정도 있는지라. 아직 뭐라 확답은 드리지 못 하겠군요. 일정을 차분히 검토한 뒤에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되도록 긍정적인 답변으로요.”
“그렇습니까? 하긴 너무 제 입장만 생각했군요.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니요. 저야말로 촬영 준비 중에 실례했습니다. 그럼 무사히 촬영 마치시길.”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는 감독의 모습에 은성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내젓고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까지 말해 놨으니 감독도 무리하게 부탁하지는 않으리라. 감독의 잔꾀를 가볍게 무마하고 자리로 돌아온 은성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뭐, 심각한 이야기라도 하고 오신 거예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채희.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은성은 씁쓸한 표정으로 운을 떼었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여기서 촬영을 하고 싶은 가봐.”
“에에? 그럼 좋은 거잖아요.”
“촬영만하고 커피는 안 팔면 그게 세트장이지 카페냐?”

째릿하고 눈을 흘기는 은성의 모습에 채희는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긴 아무리 돈을 받는다지만, 잦은 촬영으로 이렇게 손님을 받지 않으면 본말전도나 다름없었다.

“그럼 거절하실 거예요?”
“아니.”

채희의 물음에 은성은 주변의 시선을 살피고는 입가를 가리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 전의 말과는 달리 곧바로 수긍의 의사를 내비치는 은성의 말에 채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예요, 계속 촬영만하면 카페가 아니라 세트장이라면서요.”
“물론 그렇긴 하지. 대신 간접광고가 되잖아. 너무 자주는 거절하되 적당히 부탁은 들어주는 정도는 괜찮아. 생각보다 수익도 나쁘진 않고. 무엇보다 딱 잘라 거절하기엔 어머니 입장이 난처해지잖아.”

조그맣게 소곤거리는 은성의 설명에 채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연이어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궁금증에 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왜 거절한 거예요?”
“거래의 기본은 밀당이지.”
“아아, 납득.”

명쾌한 은성의 한 마디에 채희는 단번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밀당, 다시 말해 ‘밀고 당기기’, 그 이상 상황을 설명해주는 말이 또 있으랴? 자신의 말에 납득하고 쉬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은성은 피식 웃으며 머신 앞으로 다가갔다.

“알았으면 좀 도와.”
“뭘요?”
“말했잖아 밀당이라고. 밀었으면 이젠 당길 차례지.”

능글맞은 웃음을 끝으로 은성의 손이 분주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

“흐음, 냄새 좋다.”
“그니까. 맛까지 좋으면 대박인데 진짜.”

서서히 웅성거리는 여자 스태프들의 모습에 은성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역시 상대적으로 남자에 비해 커피를 즐기는 여자들답게 카페 전체로 퍼져나가는 커피 향에 빠르게 반응한다. 어느 덧 모든 스태프들의 인원에 맞는 커피를 만들어낸 은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스태프들에게 커피를 건네기 시작했다.

“자, 한잔씩 드시면서 하세요.”
“어머,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오오, 잘 먹겠습니다.”

자주 커피를 즐기는 여자 스태프들은 물론 남자 스태프들 역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받아들었다. 확실히 무료로 나눠주는 것이다 보니 평소에 커피를 마시지 않더라도 일단은 받아드는 것이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하지 않은가?

“너무 쓰거나 하신 분들은 저기 서비스 테이블에 시럽하고 설탕 있으니까 입맛에 맞게 넣어 드세요.”
“으음, 너무 맛있어요!”
“오오, 진짜 최곤데요?”

쏟아지는 평가는 다행히 칭찬 일색.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는 것인지 연이어 터져 나오는 호평에 은성은 슬그머니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로 이걸 노린 것이다. 직업 특성상 커피를 자주 접하는 방송 연예계이기에 카페의 주요 수요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이들에게 여느 카페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훨씬 더 뛰어난 맛과 향을 각인시켜 준다면, 자주 커피를 마시는 방송 연예계 인사들을 단골 고객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수 있었다. 특히 연예인의 경우 팬들의 팬심과 사람들의 허영심을 자극하여 한 명이 아닌, 수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곤 했으니 말이다. 고객의 상승은 곧 수입의 상승, 그렇기에 은성으로서도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눈치껏 쉬는 시간을 노리고 커피를 나눠주는 은성의 모습에 감독과 스태프들은 물론 연기자들의 얼굴 역시 밝아졌다. 고된 작업 중에 이렇게 무료로 커피를 나누어주니 그들로서도 반갑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한잔씩 드시면서 하세요.”
“아유, 뭘 이런 걸 다...... 은성 씨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못내 미안한 척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커피를 받아드는 감독의 말에 은성은 미소로 답하며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봐봐, 맛있지? 우리 아들이 이래 뵈도 커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든 다니까.”

어느새 커피를 챙긴 것인지 서현은 금세 헤벌쭉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에 은근히 자랑하기 바빴다. 정말이지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곳곳에서 차분히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 하지만 모두가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구석진 카페테라스, 그곳에 혼자 서서 도도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여인. 여인은 상당히 미인이었다. 오른쪽으로 쓸어 넘긴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의 단발 머리칼, 우수에 젖은 듯한 외로운 기색의 검은 눈동자, 은은한 윤기가 흐르는 뽀얀 피부, 매끈한 콧날과 갸름한 턱선, 선홍빛이 감도는 작고 도톰한 연분홍색 입술, 늘씬한 몸매까지. 하지만 왠지 모르게 상당히 외로워 보이는 여인의 모습에 은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 있으세요?”
“...네?”

갑작스런 은성의 물음에 여인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살짝 당황한 듯하지만 여전히 은근한 외로움이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에 은성은 자기도 모르게 늘 짓고 있던 가식적인 미소를 풀어버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아니요, 뭔가 조금...... 아, 괜찮으시면 커피 드실래요?”
“아, 감사합니다.”

머뭇거리며 간신히 커피를 건네는 은성의 모습에 여인은 미소로 답하며 조심스레 은성이 내미는 커피를 받아들었다. 그때였다. 등골을 스치는 위화감. 이윽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위화감의 정체를 눈치 챈 것일까? 은성은 이내 복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포커페이스...... 맞죠?”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은성의 목소리. 그런 그의 말에 여인, 지혜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초면에 이런 말을 들은 것이 충격이기도 했지만, 설마하니 배우로서의 연기력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포커페이스를 눈치 챌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그, 그게 무슨?”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지혜의 모습에 은성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냥...... 동질감이랄까요? 왠지 저를 보는 것 같아서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은성. 뭔가 나이에 맞지 않게 아저씨 같은 말투로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지혜의 눈빛이 가늘게 변했다. 이런 식으로 접근했던 사내들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간 남자들은......”
“네?”

꽤나 날이 선 말투로 조그맣게 투덜거리는 지혜의 모습에 은성의 얼굴에 의문의 표정이 어렸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잠시 폭풍처럼 쏟아지는 지혜의 말에 은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작업 거는 사람이 지금까지 없었을 것 같아요?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소리에요. 당신이 내 마음을 알긴 아냐고요.”

감정이 복받친 것일까?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설움이 가득 담겨있는 그녀의 말에 은성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간 그녀가 겪은 일들이 결코 가볍지만은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상황을 고려하긴 한 것인지 조용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에 은성은 한껏 달라진 모습으로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낸들 그것까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의 삶은 그쪽만 힘들 뿐이야.”
“당신이... 당신이 뭔데!”
“그쪽보다 몇 년이나 그렇게 살았었으니까. 지나가는 개소리라고 치부해도 좋아. 뭐, 그쪽 일은 그쪽이 알아서 하는 거지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거잖아?”

많은 것이 담겨 있는 한 마디. 그 한 마디의 말에 지혜는 자리에 굳은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온갖 연기를 다 하는 배우이기에 잘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엔 조금의 거짓도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처연한 표정으로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 그녀의 모습에 은성은 매정히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정확히 할 말만을 말하고 자리를 뜨는 은성에게로 또 다른 여인이 다가갔던 것이다.

“그새 또 여자를 건드리고 있었던 거야?”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와 능글맞은 표정으로 등을 누르는 서현의 음성에 은성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우, 보고 있으셨어요?”
“처음부터 전부. 뭐 이래저래 사정이 많은 아이니까 너무 뭐라 그러지 마. 알았지 현아?”
“......여전하시네요. 알아차리시는 것은. 언제부터 알아 채셨어요?”
“처음부터. 그러니까 감독이 너한테 수 쓰기 전부터랄까?”

날카로운 비수처럼 정확하게 파고드는 서현의 한 마디에 은성, 아니 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모자지간이 맞긴 한 것인지, 남들은 쉽사리 눈치 채지 못하는 다른 인격들의 등장에도 서현은 귀신같이 눈치 챘다. 굳이 현이 아니라, 율이나 강호 어느 누구로 바뀌어도 말이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그나저나 사정은 무슨 사정인데요?”
“글쎄...... 나도 정확히 들은 건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남자한테 크게 데였다던데? 뭐, 이 바닥 소문이란 게 그렇게 믿을 만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서현의 말에 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이상 궁금해 해봤자, 그에게 득 될 것은 딱히 없었으니 말이다. 동질감이 느껴져서 몇 마디의 충고를 건네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 딱히 그녀의 삶에 관여하고자 하는 건 그에게 있어 귀찮은 일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서현의 눈에 그렇게 비치진 않았나 보다.

“왜, 관심이라도 있는 거야? 하여간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됐네요. 미인도 미인 나름이지. 귀찮은 건 딱 질색.”

단호하게 중얼거리며 현은 다시금 바리스타 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어려 있지 않는 단호한 모습은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 그러하듯 세상 일이 그렇게 마음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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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10 20:09 | 조회 : 906 목록
작가의 말
류운

오나귀 대박이네요 박보영 완전 졸귀... 어제 보다 여러번 심장 어택 당했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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