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감

의사는 리지가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말했다.
**

내가 독을 먹었다면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니!
기적이고 자시고 몇 년 간의 기억이 끊긴 듯 떠오르지 않는데 이 무슨 기적이란 말인가. 물론 독을 먹었을 당시의 기억 또한 없다. 답답하고 불쾌한 기분에 두통까지 더해지니 뭘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눈 앞의 의사까지 꼴 보기 싫어졌다.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머리 아프다 성질을 내며 의사를 내보냈다. 얼빠진 의사 표정이 볼만했다. 끅끅거리며 웃다가 잠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머리는 개운해졌으나 상황파악을 하야겠단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몇 시간이나 잤더라....
모두가 부자연스럽다. 이 기시감, 연극같은 상황, 그리고 가장 이상한 나까지. 겪어 본 적이 없음에도 언젠가 겪어본 것 같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이 무섭다.

잃어버린 기억에 관한 건.....내가 희대의 악녀라 누군가 독을 먹였던, 내가 뭔갈 잊으려 금지된 주술을 사용했던,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보았다. 물론 주술은 불법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몇 년 간의 내 심리 상태를 모른다.
극단적이라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둬야 한다는 말이다.
쓸모 없는 가정이라도 뭔가를 생각해 내니 안심이 되었다.
왠지 긴장이 풀리자 찝찝하게 땀에 젖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습관적으로 설렁줄을 당겼다.

목욕이 끝나고 나가려는 하녀를 붙잡았다. 불쌍하게도 덜덜 떨어댄다. 내가 그렇게 무섭나?
"샐리."
그런데 난 그 애를 모른다. 왜인지 입이 저절로 움직인다. 어떻게 부른 거지?
"너도 알다시피 난 기억을 잃었어. 제삼자의 입장으로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뭐지?내가 말하고 있는 게 맞나? 저게 내가 생각한 건가?
정신을 차리려 뺨을 세게 내려쳤고, 그나마 더 또렷해졌다. 불쌍한 샐리는 더 격렬히 떨어댔다. 아아, 불쌍한 샐리.
"샐리, 그만 떨고 빨리 말해 봐."
아무 일도 없는 양 여상히 묻자 그녀는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고 도망가 버렸다. 버릇없는 행동이지만 내가 걔였어도 무서웠을 것이기에 너그러이 이해해 주기로 했다.

리지가 리지의 정보를 캐묻는다니, 누가 봐도 우습기 짝이 없으나 내겐 절실한 일이다. 깨어나서부터 드는 묘한 기시감과 오한이, 날 괴롭히는 생각들이 기억을 찾으면 사라질 것만 같았기에.
귀찮아 죽겠으나 잠을 이미 너무 많이 자 더 자려고 누우면 머리가 아팠기에 종이에 들은 정보를 정리하며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서랍에서 습관적으로 펜과 종이를 꺼냈고 일기장으로 추정되는 아기자기한, 유치한 분홍빛의 공책까지 함께 꺼냈다. 정리하고 읽어야지. 무조건 연애일기일 거다.

*
1. 나는 리지 아르니카이다(이런 건 알려줄 필요 없는데)
2. 나는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신부다. (남편이라는 사람과는 연애결혼이었단다.(내가 연애결혼이라니 이해가 안 간다.)
3. 난 향수병 탓에 이 집구석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굳이 이곳에 돌아온다고?)
4.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원한을 산 적이 있나?)

여러모로 부실하고 이상한 정보였다.

2
이번 화 신고 2022-03-07 12:42 | 조회 : 515 목록
작가의 말
stande

종종 내용이 수정될 수 있습니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