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 얼마든지 찔려줄게.

"무, 무슨 소리에요! 내가 범인이라는 증거 있어요? 증거 있냐고!"
"일단 좀 진정해, 나탈리의 유서를 다 읊어볼테니 들어보게.
그녀는 나에게 나 만은 행복했으면 한다고 한 다음, 이런 걸 남겼어."

그가 내게 작은 쪽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뭐야... 이게..."

그 쪽지엔 [디올라 헤거든 방화 사건]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뭔데, 이게."
"뒤를 보게, 뒤를."

쪽지의 뒷장을 보자 [디올라 헤거든 방화 사건] 이라는 큼지막한 문장 아래 짤막하게
''68 12 53 3 53 18, 9.3''
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뭔데... 이 숫자들 가지고 내가 범인인지 어떻게 알아?"
"혹시 내가 원자론에 대해 몰두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물론, 어느 파티에 가든 당신이 원자론과 주기율표에 몰두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내리고 있는데 어떻게 모르겠나?"
"나탈리는 그걸 노린 거라네."
"그게 무슨 소리야."
"원자 번호를 적은 거란 소리라는 거야."
"아! 난 그거 모르니까 좀 해석이라도 해보든가!"
"차례대로 읊으면... Er Mg I Li I Ar, 그리고 F.L."
"그게 뭔데..."
"차례대로 대문자만 읽으면 EMILIA F.L가 된다. 자네의 이름이지. 에밀리아 프뢸리히."
"..."

말도 안돼... 난 정말... 난 정말... 그 여자를 죽인 적 없다고!
난 그런 적 없어...

"그, 그저 우연일 수도 있잖아?"
"우연? 이렇게 잘 맞는 게 우연이라고?"
"그럼 그 위에 디올라 헤거든 방화 사건은 뭔가!"
"그 방화 사건 이후, 피해자들에게 후원한 집안 중 하나가 프뢸리히 가문이라네. 심지어 가장 많은 금액을 후원했거든. 눈에 띌 수 밖에 없지."
"정말 나는 나탈리를 죽인 적 없어! 없다고! 정말이야... 제발, 제발 믿어줘..."

그에게 무릎을 꿇고 빌기까지 했다, 지금 상황에서 살인자로 낙인 찍히게 되었는데 뭐가 체면이 뭐가 중요한가.

"...난 그대를 죽이고 싶을 뿐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대가 갖고 싶기도 해.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대가 알려주겠나?"

순간 머리가 텅 비워진 느낌이었다. 애석하게도 머리에선 날 죽인 뒤, 시체로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다가, 혹시 그가 내 생각까지 읽진 않을까 두려웠다.

"아, 좋은 방법이 떠올랐네. 그대를 죽인 뒤에 내가 시체로 가지고 있음 되는 거 아닌가."

그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하나 틀린 것 없이 날 죽인다는 말을 서슴없이 뱉었다.

"제, 제발 날 믿어주게... 제발... 정말 난 나탈리를 죽인 적 없어... 그녀를 만난 적도 없단 말이다... 날 믿어줘. 제발... 내가 뭐든지 할게, 뭐든지!"
"뭐든지? 그러니까 죽어 달라는 거 아닌가."
"아... 제발... 죽이지 말아..."
"...프뢸리히 공녀, 드디어 포기하기로 한 건가?"
"...풉, 푸하하! 내가 포기? 포기해?"
"음? 프뢸리히 공녀, 드디어 미친 건가, 그래?"
"아니, 난 미치지 않았어. 공작, 날 죽이고 싶다고? 한 번 죽여보지 그래?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 얼마든지 찔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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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03-12 22:20 | 조회 : 728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