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민구 (1)

회사를 이직하면서 정연은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로 독립했다. 매달 나가는 월세와 관리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는 동창들과의 야구관람 자리에서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친구인 민구가 자신과 지내자고 말한 것이다.

민구는 재혼한 어머니가 새아버지와 귀농해서 혼자 살고 있었다. 민구가 내는 아파트 관리비는 정연의 오피스텔 월세 절반도 되지 않았다. 정연은 친구 집으로 이사했다.

집은 마음에 들었다.

종합병원과 대형할인점이 가까운 데다 단지 옆에 작은 공원이 있어서 공기도 나쁘지 않았다. 여기에 베란다가 딸린 방 하나를 혼자 썼다. 거실의 대형 TV도 거의 독점 가능했다. 인터넷 보안 직인 민구는 밤을 새우다시피 야근을 해대서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주말에나 가끔 집에서 마주했을까.

밀린 빨래와 청소는 당번을 정해 주말에 몰아서 했다. 쉬는 날에는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인터넷으로 장을 봤다. 배달 치킨이나 피자, 짜장면 등을 함께 먹으며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다 보면 월요일이 훌쩍 다가왔다.



“평소 바빠서 같이 밥을 못 먹어도 늦은 밤에 맥주 한 잔 나눌 시간도 없었던 건가요? 그러면 같이 살아도 자주 못 보니 어색할 것 같은데요.”

“그 녀석, 간이 나빠서 술을 즐기지 않았어요. 와인이나 맥주도 한 잔씩만 할 정도였지요. 그리고 남자들은 진짜 친한 사이인 경우, 가끔 만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주말에나 얼굴을 마주해도 아무렇지 않답니다.”



짜식, 그동안 잘 지냈군. 서로의 생사와 건강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의 우정은 이어지게 마련이다.

조용하고 목가적인 나날이었다. 모임과 가끔 있는 선 자리가 없으면 TV 앞에서 뒹굴던 일상은 지난 초겨울 어느 날 깨졌다. 민구의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를 치른 후 민구는 휴가를 내어 중국에 갔다. 형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중국에 주재원으로 나간 민구의 형은 오랫동안 한국에 머물 수 없었다. 민구는 형 가족과 1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정연은 1주 만에 만난 그가 조금 낯설다고 생각했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어요.”



민구가 변했다. 공항에 마중을 나간 그를 본 민구는 처음 만난 사이처럼 정연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나갔다 온 짧은 여행이 안겨준 피로 때문이라 생각했답니다.”



힘든 시기를 보내느라 상태가 나쁜 게 분명해. 정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느낀 감정은 묘한 이질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연은 그가 예전의 민구가 아닌 것 같았다. 뭐랄까. 며칠 사이 민구는 수십 살을 먹은 것 같았다. 젊음이 확 쭈그러든 것 마냥 그에게서는 활력이 사라졌다.


“말투나 행동도 변했죠.”



민구는 밤을 꼬박 새우기 시작했다. 만성피로로 잠이 부족하다던 하소연이 어느샌가 사라졌다.

거실이나 주방 불이 새벽까지 켜진 날이 늘었다. 가끔 새벽에 눈을 뜨면 방문 틈으로 들어오는 불빛이 보였다. 신경 쓰는 일이 생기면 잠을 설치는 버릇이 없었다면 몰랐을 변화였다.

불을 미처 끄지 않았나?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가면 거실에서, 주방에서 친구가 서성이고 있었다. 창가에서 멍하니 밖을 내다보거나 얼음 넣은 물을 성수인 양 음미하며 마시는 친구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기묘했다.

‘안자고 뭐하냐? 출근 안 할 거야?’

한두 번은 모른 척 지났다. 하지만 계속해서 친구의 이상 행동을 넘길 수는 없었다.
툭툭 어깨를 치며 말을 걸면 이른 새벽의 도시를 내다보던 민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 출근…….’

낯선 외국어를 따라 발음하듯 느릿느릿한 말, 최면에 걸린 듯 몽롱한 눈, 낯선 사람을 보듯 그를 보는 시선의 초점은 정연의 눈을 마주하면서 천천히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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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3 23:45 | 조회 : 1,500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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