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ptor - 프롤로그

2011년 첫 날 인터넷으로 본 신년운세는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하는, 정신없이 바쁜 한 해가 된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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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대가 되면 인생의 방향이 안정적으로 열릴 줄 알았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쏟아 만든 영어 점수와 코피를 닦아가며 연습한 모의면접 기술로 회사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미래는 장밋빛이었다.

개인 컴퓨터와 프린터기가 있는 책상, 이름이 박음질 된 가운, 동료들과의 즐거운 점심, 분홍빛 사내연애, 언론이 주목할 근사한 실적, 경영진의 신임, 그리고 승진.

이 모든 건 TV가 만든 허상이었다. 드라마는 멋지게 빼입은 배우들이 멋을 내며 회사 안을 거니는 모습만 보여줬을 뿐이다.

출근 시간은 9시지만, 8시에 로비를 들어가야 인사고과가 잘 나온다.

의자에 가방을 놓자마자 컴퓨터 계정 로그인을 한다. 회사와 구글 메일함에는 밤새 날아온 자료들이 출력을 기다리며 쌓여있다.

이메일과 페이퍼를 인쇄하면서 회사 그룹웨어 일정과 내 다이어리 메모를 비교 점검한다. 일일 업무를 확인하면 프린터 물과 볼펜을 챙겨 휴게실로 간다.

애용장소는 연구동 중앙 휴게실이다. 중앙 휴게실에는 가장 많은 가짓수의 주스가 든 무료음료자판기가 있다.

여기에 밤을 지새운 누군가가 내린 원두커피가 남아있어 바로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내용물을 읽으며 커피를 홀짝이다 보면 연구원들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하루 중 가장 여유 있는 시간이 갔음을 알리는 소리다.

실험실로 돌아와 책상과 배양실, 실험대를 오가다 보면 식사 시간이나 퇴근 시간이 지난다.

어디 이뿐인가.

갑자기 잡히는 호출과 분기별로 몇 번씩 수정되는 계획서 때문에 실험방향은 수시로 변경되곤 했다.

바뀐 절차에 따라 소용없어진 이전 실험의 과정물들은 폐기물 비닐봉지를 두툼하게 채워 나갔다.

시료만 바꾸어 반복하는 실험과 지지부진한 데이터. 토종 도롱뇽에서 추출한 노화 지연물질 X와 회복물질 R은 2년째 뚜렷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만 나이 서른. 이 나이에 가지고 있어야 할 멋진 실적도, 미래를 약속한 남자친구도 지금의 나에겐 없었다.

건강 역시 자신할 수 없을 만큼 나빠졌다.

얇은 골격으로 호리호리하던 체격은 야근과 불규칙한 식습관으로 말라서 비척거리기 시작했다.

살이 빠지면서 키도 줄어들었나 보다. 딱 맞아 떨어지는 165센티건만 주변에서는 3센티는 깎아본다.

희고 깨끗한 피부(외모 중 가장 자신 있던 부분이다), 달걀형 얼굴, 버선코처럼 동그랗게 모인 아기자기한 콧방울, 도톰하게 도드라진 이마, 살짝 남은 젖살이 감싼 턱선, 타조처럼 긴 속눈썹과 짙은 속 쌍꺼풀로 커다란 아몬드형 눈동자를 빛내던 나는 어디로 간 건지.

거울 안에는 밀려드는 업무와 삶에 찌들어 시들어가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매끄럽던 턱선과 소문자 m 자형 이마선은 서너 개씩 올라오는 성인성 뾰루지 때문에 수시로 오톨도톨하게 변했다.

퀭한 눈자위와 푸석하게 말라가는 피부 뒤로 몇 달째 다듬지 못한 머리카락이 부스스한 채 어깨를 넘어 내려가고 있다.


“쉬고 오겠습니다.”

주말도 반납하며 틈틈이 출근했다. 낙하산 입사라는 말이 나돌기 전부터다.

일 중독으로 입사 소문은 금방 가라앉았지만, 제대로 쉰 적이 없다. 근속 3년 동안 보낸 휴가는 연휴를 틈타 근방의 소도시에서 진행한 소소한 부업이 다였다.

“열흘이면 충분하지? 월말에 유럽에서 올름(olm)이 들어오네.”

찍. 휴직서에 적은 3주의 휴가 일자 위에 볼펜 선이 그려졌다.

특유의 흘림체로 볼펜 선 옆에 10일을 적은 사장님은 덤덤한 표정으로 도장을 찍어 결재판을 돌려주었다.


‘이미아 과장 휴가 신청서 좀 봐. 사장님이 직접 일정을 수정했네.’

‘역시, 둘은 보통의 관계가 아니야.’

촌수가 멀어도 친척(부계 쪽 8촌이라 법적으로 인정받는 친척 범위에 든다.)이라고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며 키운다느니, - 우리가 같은 집안임을 모르는 사람도 나와 사장님을 보면 혈연관계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집안 내력인 m 자형 이마선과 아기자기하게 모인 콧방울, 거의 같은 각도로 꼬리가 살짝 올라간 아몬드 형 눈매가 너무 닯았기 때문이다.

강산이 변하고도 남는 까마득한 학번차이에도 같은 대학 선후배라고 챙겨준다느니, 평소라면 인사팀에서 수정된 서류(내용이 어떻게 바뀌든 나의 휴가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를 보며 이렇게 수군거릴 모습에 벌써 머리가 아팠겠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매일 이 시간쯤 시작되던 화장실행 복통도 오늘은 찾아오지 않았다.

*1) 동굴도롱뇽붙이란 이름을 가진 올름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일부 지역 동굴에 사는 장님 도롱뇽이다. 10년 넘게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생존했다는 기록이 있는 동물, 영생의 비결을 몸속에 숨기고 있는 경이로운 생명이 드디어 오는 것이다.

올름은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회사 경영진이 다루려던 생물자원이었다.

구 러시아 연방국에서는 올름이 해외 반출이 금지된 관심 보호대상이다.

반대로 이탈리아는 반출 금지 지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물의 국경 이동에 관한 국제, 국내적 규제들 때문에 회사는 동굴도롱뇽붙이를 바로 들여올 수 없었다.

내가 입사할 무렵에도 올름 국내 반입을 위한 로비가 몇 년째 진행 중이었다.

올름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차선으로 다른 실험실에 들어갔다. 국내 도롱뇽 연구팀이었다.

도롱뇽 실 직원들은 모르고 있지만, 이 연구실은 올름 실험을 위한 예비 단계였다.



“드디어 들어오는군요. 그럼 진행하던 실험은 모두 임 부장이 마무리하는 건가요.”

“잘 아는군. 그리고 올름 실험은 자네 주도 아래 진행하게 될 거네.”

한국 도롱뇽에서 얻어낸 지금까지의 실적은 본 실험을 위한 습작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 도롱뇽에서 추출한 노화지연물질 X가 좋은 예다. X는 생쥐를 이용한 동물 실험에서 세포 노화 속도를 5%가량 늦추었을 뿐이다.

생체 노화를 타고나게 늦은 집단과 비교해도 매력적인 결과가 아니다.

대신 손상 세포 재생은 기대할 만했다. 인공배양한 사람 피부세포의 복원능력이 증가함을 얼마 전 확인했다.

도롱뇽 연구팀은 다른 조직의 세포와 살아있는 동물 대상으로 추가적 손상 세포 복원실험을 들어갈 예정이었다.

한국 도롱뇽에서 얻은 결과물은 내가 원하던 내용이 아니었다. 선임 연구원인 임 박사의 업적으로 넘겨도 아무렇지 않았다.

입사 3년 만에 목표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되다니.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날숨을 따라 조금씩 콧구멍 밖으로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 들어올 때 나는 핵심 연구팀에 합류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유명한 생리학 박사이자 사업가인 사장님의 직속 부서였다.

우리 회사는 인류의 오랜 꿈인 불사에 도전하고 있다. 개인이 영생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수명 연장은 가능하다. 젊음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면서 건강히 사는 건 누구나 꿈꾸는 삶이 아니던가.

먹이가 없는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오랜 시간 살아남는 올름의 생존력은 연구 가치가 높다.

올름의 수명과 관련된 인자를 밝힌다면, 일반적인 수명 연장은 물론, 열악한 환경에 놓인 인간의 생명 단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입사 계약에 따라 올름에서 추출할 장수 인자 개발 연구 프로젝트는 수석 연구원인 사장님 아래서 내가 진행할 예정이었다.

도롱뇽으로 진행했던 각종 선행실험은 올름을 다루며 겪을 삽질 시간을 대폭 줄일 것이다.

물론 핵심 연구팀은 한국 도롱뇽에서 얻은 성과도 상업적으로 가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임시로 X라고 이름을 붙인 도롱뇽의 노화지연 추출물과 회복물질 R은 성과만 나오면 올름의 강인한 생존 인자와 함께 회사가 내놓을 장수 관련 신제품의 열쇠가 될 게 분명했다.


“그래, 여행은 어디로 가나?”

“동남아 야시장을 순례하는 배낭여행을 생각했지만, 휴가일이 줄었으니 일정을 조절해야겠습니다. 그래도 말레이시아는 꼭 가려고요. 각종 열대과일의 천국이라더군요.”

나의 말에 사장님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과장은 맛있는 음식을 위해선 화산 속으로도 뛰어들 사람이지. 말레이라, 거기 간다면 반딧불 관광은 빼놓지 말게. 절정의 판타지를 볼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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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름(olm- Proteus anguinus ): 참고자료
(a)wikipedia
(b) Julien Issartel · Frederic Hervant ·
Michelle de Fraipont · Jean Clobert · Yann Voituron (2009) High anoxia tolerance .in the subterranean salamander Proteus anguinus without oxidative stress nor activation of antioxidant defenses during reoxygenation, J Comp Physiol B (2009) 179:54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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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02 01:43 | 조회 : 1,604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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