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뒤집히는 빛과 어둠(2)

황궁에 얻혀 살기 시작한지 어언 한달.

황태자의 궁은 정말 할 것이 없었다. 화려하고 부족함도 없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게 느껴졌다.

“여기 있다간 미치겠다.”

유현은 황태자의 침대에 누워 가벼운 와이셔츠의 차림으로 누워 있었다. 건장한 성인인 황태자의 것을 입은 탓에 부모의 옷을 몰래 훔쳐입은 아이처럼 옷이 헐렁했지만 유현은 편해서 소매도 걷지않고 그대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정도는…아니라고 생각한다만.”

황태자, 루베리오는 뻘쭘하게 웃으며 볼을 글적였다. 그는 이곳에서 10년이 넘는 동안 살아왔지만 그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다.

“…이게 힘들지 않았다고?”

이곳은 유현이 살았던 산과 비슷한 느낌이 났다. 그곳보다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이나 의식주는 잘 갖추어져 있었으나 분위기가 적막하고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그런 이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은 이곳의 주인, 루베리오였다.

“이곳에서 너만 색이 있는 것같잖아. 머리카락이 금발이어서 그런가?”

금발의 푸른 눈. 전형적 왕자님의 얼굴에 가까운 그는 묘하게 반짝였다.

“…그, 런가?”


루베리오는 왠지 뜨거워지는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유현은 그런 그를 유심히 살펴보며 집중했다.

[최후의 신의 축복의 효과가 상대방을 꿰뚫습니다.]

‘풀버전으로.’

[이름] : 루베리오 네트 아그라테 [나이] : 22살 [인종] : 인간

[소속]: 없음 [속성] : 인내(忍耐)

[성향] : 질서 선

[능력치]:체력[50],근력[60],민첩[60],지력[80],정신력[110],마력[80].

[직업] : 황태자

[칭호]: 끈기있게 인내하는 자(희귀).

[스킬]: 검격(B).

[패시브 스킬]: 인내심(A)

*현재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기사단장, 라인 베도로와 같은 ‘질서 선’의 성향인데 성격의 차이가 심했다.

‘그놈은 역시 미친 놈이야.’

역이지 말자. 위키의 말이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정신력이 높아서 그런가 패시브 스킬이 인내심이
네.’

스킬명이 참 단순하다고 생각하며 유현은 하품을 했다.

“하아음. 여기서 평소에 뭐해?”

“음, 대부분은 호위기사와 체스를 두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의기사? 혹시 네가 친할아버지 처럼 생각했다던 사람?”

“그렇다.”

루베리오는 씁쓸하게 웃었다. 새삼 빈자리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와.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진짜 지루하다.”

“아니.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두명 정도 있다.”

“진짜?”

깜짝 놀란 유현이 졸린 눈을 번쩍뜨며 물었다. 그 모습에 루베리오는 쿡쿡 웃었다.

“그러고보니 어제 올 때가 되었군.”

“누군데? 나 숨어야하나?”

아직까지는 아무도 안 와서 편하게는 있었다만 그것도 여기까지인가. 유현은 아쉬운 느낌은 들었지만 밝히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그녀는 너의 존재를 반기면 반기었지 너에게 위해가 가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렸다.

“이럴 때 보면 그 놈이랑 똑같단 말이지.”

라인 베도로. 그 놈의 그 겉으로는 유들한 미소를 짓지만 시커먼 속을 감추고 있었다. 그건 별종의 짐승이었다. 이왕이면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가끔 그 놈이라는 자와 날 비교하는 것 같은데 그 놈은 누구지?”

“궁금해?”

유현은 황태자 루베리오가 지엇던 미소를 기대로 따라 지으며 루베리오를 놀렸다. 하지만 그속에서 있는 확실한 위험한 경고는 진짜였다.

“…갑자기 알고 싶지 않아지-”

“어쩌면 네 목을 딸 지도 모르는 아주 위험한 자.”

“…….”

갑자기 표정이 굳은 루베리오를 보며 유현은 성큼성큼 다가가서 루베리오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죽는 걸 각오했다더니 역시 무섭나봐? 아니면 삶에 대한 미련인가?”

유현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만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 사실에 황태자 루베리오는 이상하게 안심되었다.

유현은 어떤 것도 경멸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것에도 애착을 가지지 않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유현이기에 자신도 이렇게 편안히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가슴이 답답했다.

“…미련, 쪽에 가깝겠군.

“너의 대한?…아니면 타인일려나?”

유현치고는 꽤 집요했다. 그 사실을 유현도 루베리오도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많고 문답을 계속했다.

“…타인에, 가족도 포함되나?”

루베리오는 보았다. 순간 싸늘해진 유현을 눈동자를.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았던 유현에게 담겼던 날카롭고도 차가운, 마치 고드름을 뭉쳐놓은 것은 날 선 감정을.

“너는… 역시 달라. 이가 대공과는 다른 느낌이야.”

혈연이지만 다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신기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너 왜 그러지?”

“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빙글돌아 침대에 걸쳐앉은 유현이 빙긋 웃으면서 고개까지 까닥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파고 들어가도 좋을 것이 아니다. 한 번 보고 나서는 다시는 돌일킬 수 없다. 그런 불길한 예감에 황태자 루베리오는 눈을 감았다. 이 아슬아슬한 관계조차 깨질것이 드려웠던 그는 겁쟁이인채로 유현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선택했고 유현또한 이 선택을 알고 있었다.

“너는 어때?”

“뭐가 말이지?”

갑작스러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루베리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 방들의 책들. 전부 군사학, 제왕학, 정치학, 농학, 심리학 등등 많던데. 황제가 되고 싶은게 아니야?”

“글쎄.”

어색하면서도 딱딱한 얼굴로 루베리오는 책장의 책들을 하나씩 돌아봤다. 어릴적부터 그의 친구가 되어준 여러가지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 되어있었다.

“이가 대공이 다음 황제가 되겠지. 그라면 분명 좋은 황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이곳에서 읽는 것 밖에 하지 못한 나보다는 적어도 밖에 대해 알고 있는 이가 대공이 더 나은 황제가 되겠지.”

그렇게 확신에 찬 말을 하는 주제에 답지 않게 표정은 어딘가 쓸쓸했다.

“내가 물은 건 그런게 아니잖아.”

유현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누가 더 좋은 황제가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너에게 황제가 되고 싶냐고 물었어.”

“…나는.”

섯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의 목숨을 짊어지고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되고 괴로운 일이다. 그것은 단 한 사람의 제멋대로의 바람으로, 욕심으로 결정지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아닌 타인을 우선시해서 대답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모범적이며 가장 옮은 해답이었다.

“나는 정해진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야.”

단호한 유현의 얼굴을 보자 루베리오가 뱉으려던 말이 쏙 들어가버렸다. 지금 유현은 곧 패태자가 될 루베리오 아그라테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현은 지금의, 현재의 루베리오에게 묻고 있었다. 유현의 눈은 지금 루베리오의 미래를 묻고 있었다.

곧 죽임 당할 운명이것만 미래를 꿈꾸라고 유현은 등을 떠밀고 있었다.

“나는…황제가 되고, 싶었다. 정의롭고 의로우며 백성들의 마음과 귀족들의 마음을 살피며 그것을 적절하게 조절해주는 그래, 마치 천칭(天秤)같은 …황제가 되고 싶었다….”

그것이 루베리오가 꿈꿔왔던 가장 오래된 꿈이었고 가장 찬란한 미래였다. 더 이상 그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어진, 덧없이 사라질 이의 또 다른 미래였던 것이었다.

북받쳐 오른 격렬하고 쓰디쓴 감정에 루베리오의 눈가가 붉게 달아 올랐다. 그것을 숨기려는 듯이 그는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마치 자신의 추한 부분을 드러낸 것과 같이 그는, 루베리오는 그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루베리오를 포근하게 끌어안는 작은 품이있었다. 작은 몸으로는 다 가려지지도 않을 것이 분명한데 루베리오는 빈틈없이 채워지는 따스한 온기에 모든 것이 가려지는 것 같은 우스운 착각이 들었다.

…또한 모든 것이 용서받는 듯한 착각 또한.

“좋은…아주 좋은 꿈이야.”

모든 것을 쏟아낸 루베리오의 감정을 유현은 그대로 받아 드리고 이해했다.

루베리오는 외로워하고 있었으며, 누군가의 온기가 간절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던 타인의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채울 수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루베리오는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그것을 위한 배려와 깊고도 옮곧은 마음가짐을 배웠다.

…루베리오는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사실을 말한 것 만으로 그는 충분히 강했고 올았다.

루베리오는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등을 천천히 쓰다듬는 작은 손길에 마치 모든 것을 구원받은 것만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작은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유현은 상냥한 사람이라는 것을 늦게 알 수 있었다.

그를 안은 유현이 입은 와이셔츠가 루베리오의 흐른 눈에 젖어 투명하게 유현의 몸을 비추었다. 루베리오는 비쳐져서도 확연하게 보이는 유현의 몸에 흉터에 눈이 커졌다. 자세히 보니 목에서 부터 옅은 흉터들이 보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이 분명함에도 사라지지않은 오랜 상처의 자상(刺傷)이.

…유현또한 아파하고 있었다. 아마 그보다 오랜 시간동안.

유현은 무감각하고 무표정한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를 초월한 것도 아니었다. 고통을 넘어선 무언가에 유현은 계속해서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다 마침내 지친 것이었다.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유현을 붙잡을 수 없게 되버려 유현은 허탈하면서 공허한 감정속의 고요함을 가장한 소용돌이의 늪속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윽, 흐윽.”

루베리오의 눈에서 새로운 눈물이 솓구쳐 흘러넘쳤다.

유현의 상처를 외면했다. 이 관계가 부서지는 것이 무서워 친구라고 했던 이를 상처를 묵인했다.

…알아봐 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유현은 루베리오의 상처를 알아 주었다. 그를 품에 안아 위로해주었다. 정작 위로받아할, 구원이 필요한 것은 자신이면서.

날카로운 칼날이 가슴을 갈기갈기 사정없이 도륙하는 것처럼 아프고 숨이 막혔다.

…유현은 언제나 이런 아픔을 느껴왔던 것일까?

텅비었던 눈은 지금… 무엇을 가장 바라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루베리오의 손에 닿지 못하는 것일거라는 것을 알게 모르게 확신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루베리오는 손을 뻗고 싶었다.

…저 혼자 타올라 외로히 어둠속에 져버리는 별에게.

“…유현, 너는…너는, 너무 늦은 건가?”

이미 손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초월(超越)해버린 너는, 너무 늦은 것인가?

“…루베리오. 나는 말이야, 죽기 위해서 살고 있어. 그것을 방해할 만한 것들은 전부 손에서 놓으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것보다 죽기 위해 살고 있다는 유현의 말에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놀라서 커졌던 푸른 눈동자가 이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유현은 뜨겁고 촉촉한 눈물이 셔츠에 닿아 차갑게 닿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아주었다.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아무도 보지 못하게. 그렇게 눈을 감았다.

조용히 흐느끼는 미래의 황제의 울음소리가 온 방을 채우며 따스한 햇볕은 창가를 통해 흘러 들어와 조용히 두사람을 비춰주었다. 그렇지만 모든 햇빛이 어둠을 비출 수는 없었다.

“…조용히 피는 꽃이 하나.”

그때 작은 선율이 하나 공기를 타고 조용히 울려퍼졌다.

“그곳에 작게 피어나.”

조용하지만 감미로운 서글픈 선율에 따라 고통럽게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속삭이며 조용히 스며들어 대지를 채워주네.>

<늠름하게 피는 꽃이 하나, 그곳에 작게 피어나.>

<울지않아도 괜찮아라고 위로해주며 조용히 대지
를 어루만져주네.>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이 하나, 그곳에 작게 피어
나.>

<강한척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힘을 주며 조용히 대지를 껴안아주네.>

<그곳에 피어나는 꽃들이 노래부르며 말하네.>

<이 손을 맞잡아 강하게 이어주네.>

<잊지 못할 온기속의 화원의 작은 자장가.>

마치 동요와 같은 동심과 자장가와 같은 고요함, 그리고 오페라와 같은 웅장함을 썩어 놓은 듯한 노래의 선율은 마음속에 깊게 스며들어 메마른 영혼조차 적시었다.

그렇게 얼머나 지났을까 유현의 어깨에 기대어 루베리오는 깊은, 아주 깊고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잘자.”

유현은 쇼파에 루베리오를 눞히며 이불을 가져와서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어머.”

-탁!

가벼운 바구니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황태자의 방앞에 문을 잡고 서있었다. 한 은발에 초록눈을 가진 꼬마아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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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0-28 16:28 | 조회 : 1,117 목록
작가의 말
블래티

아, 혹시 기억하시나요? 섬멸자의 그녀의. 황제와 이가 대공의 여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녀또한 은발에 초록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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