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 용사, 회의


"그럼 일단. 사태를 정리해보도록 하죠."

텅 빈 교실 안. 어째서인지 더 이상 다른 학생이 상태를 확인하러 돌아오지 않는지도 궁금해하지 않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6개의 책상을 3개씩 마주보게 붙여서 회의 분위기로 맞춰 앉았다.
덤으로, 리리는 어째서인지 사회자 역을 맡아 책상의 맨 앞에 앉아 '사회자, 리리'라고 쓰인 이름표까지 척하고 내걸고 있었지만. 아무도 태클을 걸지 않았다.
마이크가 그 사탕막대기인지 마술봉인지 모를 것이었지만 아무도 태클을 걸지 않았다.

지호는 죽을 맛이었다.

"...난 널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지호의 눈물 섞인 말을 다크나이트는 가볍게 흘려들었다.
그런 지호를 아무도 신경쓰지 않은 채 리리는 자연스럽게 회의 비슷한 것을 진행했다.

"그럼 먼저, 외전 비슷한 것을 빙자해 앞서 나왔던 마왕님의 이야기입니다."

"-?! 그걸 이야기했던 걸로 처리해버리는 거야!?"

"외전을 독백으로 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우민이여."

핫!! 하는 느낌으로 뭔가를 깨달은 지호를 방치하고 리리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니까 마왕님은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마왕'이고. 그에 따른 '용사'가 나오지 않아 마왕임을 의심받고 있기 때문에 다른 세계의 용사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거군요."

"정확히는 목을 베어가려고 했습니다."

다크나이트가 조용히 정정했다. 그런 것까지 정정하지 않아도 좋은데, 옆에서 마왕이 부끄러워하며 들릴듯 말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뭐, 용사가 안 나오는 것 정도야 기다려보면 알 이야기 아닌가요? 마왕이 인간을 거의 가축 취급을 할 때가 되서야 뒤늦게 태어나는 역전의 용사같은 것도 있고. 마왕은 여전히 봉인중인데 뜬금없이 태어나버리는 용사도 있고."

"그게...저희 세계에서는 마왕과 용사는 항상 동시대에 나타나는 걸로 정해져있어서요...그러니까. 그."

"그러니까 예를 들어 새로운 마왕이 즉위하면. 그에 맞춰 새로운 용사도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더듬거리는 마왕을 대신해 다크나이트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거기에 더듬이털을 삐쭉 세우며 이해를 나타내던 리리는 어라? 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마왕이 쓰러지고 나서 얼마 안 가서 금세 즉위하는 건가요? 그럼 이전의 용사가 있는데 또 새로운 마왕? 새로운 용사?"

"아닙니다. 마왕은 용사와 달리 세습제이므로, 마왕의 자식들끼리의 권력다툼에는 상당한 기간이 걸리기때문에 다음 대 마왕이 즉위할 때 즈음이면 그 용사는 이미 죽은 뒤지요."

와우. 권력다툼의 기간이 굉장해.

"그리고 자연히 다음 대 용사는 용사가 죽은 뒤 태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자연스럽게 동시대에."

리리가 납득하고 서기 흉내를 내며 뭔가를 노트에 적어내리고 있었다. 언뜻 보면 대화를 정리하는가 싶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낙서였다.
본인 입장에서는 이쁘고 귀엽게 정리한 셈이겠지만 남이 보기에는 단순히 알아볼 수 없는 낙서에 불과했다.

"그럼 아직까지 용사가 없는 건 전대 용사가 살아있다거나 한 건 아니야?"

지금까지 태클 부재로 가만히 있던 지호가 손을 들며 발언하자. 잠시 다크나이트와 슬라임, 마왕은 서로서로 난처한듯이 눈을 맞추다가 슬라임이 뭔가 녹색의 식은땀 같은 것을 흘리며 질린 얼굴로 조심스레 말하기 시작했다.

"장수....하지만 용사라는 건 다 인간으로 한정되어 있고. 족히 전 마왕 시대에서 150년 가까이 지났는걸. 대략 전대 마왕님을 쓰러뜨렸던 때가 적게 잡아 20대라고 해도 170이면 벌써 죽고도 남을 나이잖아?"

"...너 땀샘 기관 같은 거 흉내낼 필요 있어? 그 식은땀 몸의 일부 아냐?"

"에에이 분위기를 읽어라! 용사 파티인데 이름 없음!"

"이름 있어!! 왜 한번도 언급이 안 된 용사 이름은 알고 계속 나오고 있는 내 이름은 없는 게 되는 건데!?"

"존재감 없으니까!"

"누가 존재감이 없어 누가!! 애초에 이번에 한번도 말 안하고 있는 용사가 더-"

지호가 벌떡 일어나며 자기 옆에 앉아 반쯤 졸린 눈을 하고 있는 용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사회자인 리리가 마술봉인지 마이크인지로 지호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 가느다란 사탕 막대기 같은 것에서 난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호가 컥! 하는 소릴 내고 책상 위에 엎어졌다.

"에헴. 그럼 지금 대충 전 마왕을 해치운 용사가 전대미문의 장수를 누린 채 은거하고 있을 가능성이 제시되었군요."

"무리라고 생각하지만...일단 이번 우리 마왕님도 전대미문의 마왕님이고."

세계평화의 선두주자인 마왕님. 전대미문이긴 마찬가지다.
리리는 가만히 생각하다 물었다.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장수보다도 그 용사가 죽고 나서 새 용사가 태어났는데 모르고 있을 뿐인 가능성은?"

"그럴 리는 없습니다. 새로운 용사가 태어나면 전 세계에 알려지기때문에."

"뭐야 그 시스템알림음같은 건."

"그런 겁니다."

"역시 그 용사, 장수하고 있는 걸까?"

슬라임이 골머리를 앓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아아, 용사가 죽었을때도 그런 알림음 같은 게 들리면 얼마나 좋아."

"태어나는 것만 알리니까 말이죠."

슬라임이 책상에 푹 엎어졌다.
만약 전 용사랄까, 그 사람이 진짜로 터무니없이 장수하면서 은거하고 있는 것 뿐이라면 이런 차원까지 찾아올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동시대에 새 마왕과 새 용사가 나타난다는 것도 마족의 수명의 길이와 다음 세대로의 긴 권력다툼, 인간의 짧은 수명과 용사가 세습이 아닌 점. 그런 것들에서 기인한 자연스럽고 우연적인 요소로 인한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없었지만. 일단 마법이든 연금술이든 있는 세계이고. 다른 인간에 비해 마력이 큰 용사가 그런 마법이나 연금술 같은 것에 의해 장수하게 되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경우가 없었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닌 것이다.
슬슬 정말로 그냥 장수하고 있는 것 뿐이라면 어쩌지?
그런 생각으로 치우치고 있는 때에. 지금까지 침묵하던 용사가 입을 열었다.

"그럴 리는 없어."

"네? 어째서요?"

"'그런'용사는 단명하거든."

순식간에 모두가 침묵했다. 바람소리도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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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1-29 19:18 | 조회 : 1,643 목록
작가의 말
양야

최근 트렌드 같은 느낌으로 화기애애한 용사와 마왕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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