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합 ] 시나브로 ( 기녀 X 양반집 아가씨 )



꽃, 나는 그녀를 이리 생각하였다.
시끄럽고 화려하며 언제나 말이 끊이지 않는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차분하고 맑은 눈을 가진 그녀. 녹색의 장옷을 걸치고있는 그녀는 마치 불모지에 피어난 한떨기 꽃처럼 눈에 띄었다.

" 저기, 아가씨? 여기 오실 분이 아닌거 같은데, 혹시 무슨일이신지? "

그녀는 장옷을 슬며시 내리고선 눈을 살짝 내리뜨며 말하였다.
이리 보니 속눈썹도 참으로 길고, 입술 또한 혈기가 도는 붉은 빛이니 참으로 아리따운 소녀로다.

" 미안하네만, 내가 이 시의 주인을 찾고 있소. 혹시 이 기방에 이 시를 쓴자가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소? "

그러면서 고이고이 접힌 종이를 내게 건내었다. 시의 내용은 별거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랑 시였다. 필체가 좋은 것도 아니고.

" 아무래도 저희 기방이 좀 크다보니, 이 시를 물어보기에는 조금 시간이 걸릴 듯 하옵니다. 제가 시간을 내어 아이들에게 물어볼테니, 다음에 다시 오는 것은 어떠십니까? "

" 아, 그래주겠소? 내 이 시의 주인을 찾으면 반드시 보답하리라. 정말 고맙소! 내일 술시에 다시 오리다. "

사실 물어볼 시간 같은거 없다. 내가 그리 한가한 몸도 아니고, 내 어찌 시간같은 것이 있겠는가. 당장 내일만 하여도 정해진 일과가 빼곡하다.

" 네에, 아가씨. 내일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참으로 고운 아가씨다. 저 흑색의 머릿결은 비단과도 같고, 흑색의 눈은 옥과 같으며 피부는 마치 진주같이 곱구나. 또 목소리는 어떠한가, 명기가 노래를 부르는 듯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었다. 웃는 얼굴을 한 번 보고싶으니 없는 시간도 쪼개야 겠구나.

ㅡ아무도 없었다.
이 기방에 있는 기녀들에게 모두 물어보았다. 일패, 이패, 삼패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도 모두 모른다고 한다면, 이 기방에는 아마 이 시의 시인이 없는 모양이다. 아가씨와 약속한 술시가 다되어 가는데, 아가씨가 찾는 시인이 이곳에 없다면 아가씨는 다시 다른 곳을 돌아다니며 영영 다시 못만날수도 있다. 그건 안될 말씀이다. 다른 기방에 갔다가 만일 험한 일이라도 당하면ㅡ

" 이보시오?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소? "

" 어? 아가씨? 벌써 오셨습니까? "

술시까지는 아직 좀 남았을 터, 이 아가씨는 가혹하게도 나에게 고민할 틈 조차 주지 않고 찾아오는 구나. 원래 꽃도 원할 때 시들거나 할 수 없으니, 꽃과 같은 인간도 마찬가지이겠지.

" 걱정마시게, 보채는 건 아니고 그저 당신과 조금 얘기를 나누어 볼까 하여 찾아왔네. 그대도 생전 처음보는 양반이 와서 시를 내밀고 찾으라 하였는데, 수상하지도 않소? "

" 이리오시지요. 아무래도 양반집 아가씨가 이 곳에 있으면 의심을 사지 않겠습니까? 혹여 아가씨네 집안까지 얘기가 퍼진다면ㅡ "

" 어이쿠, 어서 들어갑시다. "

어린 강아지같다. 가까이서 보니 눈매도 살짝 내려가 있는것이 순해보이는구나. 볼도 보송보송해보이고. 이런 소녀가 어찌 이리도 가엽게 혼자 돌아다니는지, 시종 하나 데리고 다니지 않는건가?

" 아가씨, 정말 죄송하지만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듯 싶습니다. "

고민의 답은 거짓말 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이 얼굴을 보지 않으면 마음이 영 좋지 않을 것 같았기에, 가장 쉬운 답인 거짓말을 하였다.

" 아... 역시 그렇소? 시간이 너무 모자라긴 했으니... "

아, 죄책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나에게 제일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첫째가 거짓말이고, 둘째가 아부이며, 셋째가 뻔뻔함이었거늘.

" 그러고 보니 아가씨는 시종 하나 두고 다니지 않으시던데, 혹시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신겁니까? "

" 혼자 다니는 것이 편하오. 그... 일단 감사의 의미로 조금 준비해보았는데. "

예쁘게 흰 비단에 쌓인 것을 건네어 주었다. 열어서 보니 어여쁜 나비가 달린 금빛 비녀가 있었다. 어찌 자신 같이 예쁜것만 줄까. 기특하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선물이다. 내 반드시 이 아가씨에게 비단신을 신겨주리라.

" 그, 기녀에게 꽃을 주는건 기만하는 행위라 들어 나비가 달린 것을 준비해봤는데... 괜찮소? "

" 참으로 아가씨처럼 아름답습니다. 너무 과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기쁩니다. "

" 아, 그,그렇소? "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솔직히 '' 그대는 농도 잘하오. '' 라던지, '' 그렇지도 않소~ '' 란 반응을 생각했는데 이건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와도 같은 모습이 아닌가. 나를 이렇게 또 당황하게 하다니, 능력도 참 좋구나.

" 그, 그럼 물건도 전해줬으니 이만 가보겠소. "

벌써? 간다고? 지금? 이렇게 가버린다면 다음날 아가씨의 얼굴을 어찌 봅니까. 이 분위기에서 가버리시면 저희 내일 어떤 얼굴로 봐야 하는 겁니까?

" 아가씨, 조금 더 담소를 나누다 가시지요. 벌써 가시면 조금 섭섭합니다. "

" 우리는 겨우 이틀밖에 보지 않았는데 그대가 어찌 섭섭한것이오? "

" 이 기방에서 아가씨같이 맑고 고운 사람을 어디에서 만나겠습니까? 양반집에 기예를 하러 가지 않는 이상, 기방에서 나갈 시간조차 없습니다. "

" 내가 그대를 많이 좋아해서 그대와 오래 얘기를 하면 마음이 너무 들떠 해서는 안될 얘기까지 할 것 같아ㅡ "

아가씨는 그제서야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챘는지, 입을 합 다물고선 그자리에 멈춰 섰다. 좋아한다는 과연 무슨뜻일까. 아가씨에게 좋아한다는 그저 편하기에 좋아한다, 라는 의미도 될 듯하건만. 반응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듯 하다.

" 아가씨? "

" ...방금 실언은 잊어주시오. 다음에는 그 때 말한 보상을 가지고 오겠소이다. 술시에 기다려 주시오. "

처음으로 맑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다면 그 좋아한다는 내가 생각하는 그 의미가 맞는 듯 하다. 내일, 내일이면 모든게 끝날 듯 싶다. 아가씨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이 기방에는 그 시인이 없다는 걸 알려주어야 겠지. 새삼 기녀로 살면서 사모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어왔는데, 지금 듣는다고 설렐일이야 되겠는가. 단지 상대가 조금 많이 아름답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아가씨일 뿐이지.



" 내 약속한 보상을 가지고 왔는데, 결과를 들려주었음 하오. "

" 참으로 죄송하오나, 이 기방에는 아가씨가 찾으시는 시인이 없는 듯 하옵니다. 아마도 다른 기방인듯 하옵니다. "

" 아, 그렇소. "

맑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 씁쓸한 눈이 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내가 보이던 눈은 저런 흔한 눈이 아니었다. 아주 맑고 고운 눈이었는데 왜 저렇게 바뀐것일까. 나 때문에? 어제 그 실언때문에? 혹은 집안에서 기방을 들낙거리는 걸 알아챈것일까?

" 그, 미안하오. 내 그대에게 거짓말을 하나 했소이다. "

" 저도 아가씨에게 거짓말을 하나 했습니다. "

" 사실 내가ㅡ "

" 사실 어제 이미 기녀들에게 모두 물어보았습니다. 아가씨를 오늘 다시 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였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후회하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거짓말이었던 모양입니다. "

아가씨는 멈추었다. 그 씁쓸한 눈은 서서히 맑아져 나를 올곧이 담고있었다.

" 그대의 이름조차 모르지만, 그대와 오래 만난것도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그대를 지켜봐왔소. 시조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참으로 꽃과 같아서 그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소이다. "

진채화처럼 붉게 물들어 간다. 꽃과 같은 사람이 나에게 꽃과 같다 말하는데 어찌 설레지 않을 수가 있는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도 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나를 사모한다 말하고 있는데 어찌 설레지 않을 수가 있는가.

살포시 맞대었다. 아가씨가 말을 하는 걸 끊어버렸지만, 그 말하는 입술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기에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였다. 불모지에 핀 꽃은 내가 꺾어 화병에 넣었으나, 꽃이 나에게 꺾인 것에 후회없도록, 영원토록 함께하여 주겠노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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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11-17 21:42 | 조회 : 372 목록
작가의 말
수이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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