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태산

평강은 가쁜 숨을 들이쉬며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옥주가 들어왔다.

“세상에나, 공주님! 아직도 그대로 계시옵니까? 어서 환복 하셔야죠! 폐하께옵서 예정보다 속히 환궁하신다 하옵니다.”

“알겠어, 그런데 소랑의 답장은?”

평강은 옥주에게 자신이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을 숨기려고 최대한 숨을 천천히 쉬면서 슬그머니 볼에 손을 대었다. 상처 난 것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예. 도령이 답장을 어찌나 오래 쓰시던지 기다리다 똥줄 타 죽는 줄 알았사옵니다.”

평강이 옥주가 공손히 건네는 편지를 받아들자 옥주는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겠다며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편지는 보드라운 분홍색 비단 편지봉투에 들어 있었다. 편지봉투를 여니 정성스럽게 접은 새하얀 종이가 평강을 마주했다. 평강은 편지를 펴 보았다.

?…….?

평강은 눈을 깜빡였다. 갓 만든 것 같은 종이의 윤기만이 평강을 맞이했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보낸 편지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하하하!”

평강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에 평강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하하, 하, 후.”

겨우 웃음을 멈춘 평강은 다시 한 번 답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잘 아는 친구가 있을까, 평강은 답장을 원하지 않았다. 단지 옥주와 떨어져 있을 시간을 원했다. 평강은 편지를 다시 접어 비단 편지봉투 안에 다소곳이 넣었다.

“공주님!”

옥주가 옷을 가지고 서둘러 들어왔다.

“공주님,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폐하께옵서 궁에 벌써 당도하셨어요.”

옥주는 평강의 옷을 갈아입히며 부선을 떨었다.

“자, 이제 머리를 묶겠나이다.”

평강이 참빗을 들어 올려 평강의 머리카락을 빗으려는 순간, 평강이 잽싸게 몸을 빼내 빗을 피했다.

“아, 아니, 오늘은 그냥 푸르고 있을게.”

평강은 고개를 옆으로 숙여 머리카락이 상처자리를 덮도록 하며 서둘러 말했다. 옥주가 의아해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옥주를 놔두고 평강이 서둘러 일어셨다.

“어서 와. 아버님께 가야지!”

옥주도 의아해하던 것을 멈추고 곧바로 일어났다. 평강과 옥주는 뛰는 듯 걷는 듯 궁을 가로질러 중문으로 막 들어오던 평원왕을 보고 걸음과 옷매무새를 다시 살폈다. 그리고 평원왕의 앞으로 얌전히 나갔다.

“아버님, 다녀오시었사옵니까.”

평강이 평원왕에게 다소곳이 인사하자 평원왕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냐, 너도 오늘 별 탈 없었느냐.”

그 말을 듣고 어딘가 찔린 평강은 이미 머리카락으로 가린 상처에 괜히 손을 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왜 오늘은 머리를 묶지 않느냐?”

“예? 아, 그, 그것이, 머리카락이 묶으면 아프다고 울기에 불쌍하여 묶지 않았사옵니다.”

평강이 자기가 듣기에도 괴상망측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옥주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운다고? 하하하! 넌 머리카락까지 잘 우는구나! 정말이지 너무 울어서 사대부 집안에서 널 대려가련지 모르겠다. 이러다 정말 바보온달에게 시집가는 것 아니냐?”

평원왕이 크게 웃으며 말했고, 평원왕 뒤의 수행원들의 표정에서도 웃음을 참는 것이 들어났다.

“아! 버! 님!”

평강이 그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나무에 있던 새들이 날아가고, 수행원들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리고, 가까이 있던 평원왕은 서둘러 귀를 막으며 물러났다.

“자꾸 놀리시면 진짜로 울겠습니다!”

평강이 아주 정색을 하고 말하자 평원왕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휴, 이제 목소리좀 줄이거라. 곧 혼인할 녀석이……. 낭군의 귀에 대고도 그리 악을 쓸 작정이냐?”

평원왕은 평강을 만나서 잠시 멈추었던 발걸음을 재촉하였고 평강도 따랐다.

“낭군이 아버님처럼 놀리면 귀에 대고 고함을 지를 것이옵니다.”

평강이 뾰루퉁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좀 죽이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평원왕은 깊은 한숨을 쉬며 혼잣말로 ‘걱정이구나’를 반복했고 평강도 혼잣말로 ‘어련하시겠어요’를 반복했다. 그렇게 걸으며 모퉁이를 돌자 평원왕에게 인사드리러 가던 왕자 일행과 마주쳤다.

“아버님! 다녀오셨사옵니까.”

대원, 대양, 건무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래, 너희도 서로 대련한다더니 많이 하였느냐?”

“예, 역시 건무의 검술은 뛰어넘을 수가 없더라고요.”

대양이 건무를 곁눈질하며 말을 툭 내뱉었고 건무가 그 말을 듣고 약간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오, 건무의 검술실력이야 어렸을 적부터 대단했지. 조만간 대장군 하여도 괜찮을 듯하구나.”

“과찬이시옵니다.”

건무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말했다. 나름 진지해 보이려고 웃음을 참은 것 같았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가 있었다. 대양은 그런 건무를 보면서 어깨를 살짝 으쓱하더니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게 코웃음을 쳤다.

“아버님, 장안성 건설 근황은 어떻사옵니까?”

평원왕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대원이 물었다. 그 말을 들은 평원왕이 고개를 살짝 돌려 대원을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건설은 중지다.”

“예?”

왕자 셋이 모두 놀라 일제히 대답했다. 평강도 놀라서 평원왕을 쳐다보았다.

“곧 가을이다. 수확 철이고. 농사일이 바쁠 때 남자가 없으면 얼마나 힘들겠느냐?”

왕, 공주, 왕자, 수행원의 긴 행렬은 어느덧 편전 앞까지 와 있었다.

“내가 계획보다 일찍 환궁한 것은 회의를 소집하여 이 사실을 발표하기 위해서다.”

평원왕이 결연하게 말한 후 편전 앞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왕자와 수행원이 그 뒤를 따랐으나 평강은 옛날과 달리 옆으로 비켜 행렬이 지나가도록 자리를 양보했다.

‘장안성 근처 땅을 산 귀족의 반발을 누를 수 있을까?’

평강의 걱정을 뒤로하고, 일행은 마지막 수행원까지 전부 편전으로 들어갔다. 이미 편전 안에 전부 모인 신하들과 회의를 시작할 것이다. 평강의 곁에는 옥주만 남아 있었다.

“공주님, 이제 처소로 가시지요.”

옥주가 조용히 말했다. 평강은 편전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울며 떼쓰던 어릴 적 일이 바로 전 일처럼 생생했다. 자신이 울기 시작하면 나무에 앉아있던 새가 전부 날아가고 말리던 문지기와 궁인이 귀를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매번 그렇게 울자 평원왕은 아예 어전회의 때마다 평강을 대리고 들어갔다. 평강의 울음 때문에 회의가 끊기는 것을 싫어하던 신하들은 별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소랑의 조언대로 울을 장소로 썼을 뿐이었지만, 평강은 그곳에서 궁궐 밖 세상을 만났다. 그것은 건무가 흘리듯 말한 바깥보다 훨씬 매력적인 것이라서, 더더욱 평강이 바깥은 보고 싶게 만들었다.
바람이 불어와 평강을 쓰다듬었고, 평강은 그 손길에 기분이 좋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옥주.”

“예, 공주님.”

“나 또 울어 볼까?”

옥주가 입을 쫙 벌렸다. 그리 멀지 아니한 거리에 서 있는 문지기들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왠지 나무에서 새 몇 마리가 날아갔다.

“고, 공주님, 진담이시옵니까?”

“농담이지.”

평강이 살짝 혀를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문지기와 옥주가 차례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왠지 새 몇 마리가 나무로 다시 날아왔다.

“이제 가자.”

평강이 발걸음을 돌리자 옥주가 그 뒤를 따랐다.

‘어느 새 혼인할 나이가 되어버렸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는 그대로인데.’

평강은 평소 가지 않던 궁 가장자리 담으로 향했다.

‘나도 이제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하는구나. 어른스러운 것은 뭘까?’

자박자박.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그런지 평강과 옥주의 발소리가 들렸다. 평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하늘은 높고, 넓고, 따뜻했다.

‘대원 오라버니는 누가 봐도 어른스러워. 다음에 왕위에 오를 것이고, 그 때 이루고 싶은 목표-백성이 살기 좋은 나라 만들기-를 정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지.’

그 때 궁 바깥에서 자그마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노랫소리는 궁벽을 넘어와 옥주를 뱅글뱅글 돌고 폴짝 뛰어 평강의 어깨 위에 올라타 귓가를 간질이며 속삭였다.

“태사~~~안이~~ 높~다 허되~”

“공주님, 이게 온달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처음 들어보시지요?”

평강은 옥주가 자신이 이미 바깥에서 온달의 각설이 타령을 들은 것을 모르기 때문에 긍정을 하지 않았지만 부정하기에는 찔려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간 웃기만 했다.

“하느을~~ 아~래~~ 뫼이로다~~~”

평강은 걸음을 멈추고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소리가 작아도 말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평강의 귀에서 울려 퍼졌다. 평강은 눈을 감고 감상하기 시작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읎건마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허드라~~~~”

노래가 끝나고 약간의 박수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평강이 눈을 뜨고 옥주에게 물었다.

“옥주, 저거 무슨 노래야?”

“글쎄요, 저도 처음 듣는 노래이옵니다.”

평강은 아까의 대사를 곱씹어 보았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나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어른이 될까?’

평강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는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아까부터 평강을 바라보던 파랗고 따뜻한 하늘이 평강의 머리 위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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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2-03 23:15 | 조회 : 1,135 목록
작가의 말
nic44603312

시조는고려후기에생겼으니옥주와평강이처음듣는것은당연합니다. 다음화는설이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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