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야! 난 뭐 안 바쁜 줄 아냐? 난 검술연습 중이었다고! 근데 큰형님은 즉위식 준비로 바쁘고 누님은 혼인준비로 바쁘고 작은형님은 너랑 좀 어색해서 아버님께서 ‘나한테’ 부탁하셨다고! 우리 둘이 친남매라 그래도 친하다고…….”

분한 얼굴인 평강의 눈은 어느 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고, 그걸 본 건무는 한껏 소리치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평강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흐…흐흑…….”

“야, 잠깐. 야, 아니, 너 왜 울어? 넌 내 발 밟았잖아! 설마, 바보온달하고 혼인하라는 말 때문이냐? 잠깐, 그 말 아버님께서도 들었잖아. 그 땐 아무 말도 없었다더니 왜 나한테만 그래? 이제 그만 좀 울지? 에이씨, 알았어! 미안하다, 미안해!”

건무는 평강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점점 울음으로 바뀌며 커지는 것을 보면서 빠르게 말했고 평강은 건무의 사과를 듣자마자 곧장 웃음을 지었다.

‘이야, 정말 울음이 편하긴 편하구나!’

건무는 갑자기 웃는 얼굴로 변하는 평강의 얼굴을 어이가 없다는 듯 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야, 근데 아버님께서 저녁에 오신다고 하시면 그냥 가지, 뭘 굳이 편전까지 들어가냐?”

“치, 저녁에 오신다고 하시고 아니 오신 게 벌써 몇 번인데, 그걸 믿으라고? 아버님 미워! 왕이면서 약속은 하나도 제대로 안 지키고.”

“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단 말이야! 아버님 귀에 들어가면 경을 칠라.”

건무가 흥분한 평강의 손을 잡아 앉히며 조용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지만 평강은 건무의 손을 뿌리치고 전혀 아랑곳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들으라면 들으라지! 만약 듣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반성하면 성군이고, 날 혼내면 폭군이지! 벽에 붙은 귀! 아버님께 이 말도 같이 전해라…읍!”

결국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하는 평강을 입을 건무가 손으로 막아 버렸다.

“얘가 왜이래? 아버님께서 관심 안주시는 것이 그렇게 한 맺히는 일이냐? 내가 밖에서 놀아 줄 테니 그만 해라.”

건무는 서둘러 평강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방 안의 소리를 다 들으며 소리죽여 웃고 있던 시녀들도 서둘러 표정을 고치고 평소처럼 자신의 주인을 따랐다.

“너, 맨날 내가 하는 검술훈련 하고 싶다고 했지? 그럼 오늘 해봐.”

한숨 돌린 건무가 평강의 처소를 나와 궁궐 벽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나무의 이파리가 갈색 빛을 띠며 떨어질 준비를 하고,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는 가을날이었지만 따사로운 햇살이 남매의 머리를 비추었다. 평강은 기분이 좋았다. 조금 걷다 보니 아까 소랑과 만났던 모퉁이가 나타났다.

“오라버니, 나 아까 친구 생겼어.”

“아, 그래? 이름이 뭔데?”

“소랑.”

“소랑? 누구? 궁녀야?”

평강은 빙글빙글 웃었다. 그가 치마를 붙잡고 한 바퀴를 돌자 치마도 빙글빙글 펴지며 동그라미를 만들었고, 그의 긴 머리카락도 머리의 동선을 따라 같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비-밀.”

빙글빙글 돌기를 멈춘 평강이 건무를 쳐다보며 혀를 내밀었다.

“어쭈, 그러면 내가 못 알아낼 줄 알고? 내가 그 소랑이라는 놈 찾으면 다시는 고개 못 들고 다니게 아주 괴롭힐 테다.”

건무도 같이 혀를 내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잉, 안 돼! 알았어! 상부 고씨 종손 댁 차남이다! 흥, 뭐, 오라버니랑 만났다고 소랑이 오라버니한테까지 관심 끄는 법을 알려줄 만큼 입이 싼 것도 아니고…….”

평강의 말을 듣던 건무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자 건무를 쳐다보며 말하던 평강은 말꼬리를 흐리다가 말을 멈추었다. 평강은 침을 꼴깍 삼켰다.

“왜, 왜 그래?”

“그러니까 상부 고씨 종손 댁이면……국상 어른이지? 거기 차남이면 국상 어른의 아드님이? 그 애를 여기서, 궐 안에서 만났다고?”

“응…….”

건무의 목소리를 칼을 세운 듯 날카로웠다. 평강은 처음 들어보는 건무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주눅 들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꼼지락거리며 흘끔흘끔 곁눈질로 건무를 바라보았다.

‘원래 궁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 그런데 아들을 마음대로 데리고 왔다고? 그만한 아이가 궁에 들어오려면 왕자나 공주의 친구 자격이거나 궁에서 출퇴근하는 시동일 경우밖에 없어. 하지만 지금 이 울보 녀석은 친구 자격의 아이가 없지. 그럼 마음대로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는……?’

건무는 평강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설마, 둘째도 공주랑 결혼을 시키려고? 애초부터 그럴 목적으로 궐로 대리고 왔나? 서로 친해지게 하려고? 하긴 국상이면 마음대로 아들정도 데려왔다 해도 무어라 할 사람도 없고, 할 수도 없을 테지. 대체 언제까지 권력을 놓지 않은 생각이야?’

“오라버니, 혹시 뭔가 잘못 되었나요?”

평강의 말소리가 생각의 바다 깊숙이 빠졌던 건무를 끄집어내었다. 건무는 평강의 얼굴을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던 멍한 초점을 제대로 잡고 다시 평강을 바라보았다.

“야, 너 이럴 때만 존대하지 마라.”

건무가 평강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마구 문질렀다. 그러자 단정히 묶어 놓았던 평강의 반묶음 머리카락이 견디지 못하고 비죽비죽 산처럼 솟아올랐다.

“악! 하지 마!”

평강이 작은 손으로 건무의 손을 밀고 머리를 지키려 했으나 일곱 살이나 차이 나는 오빠의 손을 이길 수 없었다.

“이거 봐라. 바로 반말로 바꾸네!”

건무가 씨익 웃으며 다시 검술 연습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이 씨, 진짜, 오라버니 때문에 머리가 엉망이잖아!”

평강이 잰걸음으로 따르며 말했다. 그 말에 건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왜, 백두대간같이 웅장한 머리구만.”

아직도 씩씩거리는 평강이 자신을 따라올 때까지 잠시 멈춰선 건무는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저번에는 아버님의 즉위식이 있어서, 이번에는 큰 오라버니 태자 즉위에 언니의 혼인까지 합쳐져 한참 부모에게 사랑받아야 할 시기에 하루 대부분을 혼자 있어야 하는 동생이었다.

“왜 그렇게 봐.”

건무의 옆에 도착한 평강이 아직도 씩씩대며 말했다.

“그냥. 우리 예쁘고 귀여운 동생아.”

“허, 참, 뭐래?”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건무에게 평강이 똥 씹은 표정으로 답했고 건무는 평강에 맞추어 약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검술 연습장에 도착하자 뒤따라오던 시녀들이 문을 열었다.

“있잖아 오라버니, 내가 아까 편전 회의에 들어가서 들은 말인데, 백성이 헐벗고 굶주려 있대. 그런데, 얼마나 못 살기에 구휼까지 필요해? 그리고 백성은 왜 못 살아? 아버님이랑 신하들이랑 엄청 노력을 하는데.”

평강의 말에 건무의 눈썹 한 쪽이 살짝 올라갔다. 궁금증이 가득 담긴 평강의 눈이 건무를 굉장히 부담스럽게 쳐다보았다.

“음, 넌 궁 밖에 한 번도 못 나가봤으니까 내가 말해도 잘 이해하지 못할걸? 네가 어리기도 하고. 나중에 시집가서 밖에 나가면 직접 알아봐. 나한테 대충 듣는 것 보다 그게 더 좋을걸.”

좋은 대답을 찾은 건무가 기원한 물 한 그릇 마신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선 여전히 호기심에 가득 찬 평강을 뒤로 하고 훈련장의 모래밭으로 달려갔다. ‘밖에 나가면 직접 알아봐’ 라는 말이 평강의 마음에 얼마나 큰 불씨를 놓은 것인지 알지 못한 채.

0
이번 화 신고 2016-01-26 21:35 | 조회 : 1,134 목록
작가의 말
nic44603312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