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보

“소랑, 저를 보내 주십시오.”

소랑은 평강의 앞에서 아무 것도 담지 않은 눈으로 평강을 내려다보았다. 메마른 바닥에 앉은 평강의 무릎에 자는 듯이 누운 사내가 있었다.
사내를 바라보는 평강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평강의 무릎의 베고 누운 사내의 얼굴로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사내의 얼굴로 떨어지는 눈물방울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소랑은 아무 말 없이 칼을 빼들어 공주를 겨누었다. 그 때 바람이 불어왔다. 평강, 평강 무릎의 사내, 평강 앞에 선 소랑의 머리칼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평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평강과 소랑의 두 눈이 마주쳤다.







평강이 모퉁이를 돌자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부자(父子)의 모습이 보였다.

“국상 어른!”

의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국상이 뒤를 돌아보자, 평강이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국상이 허리를 굽혔고, 옆에 서 있던 그의 어린 아들도 얼결에 허리를 굽혔다.

“공주님, 오래간만에 뵙사옵니다. 저번에 뵈었을 때 보다 많이 자라신 것 같사옵니다.”

국상은 어린 평강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안 그래도 오라버니께서 제 키가 안 큰다고 놀려서 진짜 안 크면 어쩌나 걱정하던 차에 다행입니다.”

“하하하, 왕자님께옵서 장난으로 하신 말씀일 터인데, 크게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참, 소개가 늦었습니다. 제 아들놈인 소랑이라 하옵니다.”

국상이 자신의 아들의 등을 가볍게 치자 멍하니 평강을 바라보던 소랑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상부 고씨 종속 댁 차남 소랑이라 하옵니다.”

국상을 쳐다보던 평강이 고개를 돌려 소랑을 바라보자 허리를 펴고 다시 평강을 바라보려던 소랑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소랑을 빤히 바라보던 평강은 이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안녕! 나는 고구려의 25대 왕 고양성의 막내딸 평강이야. 만나서 반가워!”

그렇게 말한 평강은 소랑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 소랑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얼결에 손이 잡힌 소랑의 얼굴이 바알갛게 달아올랐으나 평강은 눈치체지 못하였다.

“난 여섯 살이야! 너는?”

“저는 올해 여덟이 되옵니다.”

소랑이 잔득 긴장한 채 말했다. 뒤의 시녀가 만류하자 평강이 손을 놓긴 했지만 긴장은 여전히 소랑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국상이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면, 공주님과 나이차이도 별로 나지 아니하고, 곧 공주님과 사돈이 되어 더욱 가까워질 사이가 아니옵니까. 저희 아들놈과 동무가 되어 주시면 어떠하옵니까?”

“아, 아버지!”

“예! 그럴게요!”

당황한 소랑이 아버지를 부름과 동시에 평강이 답했다.

“맨날 궁 안에서만 지내서 심심했는데, 진짜 잘됐다. 우리 잘 지내자!”

평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소랑은 다시 평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던 국상은 입에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공주님, 저는 어전 회의가 있어 가야 할 것 같사옵니다. 그 동안 제 아들놈과 같이 있어달라고 감히 부탁드리옵니다.”

“국상, 걱정하지 마셔요! 마침 무료했는데, 놀 동무가 생겼으니 이쪽에서 감사드려야지요.”

“정말 감사드리옵니다. 소랑, 공주께 폐 끼치지 말거라.”

“예, 아버지.”

국상은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평강에게 인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소랑, 아까 국상 어른이랑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평강이 소랑을 보며 묻자 소랑이 얼른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별말 아니옵니다. 나중에 저도 궁에서 일할 터이니 궁의 지리나 익히라고 이곳저곳 안내해 주셨지요.”

“그래? 아버지가 관심을 많이 주시나 보네. 부럽다.”

평강은 국상이 사라진 방향에 있는 편전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평원왕이 편전으로 행차하는 것이 보였다.

“예? 폐하께서도 공주께 관심을 많이 주시지 않사옵니까? 막내시라서 가장 예뻐하실 텐데…….”

그 말에 평강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글쎄……. 아버님께서 날 예뻐하시는 것은 맞지만 곧 너희 집안과 있을 언니의 혼인도 있고, 오라버니 태자 책봉식도 얼마 남지 않아서 나한테는 관심이 없으셔.”

평강은 한숨을 쉬었다. 평강의 입에서 나온 숨결이 살랑살랑 바람을 타고 소랑에게 닿았다. 소랑이 평강의 입김을 숨결이 닿았다고 느낄 수 있을 만치 가까이 있지는 않았지만 소랑은 숨결이 닿았다고 느낀 곳에 손을 대었다. 약간 쌀쌀한 가을바람 때문에 차가운 손의 냉기가 느껴졌다.

“그러면 공주님, 우는 것은 어떨까요?”

소랑이 말하자 평강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울라고?”

“예. 공주님께선 굉장히 바르고 얌전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신다 들었사옵니다. 그리하면 공주님께서 잘 하셔서 폐하께서 관심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됩니다. 만일 한 가지 정도 결점을 만들면 폐하께서 조금 더 신경을 쓰시지 않을까 사료되옵니다.”

평강은 소랑의 말을 듣고 회의가 한창인 편전을 바라보았다.




“폐하, 지금 가장 걱정인 것은 후주이옵니다. 저번 사신이 군사를 훈련하고 군비를 증강한다는 정보를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군사훈련과 군비증강은 어느 때나 하는 일 아니오? 폐하, 지금은 한강 유역을 뺏어간 신라를 경계해야 하옵니다!”

“아니, 경은 요즈음 흉년으로 백성의 구휼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을 모르시오?”

평전은 갑론을박을 펼치는 신하로 시끄러웠다. 그것을 가만히 듣는 평원왕의 미간이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그만! 다들 조용히 하시오. 애초에 나라에 문제가 하나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이고, 어떤 문제를 중점으로 하느냐도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른 법이오. 좀 타인이 의견도 수용할 줄 아시오.”

평원왕이 옥좌의 손 받침대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말하자 편전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수많은 신하 사이로 정적이 퍼져나가는 가운데, 누군가 조용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신 국상이 한 말씀 올리게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신하의 눈길이 그 말을 한 신하에게로 쏠렸다. 평원왕의 눈도 자신의 허락이 떨어지기 기다리는 한 신하에게로 돌아갔다. 이 나라 고구려에서 가장 높은 신하, 국상이었다. 평원왕의 주먹을 쥔 두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말씀 해 보시오.”

살짝 떨리는 입술에서 나온 조용한 말은 편전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국상이 막 입을 때려는 순간, 편전 바깥에서 커다란 울음소리가 울렸다.

“으아아앙~!”

평강은 편전 앞의 문지기 앞에서 귀청이 떨어지게 우렁찬 목소리로 울고 있었다. 생각보다 우렁찬 울음소리에 약간 놀랐지만 만족스러울 만큼 시끄러운 울음소리에 소랑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재빨리 문지기의 시야에 들지 않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아아앙~! 나도 들어갈래!”

평강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을 쳤다.

“공주님, 여기서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한편, 입을 열려다 평강의 울음소리로 입이 막힌 국상은 한숨을 내쉬었고 조용하던 편전 안은 평강의 울음소리와 함께 두런두런 말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거기 무슨 일 이느냐?”

평원왕이 문지기를 불러 말했다.

“아, 막내 공주님께옵서 폐하를 뵈러 편전에 들어가고 싶으시다 하옵니다. 별 일 아니옵니다.”

별일 아니라기에는 좀 큼 소리-평원왕은 문지기에게 상황을 물을 때 소리를 많이 높여야 했다. -였지만, 평원왕은 평강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허나 평강은 목소리를 절대 죽이지 않고 편전은 여전히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평원왕은 슬슬 평강의 목이 상할까봐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경들은 잠시 기다리시오. 내 공주를 달래고 올 터이니.”

평원왕이 좌우로 갈라 선 신하들의 한 가운데를 지나 편전 밖으로 나가자, 평강을 막고 있던 문지기들이 경례 자세를 취하며 곧장 과우로 갈라졌고, 평강이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아버님!”

평원왕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여섯 살의 작은 공주를 번쩍 안아 올렸다.

“공주야, 너답지 않게 어찌하여 그러느냐.”

“아버님, 보고 싶어서 왔어요.”

평강이 아직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래, 내가 요즈음 공주에게 신경을 써 주지 못했지.’

평원왕이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 회의 끝나고 이따가 같이 놀아 주마. 그래, 우리 공주는 책 읽어 주는 것을 좋아했지? 조금만 기다리려무나. 내가 역사서라도 읽어주마.”

“싫어요! 지금 읽어 주시어요.”

평강이 도리질을 했다. 그러자 평원왕의 미소가 약간 일그러졌다.

“어허, 그럼 나랏일을 못 하지 않느냐. 조금만 기다리어라.”

“싫습니다! 그러면 편전에 데리고 가 주시어요!”

평강이 다시 도리질을 하자 평원왕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허! 일 울보에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그 잠깐의 시간을 못 참느냐? 네게는 바보온달이 신랑으로 어울릴 정도로구나! 자꾸 그러면 넌 사대부에 시집보내지 않을 테다!”

“으아아앙~!”

평원왕이 버럭 지른 소리에 도전장을 내밀 듯 평강이 또다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편전 앞 나무에 앉아있던 새들이 그 소리에 전부 날아갔다. 평원왕은 순간 자신의 귀가 새와 함께 날아가는 줄로 착각하였다.

“알았다, 알았어! 네가 이겼다. 편전에 데리고 들어가마. 대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

“예!”

평원왕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평강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휴, 이리 말을 안 들으니 넌 정말로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쓰겠다!”

평강은 바보온달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고 얼굴에는 마냥 함박웃음이 피었다.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소랑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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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1-13 21:50 | 조회 : 1,217 목록
작가의 말
nic44603312

조선시대라면 공주마마라고 부르겠지만 '마마' 라는 말은 고려 후기 원나라에서 들어온 말입니다. 국상은 고구려에서 가장 높은 직책입니다. 틀린 정보 있으면 제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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