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제 2차전-무언의 빛, 그리고 판(2)



“로즈마리네.”

가온이 중얼거렸다. 작은 잎과 보랏빛 꽃잎을 가진, 그 꽃은 이내 마치 처음부터 그 판에 존재했던 것처럼 새겨지며 자그마한 빛을 바랬다.

‘......어머니?’

그것은 마치 유안이 보여준 기억의 어머니와도 같은 것이라서, 시연은 속으로 의아함을 느꼈다. 왜 하필, 저 꽃일까. 그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망막에 맺혔다. 율, 가온, 혜민, 아리엘, 연우, 그리고 에드윈. 그들은 시연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로즈마리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부디 서로를 믿길.]

왜 지금 이 말이 생각나는 것인지. 그는 머리를 내저어 잡념을 떨쳐냈다.

가온의 말 이후로 무거운 침묵이 잠시간 감돌았다.

“......완전히 채워진 ‘판’은 무언의 빛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것이 이 게임의 끝이다.”

그것이 이 게임의 끝. 1차전이 시작하기 전, 유안이 말했던 규칙.

“하, 그 빛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매일같이 케이사들이 무언의 빛으로 흩어지는 걸 봐왔던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잊지 않았다. 이 게임의 목적은 솎아내기다, 라는 말이 거짓이라는 걸. 율은 말했다. 이 미친 촌극은 단순히 우릴 몰살시키려는 것 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우린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십 단위, 백 단위로 죽였어.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이 뭐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평생이라고 생각되는 시간 동안 살아왔던 이 ‘세계’가, 뭘 위해 존재하는 거지?

거센 바람이 제어되지 못한 체 거대한 숲은 감싸 안고 지나갔다. 리라의 나무는 청명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시연은 다시금 친구들을 바라봤다. 그들 모두가 지쳐있음이 확연이 들어났다. 지독한 허무감에 빠져 있는 것 또한.

피로 점철된 폐색이 들어난 곳에서, 그들은 내일을 기약하며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시연도 그것을 보며 돌아섰다. 그리고 한 공작님과 마주쳤다.

산만하게 움직이는 올리스들 속에서, 에드윈은 미동도 없이 물의 올리스와 마주했다. 그는 얕게 찌푸리며 입매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러면서 입 모양으로 뜻을 전했다. 그의 진지한 눈빛에 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움직였다.


//


“그들에 대한 복수랄까.”

“......복수라고, 당신이?”

-살아 있어.

유안이 웃으며 자랑하듯 내보인 그것은, 방 한 구석을 가득 매운 화면들이었다.

“봐, 아가씨. 네가 그토록 원하던 그들의 행방을.”

화면에 나타난 그 모습들은 소녀가 간절히 바란 것.

-그가, 살아있어.

그것으로 소녀는 일말의 희망을 보였다.

“명확한 것은, 레이첼 에이로나. 너는 그들과 함께 있어선 안 돼.”

그러나 희망을 부여잡은 대가로 얻은 것은 지독한 무기력함일 뿐.

유안은 높다란 은색의 구조물 위에서 자신의 인형을 내려다본다. 아름답던 그의 유리 인형이 금이 가는 것을 웃으며 바라보지만, 결국 그 결말은 자신의 것이라서.

“네가 결말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변수는 오직 하나 뿐.

“과거처럼, 너는 남지 말았어야 해.”

과거의 재현을 원한 소년이 결코 같은 결말을 원한 것은 아니니까.

“...과거?”

“내가 올리스의 게임을 왜 시작했는지, 왜 너의 후견인이 됐는지, 그리고 네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 꼬마 아가씨?”

“그것이, 그 모든 것이 겨우 ‘과거’ 때문이라고?”

유안의 옆에 장식처럼 자리하고 있던 와인 병이 떨어지며 은색의 구조물에 부딪쳐 깨진다.

“겨우?”

그 잔해에 본능적으로 소녀의 올리스가 발동되며 몸을 방어한다.

“과거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가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야, 레이첼. 위협에 자신을 방어하기만 급급한 이에겐 더더욱.”

그 때문에 유안이 앉아있는 그곳은 마치 피를 뒤집어 쓴 듯 붉어서.

“지켜보렴. 너의 소중한 이들이 네 앞에서 어떻게 될지.”

소녀는 뒤돌아선 아이의 모습이 자신과도 같다고 느꼈다.


//


갇혀진 이 세상 속에서, 언제까지나 이 일상이 유지될 것이라 믿었다. 지금은 아득히 멀리 느껴지는 나무를 처음 발견한 날에도. 생각해보면 늘 그랬듯 잔인한 이 학교에서 이곳은, 이 공간 안에서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었다.

나는 이름이 아로새겨진 네게의 의자들 중 하나에 앉아 율이 불러온 바람을 느꼈다. 이제 마지막 한 걸음을 앞두고 있다. 내일 판을 들고 무언의 빛에 간다면 게임은 끝날 것이다. 미약하게 생겨나는 작은 불안감에 손을 내려다봤다. 이윽고 손에는 세 게의 빛이 떠올랐다.

빛, 불, 그리고 식물.

늘 궁금했다. 상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불과 식물이 왜 둘 다 내게 있는지. 이 의문이 가장 먼저든 것은 먼 옛날 이 거목을 발견한 날이었다.

아, 씁쓸한 기분이 든다. 과연 지금도 이 장소는 가장 편안한가? 이제 이곳은, 게임이란 이름하에 무수히 많은 올리스들을, 케이사들을 죽인 곳이다. 이제 이 곳마저 내게 위안이 되는 곳인가? 어쩌면 처음부터 그럴 곳이 아니었을지도. 애초에 처음 봤을 때부터 어둠이 서려있었는데.

햇살이 쏟아지던 나무에게도 어둠이 내리고 달빛이 서렸다. 그것을 비참한 기분으로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잎으로 이루어진 장막을 걷고, 작은 발소리를 내며, 그렇게 달빛 속으로. 햇빛과는 또 다른, 기묘한 색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이 마치 기억과도 같았다.

소녀는 그곳에 서서, 하염없이 울었다.

서럽고 또 서러워서. 왜 나는 이곳에서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을 죽이고 있지? 그들이 죽어야 내게 한 움큼의 희망이라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한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없다. 그것 또한 소녀가 분명히 알고 있는 진실.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하며 귀를 때린다. 그것마저도 저가 죽인 이들의 울음소리만 같아, 소녀는 주저앉아 그저 공허함을 느꼈다.

그 공허함의 원인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끝나면?”

올리스의 게임은, 그들이 그토록 살기 위해 절규하던 그것은 아마 내일 끝날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고 해서 과연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모두가 그것이 단지 ‘솎아내기’가 아닌 것을 안다.

“이 게임의 목적이, 대체 뭐지?”

올리스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케이사의 습격을 막기에 급급했던 때 흐린 안개 너머처럼 뿌옇게 만 느껴지던 것이 비로소 크게 다가왔다. 내가 이토록 고통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체, 키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 길래?

문득 소녀는 주변이 온통 암흑이란 것을 깨닫는다. 달빛 한 조각 없는 숲속, 빛의 올리스는 그녀가 꺼버린 지 오래였다.

그 와중에 주저앉은 소녀에게 다가온 것은, 어느 기억의 단편이었다.

-죽었어......모두.

은발의 소녀, 리라는 예쁘장한 보랏빛 눈에 정확히 유안-키사를 담는다. 텅 빈 눈동자에 남아있는 것은.

-대체 왜, 왜 나만 살려둔 거야? 모든 절망의 끝을 보라고? 이것이 네가 계획한 거야?

오직 공허함이었다.

키사는 그저 차게 웃는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저 은색의 작은 소녀가 아니었다. 단지 그는 그가 초래한, 결투로 시작된 비극의 새빨간 피가 점철된 곳, 그곳을 무표정하게 응시할 뿐이다.

-이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나 하나 죽는다 해서 너에게 미치는 영향은 채 한 줌도 되지 않는걸 알아.

유안이 새빨간 은색 소녀를 비로소 돌아본다.

-하지만 알아둬, 네가 내게 부여한 올리스의 권능으로 이것이 결코 반복되게 두진 않을 거야.

그녀와 그녀의 친구의 피를 뒤집어 쓴 가련한 소녀가 절규하듯 외친다.

마침내 그와 그녀의 눈이 마주칠 때, 소녀는 마지막 말을 내뱉는다.

-이것이 내 죽음의 의미야.

그 순간, 모든 빛이 하나 둘 사라지며 마지막 빛이 사라지자 완벽한 암흑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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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7-31 23:18 | 조회 : 1,10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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