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engaged with a childhood fiance



뜨거운 햇살이 들이치는 프롤르네 가의 아카데미 내 사택, 그곳엔 두 아이가 있었다.

그곳이 어느 공작의 집무실임을 보여주듯, 고급스러운 목재책상 위 안경을 낀 소년이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한여름을 거부하듯 짙은 색의 커피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맴돌았다. 흑안의 눈동자는 매끈한 종이 위에 쓰고 있는 검은 글씨를 따라가며, 책의 내용을 옮겼다. 그에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또한,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고요하고도 무거운 이 방의 분위기는 한 청명한 소녀의 목소리에 깨졌다.

“에드.”

“왜.”

소년은 정중하게 대답하며 커피 옆에 놓인 다크초콜릿을 집어 들고, 입안에 넣어 녹였다. 그 모습을 보며 소녀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에스프레소와 다크초콜릿, 그거 먹음 키 안 크는데.”

“너보단 커.”

그 말이 무방하게도 둘의 키는 같았다.

“응. 좋겠네.”

그럼에도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 것은, 그 말의 의도가 비하가 아닌 그에 대한 걱정이었기 때문이리라.

“꽤 쓸 거 같은데.”

어른스러운 제 태도와 다르게 소녀의 입맛이 단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소년은, 그저 웃으며 반론했다. 어쩌면 지금 베끼고 있는 그 책과도 연관되었다.

“언제나, 모든 것에는 상대적인 차이가 있지. 빈민에게 느껴지는 금화 하나와 네게 느껴지는 금화 하나의 크기는 다른 거니까. 지금 먹고 있는 이것들 또한 내게 충분히 좋지만 너한테는 쓴 것처럼. 우습게도 그래.”

어쩌면 두 대귀족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대화라 할 만큼, 이들 사이에선 당연하게 논제로 넘어갔다.

또한 소녀의 눈빛이 서늘해지며, 소년의 말을 이었다.

“그 말은 어느 이에게 느껴지는 가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가?”

마치 제 아버지에게 느껴지는 소녀의 가치를 말하듯.

그에 소년은 선선히 긍정했다.

“응. 혹은 두 중요한 가치의 우열만이 다를 수도 있지.”

“그 예를 들면?”

“보통의 사람에게 우선시 되는 가치는 생존. 그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삼고 사는 이들도 있지. 하지만 희생이라는 이름 앞에, 다른 가치를 더욱 우선으로 매기는 자들 또한 있어.”

소년은 책을 덮었다.

그들이 각각 매긴 ‘가치’의 우열은 분명 달랐다. 그리고 소년은 그때로선 거의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쪽인데?”

그래서 그에겐 삶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주어졌기에, 혹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기에 사는 것일 뿐.

“후자의 쪽.”

그 담백한 대답에 소녀는 재차 물었다. 그건 왠지, 조금 슬퍼져서였다.

“그 말은 네게 생존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야?”

“......”

그러나 소년은 그에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다.

그 빛바랜 기억 위로, 소리 없이 새빨간 핏방울이 떨어져 잔상을 남겼다.


//


“윽......”

물밀 듯이 다가오는 피 비린내에, 나도 모르게 손이 코와 입을 막았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냄새만으로도 아찔해지는 감각에 온 몸이 떨렸다.

즉감적으로 한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이에 있었던 간극을 매우지 못했다. 처음 보는, 시체와도 같은 이들이 주위를 공격하며 아수라장이 되어 ‘나무’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 피는 바로 앞에 있다. 그것도, 내 몸에 흩뿌려진 체로.

그것을 깨닫는 순간, 누군가에 품에 안겨져 있던 나는 훅 꺼지는 느낌이 들며 벽에 세게 부딪혔다.

“레이첼 언니......?”

그제야 시야가 맑아졌다. 나를 떨어트린 건 그녀였다. 등 전채에서 뻐근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느새 멀어진 나와 언니의 사이는 퍽 멀었다. 오히려 시연 오빠랑 가까워 진 듯 하였다.

“아덴 에이로나, 너 어떻게든 아리엘 지켜.”

그 말과는 다르게 물기에 젖은 목소리. 그 작은 이질감에 원인을 찾아 헤맸다. 모든 것이 정신없었고, 이재 피 냄새는 사방에서 다가왔다.

“레이첼.......너 지금......”

“가!”

역겨운 피 비린내 사이에서, 그녀가 크게 외쳤다.

그 다급한 상황 속에서, 언니의 앞에 흥건한 피를 응시했다. 다음순간, 원인을 알아냈지만 이미 물에 의해 그 장소를 떠난 뒤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외면하려 했으나, 감히 그럴 수 없었다.

흐릿하면서도 선명하게 박힌, 한 소년의 모습이. 그가 나를 본 밤하늘과도 같은 눈빛이 그리도 강렬해서.

아, 나는 왜 이렇게나 미약한가.

어째서 이토록 누군가를 지켜줄 수 없는 것인가.


//


그 검은 에이로나에게 향한 것이었다. 그러니 내게 향해야 옳았다.

-웃기네. 그 어린 나는 용서해주지 않은 네가, 저 아이를 지킨다?

그 말 또한 옳았다. 불과 어제 내가 율에게 아리엘을 구하는 것이 어리석었다고 말해놓고선. 순간적으로 일어난 배신에도 결국 그 아이를 버리지 못했다. 그저 다가오는 검을, 바보같이 바라만 보았는데. 심지어 다가오는 그것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줄지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하......”

살과 뼈를 참혹하게 꿰뚫는 소리에,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선혈이 ‘나무’를 점철했다.

그래서 흘러나온 작은 신음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 것 이였어야 할 검 또한 나에게 닿지 못했지만,

분명 넘실대며 다가오는 혈향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건만.

그럼에도 난, 기어이 고개를 들어 나의 소년과 눈을 마주했다.

“......대체 네가 왜.”

어떻게 여기에.

“레이, 내가 말했지.”

한순간에 내 쪽으로 허물어지는 소년의 몸. 아득한 시야로 들어오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선택은 기이하게도 비현실적이라서.

“......난 후자의 쪽이라고.”

“야......”

에드윈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을 보면서도, 마치 누군가가 내가 말하는 듯이. 감히 움직이지 조차 못하고.

-넌 어리석어. 아무도 네 도움을 필요치 않아.

어째서.

-왜냐하면 넌 아무도 구할 수 없거든. 그저 힘없는 꼭두각시 인형 일 뿐. 웃기지, 꼬마아가씨. 그렇게 자존심 세워봤자 남는 것 없어. 어차피 여기에서 벗어 날 수 없으니까.

그것은 어릴 적부터 켜켜히 쌓여온 해묵은 자괴감.

-아직도 그걸 깨닫지 못했구나, 레이첼 에이로나. 네 유년시절, 그리고 행복은 네 어미가 죽었을 때 이미 끝난 거야. 어째서 ‘소년’은 이 보잘 것 없는 널 위해 희생하는 걸까?

그것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 그가, 지금 내 앞에 피를 토하며 힘없이 무너지고 있다. 나에게로 허물어지는 소년의 몸이 무겁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서늘한 눈을 지닌 이안다스는, 더 이상 공격하지도 않지만 경계를 풀지도 않았다.

네가 옳다.

나는 어리석었다.

이제야, 나는 뒤늦게도 내 약혼자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깨닫는구나.

-거짓말. 그건 아닐 텐데.

세로완이 나에게로 걸어오지만 움직이지도 않는다. 바보처럼. 그럼에도 끈어질 듯한 가는 숨소리가 내 어깨에 기대고 있는 소년에게서 불규칙적으로 흘러나온다.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건.

아, 네가.

-모두가 ‘나’를 무가치하다고 해. 네가 세상에서 사라져도 그 이외에는 널 기억해 줄 수 있는 이가 없어. 그리고 그는 지금 네 앞에서 죽어가고 있지. 이 상황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뭐지?

이 모든 것을 읖조리는 이는 유안, 혹은 나 자신.

소년의 ‘희생’에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나는, 그대로 세로완의 손길에 쓰러졌다.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잔뜩 일그러진, 배신한 그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어느 어렸던 결투 날, 내가 너를 버렸기에 네가 나를 배신했다.

그 이름을 내가 왜 잊었을까.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너 또한 이러고 싶지 않았겠지만.

이것은 모두 내가 선택한 것.

그럼으로 오로지 나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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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5-31 22:29 | 조회 : 79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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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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