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두려움.

"황녀님, 바지라니요! 어찌 그런 망측한 말씀을...!"

아.. 나는 이제야 이해가 됐다. 이 세계는 내가 원래 살던 세계가 아니다. 내가 죽었기에 올 수 있던 세계이다. 옛 서양의 과거를 살펴보자면, 여성들은 드레스를 입었고, 바지는 남성들의 것이었다.

"...그래도 바지를 가져다 주세요. 저는 바지가 아니면 옷을 입지 않겠습니다."

나는 시녀들이 곤란해 하는 것을 보았지만 계속 고집을 부렸다. 정말 입기 싫었다. 이 세계에 와서까지도 강요 받긴 싫었다. 물론 전생에 못다한 어리광일 수 있다.

"예... 곧 바지를 대령하겠사옵니다."

내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시녀들은 꼬리를 내리고 바지를 가지러 다시 옷 무더기 속에 쳐박혔다.

나는 그 방 안에 있던 소파에 앉아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1. 나는 죽었다.

#2. 이 세계는 내가 살던 곳이 아니다. 마법진, 정령들 유(有).

#3. 나의 아버지는 황제이다. 고로 나는 황녀이다.`

...가 내가 이곳에 와서 안 사실들이지. 그래, 나는 죽었다. 이제 윤서월은 없는 거야. 그 때의 기억은 잊는거야, 이제 그만... 아파하는 거야.

시녀들은 여러 셔츠와 달라붙는 가죽바지, 그리고 신발들을 가져와 내 앞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이 중 황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나는 조심스래 옷들을 살펴보았다. 옷들을 둘러보다 가장 단촐한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 그리고 고동색 워커를 골랐다.

셔츠중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이런 화려한 색을 넘어서 더 화려한 금박이 붙어 있는 것도 있었다. 심지어 바지에도 프릴이 붙어있는 것이 있었고, 일부가 레이스인 것도 있었다. 신발에는 굽이 거의 10cm는 되어 보이는 킬힐도 있었다.

시녀들은 내가 고른 옷들을 가져와 내게 하나하나 입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끄러워 거부했지만, 그 우람한 시녀가 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시녀들에게 몸을 맡겼다.

"다 됐습니다, 황녀님."

시녀들에 나는 감고있던 눈을 조심스래 떴다. 거울 앞에 비친 나는 아까 본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긴 은청발의 머리칼은 곱게 빗겨져 찰랑거렸고, 호수라기보다는 깊은 바다같은 눈은 마치 보석이 밖힌 듯 하였다.

'..정말 예쁘긴 예쁘네-'

나는 팔을 들어올려 내 머리칼을 한 번 쓰다듬었다. 꽤 부드러운 머리칼이었다. 내가 계속 머리를 만지작거리자 시녀들은 머리를 묶어달라는 신호로 알아들었는지 빗과 푸른 색의 리본을 가져와 내 머리를 손질했다.

"황녀님, 어떤 머리를 원하시나요?"

내게 무엇을 원하는 지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음이 뭉클했다. 전생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것을, 죽고 난 뒤에서야 누릴 수 있다니- 내가 이런 사랑이, 관심이 필요했던 건 정작 그 떄였는데. 슬픔과 화남이 동시에 몰려왔다. 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입술을 꾹 짖눌렀다. 그럼에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건, 이미 매말라버린 탓이겠지.

"하나로... 그냥 하나로 묶어..주세요.."

입을 열었다. 힘겹게 입을 열고 힘겹게 말했다. 과거는 잊겠다고 다짐한 지 한 시간도, 아니 십 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리도 다짐을 금방 어기다니, 나도 참 멍청하구나.

시녀들은 묵묵히 내 머리를 묶었다. 시녀들은 머리를 곱게 빗어 밑에 살짝 묶었다. 긴 머리는 내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마치 꼬리같이 머리를 따라다녔고, 묶었어도 조금 남아 살랑거리는 리본은 물결처럼 흔들렸다.

"황녀님, 이제 황제 폐하를 뵈러가야 할 시간이옵니다."

"황제...폐하요?"

"예, 이제 준비를 마쳤으니 폐하께서 계신 솔레이유(soleil)궁으로 가실 시간입니다."

가슴이 떨려왔다. 결코 설렘의 감정 탓에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두려움, 나를 또 `그들`럼 대할 지도 모른 다는 두려움, 버려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나를 때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 두려움들 탓에 가슴이 떨렸고 이 떨림은 온몸으로 전해졌다.

시녀들은 나를 제촉했고 나는 거부감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발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 마다 심장이 조금씩 무언가에 먹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두려움에 아무 생각 없이 시녀들이 이끄는 대로만 걸었을까, 나는 어느새 솔레이유(soleil)궁 에 들어와 황제의 집무실 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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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8-10 01:04 | 조회 : 699 목록
작가의 말
노디엘

솔레이유(soleil)는 프랑스어로 '태양'이란 뜻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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