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돌아오다 (1)



“이브, 이브!”

다급한 부름에 아일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두 눈이 뜨끈했다.

걱정 하는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자매 벨리아의 얼굴이 흐릿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아일린은 배를 더듬었다.

분명, 자신은 죽었어야 한다.

영문을 모르겠어서 아일린은 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눈앞이 핑 돌았다.

벨리아가 다급하게 아일린을 부축했다.

“꼬박 3일을 누워있었습니다, 이브. 무리해서 움직이지 말아요.”

3일?

아일린은 벨리아의 손을 뿌리치고 창가로 다가갔다.

신성 제국 루베르니아의 공격을 받아 타고 남은 재 속으로 가라앉았던 자신의 조국, 로트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일린은 울렁거리는 속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대체 여태까지 내가 겪었던 그 일들은?

벨리아는 아일린을 부축하며 의자에 앉히고 차를 내어왔다.

벨리아의 차분한 말과 행동으로 아일린 또한 혼잡스러웠던 마음의 평정심을 찾아갔다.

그제서야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아일린은 이곳이 익숙한 풍경임을 깨달았다.

제 눈에는 아직도 불에 타는 모습이 훤한, 로트리 중심부에 위치한 신전의 안이었다.

아일린이 턱, 하고 막혀오는 숨을 삼켰다.

그 모든 것이 꿈이었나?

아니, 꿈일 리가 없다.

그렇게 생생한 꿈이…, 있을 리가 없다.

심장의 통증이 아직도 아릿해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인데 그것들이 꿈 일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왜 로트리에 있는 것이지?

“……자매 벨리아, 지금 시기가 어느 때죠?”

“왕 파냐의 정치 하, 5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으세요?”

고개를 갸웃하는 벨리아의 얼굴이 아일린의 눈에 가득 담겼다.

왕 파냐의 정치 하에 5년이 지났다면, 지금은 N120년 즈음 일테고.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만약 미래였다면, 제국의 침략까지는 아마 4개월에서 5개월이 남았다.

아일린은 다시 그것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운 기분이 들면서도 한 편으로는 안도했다.

“…혹시 제국의 움직임이 있었나요?”

“안 그래도 이브께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이브께서 열병을 앓으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 알았는지, 제국군이 국경 근처까지 왔습니다.”

아일린이 눈을 크게 떴다.

제국군이 국경 근처까지 왔다면 4개월에서 5개월이 남은 게 아니라, …고작 일주일 즈음 남은 것이라고 아일린은 정정했다.

벨리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열병을 얻어 3일 동안 약해진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신전 안에 누워 기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 3일 동안 미래였는지 그저 꿈이었는지, 생생한 일을 겪었다.

그 사이 자신이 열병을 얻었다는 사실을 안 누군가가 제국군에게 그 사실을 발고했고 제국군은 그 틈을 타 로트리를 침략하려 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국경 근처에서 멈춰 섰다.

단순한 압박을 주기 위함인가?

하지만 로트리는 작은 왕국에 불과하다.

로트리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바로 신의 은총을 받은 신녀.

니베이아 아일린 이브, 바로 자신이 될 것이다.

이윽고 아일린은 번잡한 생각을 지웠다.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제국군은 로트리를 파괴할 준비가 되어있다.

당장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아일린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땅이 울리며 큰 굉음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건….

큰 소리에 휘청 이던 벨리아는 소리가 잠잠해지자 당혹에 물든 얼굴로 아일린을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왕께 가세요.”

“하지만 이브,”

“당장 왕께 가셔서 피해야 하노라, 말씀드리십시오.”

“이브는요? 이브께서도 함께 가셔야 합니다.”

아일린이 고개를 저어내었다.

자신의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지금 왕을 따라나서면 오히려 왕국의 걸림돌이가 될 것이란 걸 아일린은 잘 알고 있었다.

“가세요. 저는 신전에 남아 왕께서 대피할 시간을 벌겠습니다.”

벨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큰 굉음이 잇따랐다.

끈질기게 버티고 서있는 벨리아의 손목을 잡고 신전의 문 앞으로 걸어 간 아일린이 벨리아의 두 손을 맞잡고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벨리아의 금빛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났다.

“만일 제가 돌아가지 못하면 그 땐, 자매 벨리아가 신녀가 되는 겁니다. 아시겠죠? 형제 아도니스라면 어떻게든 그대를 도와줄 겁니다.”

벨리아가 대답하려 입을 여는 순간 아일린은 신전의 문을 열고 벨리아를 밀쳐내었다.

끼이익, 천천히 닫히는 문 틈 사이로 벨리아가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입술을 꾹 깨문 채 달려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신전이 크게 흔들렸다.

아일린은 신전의 깊숙한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마 열병을 앓기 전의 자신이라면 이 장소를 영원히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로트리를 통틀어 역사상 가장 성스러운 장소.

성수로 둘러싸인 돌에는 천어가 새겨져있었고, 이곳은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설령 선택받지 못한 자가 들어와도 돌을 둘러싼 성수의 길을 건널 수는 없었다.

아일린은 천천히 성수를 향해 발을 뻗었다.

잔잔한 파동이 그녀의 발끝을 타고 퍼졌다.

아일린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어 성수의 위를 걸어 나아갔다.

지독히도 고요한 곳에서 아일린은 한참이 지나 천어가 새겨진 돌에 도착했다.

그녀가 돌 위에 도착하자마자, 어떻게 안건지 제국군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어째서 이곳을 안거지?

로트리의 왕조차도 이곳이 존재한단 사실을 모를텐데.

…그럼 왕께서는 아직 잡히지 않은 거구나.

참 다행이라고, 아일린은 생각했다.

“신녀가 여기 있다!”

“신녀를 잡아라!”

제국군이 마구 잡이로 성수의 물을 헤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일린은 당황하지 않고 신력을 사용해 자신의 주변으로 방어막을 만들었다.

천어가 새겨진 돌 위라 신력이 몇 배는 더 세질 뿐만 아니라 신력을 사용하는 자들을 무적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었다.

물론 일반 사람들이 성수의 물을 건너올 수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 만일을 대비해서 한 행동이었다.

성수를 건너오던 병사들 중의 반이 다시 육지로 되돌아갔다.

헤엄 쳐도 헤엄 쳐도 그 자리에서 계속 맴돌기 때문이었다.

“포기 하시지요. 그대들은 도달하지 못하십니다.”

병사들이 이를 우득 대며 갈다가 갑자기 웅성대며 열을 맞추어 섰다.

그 사이로 걸어 나온 남자는 차가운 표정으로 아일린을 응시했다.

아일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류.”

세베르 류 셰드리아.

그리고 또 한 명은…, 형제 아도니스였다.

신전을 나오기 전까지 벨리아에게 자신이 없으면 그를 믿으라 신신당부한 참이었는데 이 모든 것의 발단이 아도니스 때문이었다니.

아일린은 느껴지는 허망감에 헛웃음을 뱉어내었다.

아도니스가 세베르에게 무언가 언질을 해주자 그의 홍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일린이 멍해진 찰나 세베르가 육지를 달려 그 끝에서 용솟음쳤다.

아일린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가 있던 자리를 본 순간, 그는 이미 아일린의 눈앞에 있었다.

아일린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일반 사람이라면 이곳에 도달할 수도 천어가 새겨진 돌을 밟을 수도 없는데다가 그 상대가 하필이면 세베르 였기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저항해봐야 지렁이가 꿈틀대는 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독히도 차갑고 어두운 핏빛 눈동자가 그녀를 눈에 담았다.

욱씬, 심장이 아파왔다.

세베르에겐 방어막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아일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곧, 입술을 깨문 이유가 그것이 때문이 아님을 곧 깨달았다.

코가 시큰해져 오는 것이 애석하게도 흐르려는 눈물을 참으려 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번거로운 짓을 했군요.”

세베르는 칼로 눈앞을 가로막는 투명한 막을 내리쳤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소름끼쳐서 아일린은 몸을 움츠렸다.

성큼, 세베르가 한 발자국 다가오자 아일린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내내 무심하던 세베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천정에서 뚝 하고 떨어진 성수가 아일린의 뺨으로 흘렀다.

날카롭고 서늘한 것이 아일린의 눈앞에 비춰졌다.

“그대가 로트리의 신녀입니까?”

세베르의 질문에 아일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하여도 세베르는 이미 자신이 할 행동을 결정해두었다.

이런 행동은 그의 습관같은 것이었다.

이미 사실을 알면서도 묻는 것.

그것은 상대에게 더 큰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를 오랜 세월 겪고 깨우쳤다.

자신에게는 한 없이 상냥하고 살가웠기에 그것을 아는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는데 이 시대에서 마주치자마자 겪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침묵으로 일관하겠다. 이건가요?”

세베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일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뿜어내는 살기에 몸이 달달 떨리면서도 터질듯이 두근대는 심장은 눈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윽고 그가 팔을 치켜 올렸다.

그 모습을 아로새기며 아일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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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3-17 19:38 | 조회 : 383 목록
작가의 말
리베롯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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