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한 없이 절망했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잡으려 발버둥치고 목메던 그 순간 무능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을 탓하며 시도조차 거부당했을 때의 심정은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고통스러웠다.

창문너머로 잎을 스치는 바람을 가르고 대리석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그늘진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익숙한 향이 그녀의 코를 타고 들어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 것이란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내뱉는 숨결이 무거웠다.

속눈썹이 올라가며 어둠에 물들어가는 자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을 잃은 그 눈동자가 한 인영을 담아내었다.

“……셰드리아.”

그녀의 떨리는 음성이 바람을 타고 소년의 발치로 떨어졌다.

소년은 얄궂게도 입매를 비틀었다.

소년의 은빛 머리카락을 타고 붉은 물이 떨어졌다.

소년은 피투성이였다.

그녀의 마지막 유대를 지우고 소년이 이곳에 온 것은 그녀마저 그 유대에서 지우기 위함이었다.

소년의 발걸음에 무게가 실렸다.

뚜벅대며 다가온 소리는 곧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두근, 두근.

심장소리가 몸 전체에 울려 퍼졌다.

뺨에 서늘한 기운이 와 닿자 그녀의 몸이 움찔했다.

소년의 손은 지독히도 차가웠다.

“…이젠 내 이름마저 불러주지 않는군요.”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미간에 주름을 잡아내었다.

소년의 말이 갈 곳을 잃은 채 그녀의 귓가에서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소년의 말에 대답할까봐 그녀는 얇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필리파님, 저는 어쩌면 좋을까요.

소년의 굳건한 그 핏빛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턱턱 숨이 막히는 통에 그녀는 가만히 앉아 소년을 올려다보는 것 밖에 하지 못 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벌어지는 소년의 입술로 향했다.

“형이 아니라, 나를 사랑했어야죠.”

쿵.

삐걱대며 요동치던 심장이 돌연 잠잠해졌다.

시간이 멈춘 듯 그녀의 숨도 함께 멎었다.

아니, 순간적으로 숨 쉬는 법을 잊었다고 하는 게 맞다.

머릿속에 가득 찼던 상념이 순식간에 사라져선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셨다.

창백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뺨을 소년이 쓸어내린다.

서늘한 기운이 사라지자 그녀는 비로소 막혔던 숨을 내뱉었다.

혀가 굴렀다.

여러 말들이 입 속에서 맴돈 탓이었지만 그녀는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또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내내 여유로웠던 소년의 얼굴이 돌연 싸늘하게 식었다.

아아, 이 표정을 다시 보리라곤 생각지도 못 했다.

냉혹하고 자비 따윈 없는 권위적인 왕의 얼굴.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게 되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 건 나였어요.”

“빌어먹을 형이 아니라.”

…사랑했어요.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꺼내지 못 할 말을 속에서 몇 번이고 되내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꼬여버려서 누구 하나 죽지 않으면 엉켜버린 실타래는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운명의 굴레를 정상적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그 희생양이, 당신이 아닌.

내가 될 뿐입니다.

소년에서 벗어나 남자가 된 그의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다른 이들을 보는 눈과 똑같은 그 싸늘한 눈이 심장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아니, 아니다.

그의 표정은 참으로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사랑스러운 당신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못 할까.

날카로운 것이 배를 뚫고 들어옴을 느꼈다.

어찌나 날카로웠는지 심장이 찢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이건 날카로운 것에 대한 아픔이 아니라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는 슬픔이었다.

일렁이는 시야 사이로 그의 동공이 커지는 것을 보았다.

피가 울컥대며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의 눈에 눈물이 차는 것도 보았다.

모르는 척 해야 했다.

그의 슬픔을 끝까지 모르는 척 해야 했다.

그것이 그를 위한 길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얼굴에 힘을 실어 활짝 웃었다.

그가 조각이 되어 흩날린다.

완벽한 어둠이 그녀를 잠식시켰다.

…아, 필리파님.

간절하게 빌었던 우리의 염원은 결국 여기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만약, 만약.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이 두 눈으로 그를 다시 한 번, 이 두 팔로 그를 다시 한 번, 안고 싶습니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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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3-15 01:17 | 조회 : 394 목록
작가의 말
리베롯

안녕하세요 리베롯입니다. 취미로 글을 써서 올라오는 속도가 더딜 것 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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