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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샹들리에가 금빛으로 반짝거리고 예술적인 장식품들이 곳곳에 진열되어 있다. 형형색색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넓은 홀에 모여 한 계단위를 바라보고 있다. 검은 실로 자수가 새겨진 기사단복을 차려입은 남자들이 각자 검을 빼들고 계단을 둘러싸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문제점 이라면 그 모든 시선이 결코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라는것. 더 문제는..그 시선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이다.

아 어차피 상관은 없으려나. 나는 그저 내 앞의 이 여인과 함께 죽으면 그만이었으니까. 이미 황홀한 결혼식의 음악은 멈췄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싶은 생각도 없었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내가 하려던 일에 집중했다. 그저 그녀의 손을 잡고 이 높은 계단위에서 떨어져 내리기만하면 되는일이었다. 정말 간단한 일이다.

최상급 흑진주를 닮은 푸른빛이 은은하게 도는 흑발의 여인이 그녀의 가녀린 몸을 부들부들 떤다. 작고 하얀 손에는 그녀의 손목을 세게 잡은 또다른 누군가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힘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녀의 손목을 잡은 힘은 더욱 세지고 그녀는 결국 눈물을 떨구며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주저앉아 버린다.

허리까지 흐르는 부드럽고 윤기나는 흑발은 하얀 웨딩드레스와 대조대며 더욱 검은빛을 내고 흑진주를 박아놓은듯 빛나는 검은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린다. 풍성하고 긴 검은 속눈썹은 이미 맑은 눈물에 젖은지 오래됬고, 석류의 붉은 빛을 담은 입술은 세게 깨물어 피가 조금씩 배어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몸에서 나는 시원한 바람 냄새만큼은 마치 향수라도 뿌린듯 진하게 풍긴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말 눈이 멀어버릴만큼 아름답다.

''..그래서 난 니가 짜증나.''

그녀의 손목을 잡은 나의 손에 힘을 주고 그녀를 억지로 끌어올린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에 핏기가 가셔 창백해진다.

''살려줘요, 에일린..제가 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죄송해요..재발 부탁이에요. 나를 그냥 놔주세요..''

아아..이런 상황에서까지 착해빠지다니.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까지 가증스럽다. 그냥 네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네가 되지 않게.

입꼬리를 슬쩍 비틀어 웃어준 나는 난간에 걸터앉아 그대로 몸을 기울였다. 떨어질건데 무섭지가 않아. 그냥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반드시 너는 죽겠지 하는 생각밖에 들지않는다. 마침내 내 몸이 완전히 계단에서 벗어나고 나의 몸을 따라 그녀의 몸이 다음 차례로 떨어진다.

''아하..하하하하..!''

분명히 무서워서 말이 나오지 않아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토록 나오지 않던 웃음을 잘만 나온다.

이대로 잘 떨어지기만 하면 되는데.

'하, 정말 대단한 사랑납셨네.'

기사단원들의 사이를 거칠게 갈라놓고 계단을 빠르게 뛰어 올라오는 그가 보인다. 조금만 더 있으면 완벽한 성공인데. 발이 계단에서 떨어진 상태로 난간에서 기우뚱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쥐고 끌어 올리는 그가 그녀와 닮은 흑발을 멋지게 휘날린다. 걱정스럽게 그녀를 보는 시선이 나에게 닿는 순간 차갑게 변한다. 그녀의 손목을 놓친 나는 떨어지고 있는데.

''에일린!! 에일린! 누가 좀 받아 주세요! 어떡해..!''

일말의 동정심도 비치지않는 검은 눈동자와 달리 방금 같이 떨어질뻔 했음에도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이다. 역시 난 당신이 싫어.

생각했던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피부를 빠르게 지나치는 바람도 온몸이 부딪힐때 느꼈던 바닥의 차가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저 착해빠진 여자와 함께 죽지 못한것. 그 여자를 보던 그의 따뜻한 눈빛이 자꾸 어두워지는 시야에 비쳐서 화가 난다. 적어도 죽을때 만큼은 웃으며 죽을수 있을줄 알았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비참하구나. 마지막까지 나에게는 배드엔딩이야.

***

눈을 감고있는듯 온통 어두운 공간에 내가 서있다. 아 맞다. 나 죽었지? 이상하게도 그토록 미워하던 그녀의 얼굴이 더이상 나쁘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토록 사랑하던 그의 얼굴을 생각해도 더 이상 심장이 뛰지않는다. 원래 죽으면 다 이런걸까. 끔찍하게 미워하던 감정도 미칠듯이 사랑하던 감정도 사라지는걸까. 죽어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자 헛웃음이 나왔다. 나 지금까지 뭐하고 산거지? 내가 왜 그랬는지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다.

''..기분 더럽네.''

얼굴 앞으로 넘어온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미간을 좁힌다. 지저분해 보이던 내 백은발이 왜 이제서야 빛나는건지. 지나간 내 인생이 허무해서 눈물이 나온다. 이것 또한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막을새도없이 흘러내린다. 정말 여러모로 짜증나네. 그냥 참지말고 실컷 울어야겠다. 막을수도 없을뿐더러 지금은 그저 울고싶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의 눈 앞에 무엇인가 보이고 나의 귀에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아름다운 셀레아와 멋진 켈로이스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뭘까 이 동화책 읽는듯한 목소리는. 더군다나 지금 보고있는건 분명 셀레아랑 켈로이스인데. 분명히 방금전만해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던 그들이 마치 그림처럼 멈춰있다. 얼마 되지않아 그들의 아름다운 결혼식 장면이 끝났다. 정확히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촤락' 하는 책이 펼쳐지는 소리와 함께 보이는 장면이 바뀌더니 셀레아의 모습이 나온다. 동화책을 읽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베이지 색의 수수한 생활 드레스를 입고 새들 사이에서 즐겁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누가 셀레아를 찬양하는 책이라도 쓴건가.

'옛날옛날에 셀레아라고하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었어요.'

이 거슬리는 목소리만 없었으면 완벽한 그림일텐데. 그 뒤로도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울리는 목소리는 나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당장 이딴 짓거리 끝내. 아까부터 쫑알쫑알 진짜 짜증난다고.''

웃기는 일이었다. 여긴 죽은사람들이 오는 곳일텐데 누가 태평하게 동화책이나 읽고있냐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말한게 들리지 않는지 계속해서 자기 혼자 떠든다.

''죽은것도 짜증나는데 왜 자꾸 시끄럽게..!''

왜 말을 멈췄냐고? 왜냐면 그 동화책에 내 모습이 나왔거든. 셀레아를 괴롭히는 악녀로. 그 동화 속 나는 켈로이스가 사랑하는 셀레아를 질투해 그녀를 괴롭힌 악독한 여자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건 적어도 다른 사람이 볼수 없던 장소에 일어났던 일들까지도 전부 나와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녀의 드레스를 몰래 찢어놓은것도, 그녀의 생일선물로 금이간 찻잔을 준비해놓은것도, 더러운 소문을 하녀들에게 낸것도, 심지어는 내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 어쌔신들을 찾아간 것까지. ..이렇게보니까 나 진짜 못되먹었구나? 사람들이 왜 나를 그렇게 싫어했었는지 이유를 알아가고 있는데 내가 사건하나를 일으킬때마다 셀레아의 이름 앞에는 현명한, 똑똑한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한번 더 보게된 결말은 여전히 해피엔딩이다. 마지막까지 셀레아를 괴롭히려하던 나 '에일린 펠레이시아' 는 죽고 셀레아와 켈로이스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해피엔딩.

아아..이제야 알겠네. 내가 그동안 살아가던 곳은 한낱 동화책 속일 뿐이고, 내가 비참한 배드엔딩을 겪은것도, 그게 셀레아에게는 해피엔딩에 되는것도 다 나는 악녀라는 위치고 셀레아는 여주인공이라는 위치여서. 나 정말 바보같구나. 어떻게 하면 여주인공을 건드릴 생각을 하는거지. 그러면 애초부터 나는 셀레아를 괴롭히다가 죽을 운명으로 정해졌던거 아니야. 그래서 죽고나니까 아무런 느낌도 안들었구나. 헛웃음이 나온다. 어떻게 할 기회도 없이 비참하게 죽을 운명을 살았다는게 억울해 미치겠는데 웃음이 나온다. 그냥 실성한건가?

그래 너는 여주인공이어서 그렇게 행복했구나. 너는 여주인공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사랑받았구나. 여주인공이기 때문에...켈로이스도 너에게 빠져버릴 수밖에 없었구나. 나 진짜 왜이러지. 방금까지만해도 멈출수없던 웃음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악녀라는 이유로 억지로 나쁜 감정들을 담아내야했던 내 처지가 불쌍하다. 방금 전에 울어서 자국이 남아있던 볼에 다시 눈물이 흐른다. 하얀 얼굴 위에 남은 눈물자국을 손으로 문지르고 붉게 변한 눈을 여러번 감았다가 뜬다. 내 눈물이 어느정도 멈추자 어둡던 공간이 나를 주변으로 하얗게 변한다. 마치 한가운데서 커다란 손전등을 켜놓은듯한 밝기에 나는 인상이 찡그려질 정도로 눈을 세게 감았다.

감은 눈위로 보이던 붉은 기가 가시고 어느정도 적응이 되자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투명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얇은 은색 커튼에 가려져 은은하게 방으로 들어온다. 켈로이스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색을 닮은 검은 이불과 배게의 모서리에는 나의 머리카락색을 닮은 은백색 실로 고급스러운 자수가 새겨져있다. 와, 여기서부터 내가 켈로이스를 사랑했다는게 나오는구나. 지금은 켈로이스를 생각해도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질 뿐 아무런 반응이 오지않는다. 어차피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도 그저 동화책 속의 설정이었을텐데 뭐.

그렇게 생각하자 약간 빨라진 심장박동도 무시할 수있게 되었다. 이불이랑 배게는 오늘 가져다 버려야지. 그래도 한 사람이 죽는 순간인데 나를 더럽다는듯 쳐다보는 그의 눈이 생각나버렸다. 역시 이런 침구는 내 정신건강에 해로워. 상큼하게 웃으며 그의 얼굴이 생각나는 이불을 발로 콱 밟아주었다. 아 물론 내 머리카락 색같은 자수가 있는부분은 빼고. 아예 대놓고 침대 위에 올라가서 탭댄스를 추듯 발을 빠르게 움직이자 기분이 좀 풀리는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사랑했던 사람이 생각나는건데...는 개뿔. 그딴 설정따위 개한테 던져주면 헥헥 거리며 잘 받아먹을것 같다. ...배탈나면 안될텐데.

그때 방밖에서 똑똑하고 노크하는 소리가 난다. 내가 침대에서 뛰는 소리에 놀라서 온건가. 기분이 풀린 나는 환하게 웃으며 들어와 하고 말을 건넸다. 흠흠..너무 하이톤 같기도 하고. 아무튼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온 시녀는 내 웃는 얼굴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벌 떨었다. 왜 저러지 하고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나 때문인것 같다. 너무하네. 내가 예전에는 어땠길...생각났다. 아마 내가 웃을때는 시녀들이 벌을 받을때나, 셀레아가 다쳤을때나, 켈로이스가 나를 부를때나.. 겁낼만했네.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포개고 바들바들 떠는 시녀가 불쌍해서 괜찮아, 안 혼내. 라고 해줬더니 기겁을 한다. 내가 그렇게 무섭니? 마음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뒤로 조심스레 물러나 내 스스로 양 손을 위로 들자 그제야 푹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든다. 하 진짜 내 평판 어떡하면 좋니. 바닥을 치다 못해 광산을 하나 만들겠다. 괜찮아, 다시 올리면 되지. 그렇게 자신과 합의 보고 시녀를 바라봐주었다.

''혹시 내가 위에서 많이 시끄럽게했니? 그래서 올라온거야?''

나름 친절하게 얘기해줬는데 양 손을 들고있으니 꽤나 웃긴 모양이었다. 시녀의 입꼬리가 움찔거린다. 그래도 내 눈치를 보며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는듯해 보인다. 내 성격 진짜 왜 그렇게 설정해 놓은거야..

자 우선 얘한테 좋은 인상주는것부터 시작할까? 나는 눈꼬리까지 접으며 최대한 나긋나긋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 손울 내리지 않는것은 잊지않았다. 근데 얘 이름이 뭐더라?

''웃기면 웃어도 돼. ...그래 실린.''

맞아. 기억났어. 얘 검정 눈동자가 셀레아 생각나서 괴롭혔던.. 잠깐 기억하고 있는게 왜 다 이런쪽이냐. 하지만 괜찮아! 이제부터 나 에일린 펠레이시아는 착해지는거야! 켈로이스 따위에게 매달리지않고 행복해질꺼야!

''그게..유테시스님께서 부르십니다, 아가씨.''

라고 생각했던 내 다짐은 순식간에 박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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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3-13 20:32 | 조회 : 883 목록
작가의 말
Ellozen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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