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령왕들과의 만남

소설에 묘사되었던 대로, 내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 꽤 만족스러웠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어디선가 묵직한 기분이 내 영역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 그 존재들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미소지었다.

"우와- 이것봐. 사방이 온통 물이야."
"그러게. 설마 했는데 정말로 재생했네."
"놀라워. 그 황폐했던 공간이 이렇게 빨리 회복되다니.."

정말로 감탄한 듯한 그들의 반응에 살짝 뻘쭘해진다. 처음보는데도 친숙한 이 감각들. 내가 정령왕 임을 알려준다.

"음.. 저기.. 엘퀴네스?"

갈색 피부의 섹시한 얼굴. 색기가 철철 흐르는 분위기의 트로웰이 분명했다. 그가 내게 말을 걸어주다니. 정령왕 엘퀴네스의 원작에서도, 지훈이는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내 반응을 기다리는 그에게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 역시.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아니지. 지금은 탄생을 축하하는 게 먼저인가? 꽤 늦었구나. 이제라도 와 줘서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야. 안 그래도 제법 아슬아슬한 상황이었거든."
"트로웰. 쓸데없는 사족은 붙이지 마."
"하하, 미안. 엘퀴네스가 너무 반가워서 말이야."

상성이 잘 맞는지라 그 둘과는 금방 친해질 거 같았다. 그에 반해서 문제는... 이프리트지.

아아, 생각하기 무섭게 이프리트가 시비를 걸어온다. 어지 대처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다가, 결국에는 그녀의 심기에 단단히 거슬렸다.

"뭐야. 이번 엘퀴네스는 여성체야?"

지훈이라면 중성체였지만, 나는 여자였기에 수긍해버렸다. 그녀의 붉은 눈이 일렁이며 나를 흝었다.

"왜 아무런 말이 없어? 너 혹시 벙어리야?"

역시 시비 하나는 이프리트가 제일 잘 터는 것 같다. 절로 기분이 나빠졌다. 아마, 그녀와 내 속성이 정반대인 탓도 있을 것이다. 이 본능적인 역겨움.

"이프리트."
"하지만 저 녀석이 계속 기분 나쁘게 빤히 바라보고만 있잖아. 아무리 엘퀴네스가 싸가지 없는 걸로 유명하다고 해도 그렇지. 첫 만남에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아?"

지구의 친구들로부터 미친개, 미친년, 또라이, 싸이코 등등의 말을 들어왔던 내게 싸가지 없음이란 일상이었으며, 원작의 엘퀴네스들 보다 더욱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뭐라고 말 좀 해 보라니까?"

확 무시해버릴까 하다가, 척을 졌다가는 나중에 분명 후회할 일이 있을 듯 싶은 마음에 입을 열었다.

"이번대의 엘퀴네스...라고 할까. 만나서 반갑기 그지없네. 잘부탁해."

비아냥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투였음에도 그들은 마치 감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였지. 아, 아예 다 바본가.

"... 멍청해 보이는 표정."

이 상황을 어찌하리, 하던 내가 결국 그들의 표정을 고대로 읽어주니 그제서야 정령왕들은 원래대로 돌어왔다.

"아, 응.. 미안. 신경쓰지 마. 아무튼 환영한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트로웰, 그가 내민 손을 잡은 나는 예상외로 따듯한 감각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물의 감촉."

갑자기 내 손을 끌어당겨 뺨에 부비적대는 트로웰을 한대 쳐줄까 하다가, 참았다. 잘못이 있다면 내 쪽이지. 누가 태어나지 말래.

"굉장히 기분 좋다고."

놓지 않는 손에 점점 오만상을 쓰고 있는데, 미네르바가 후후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아예 어엿한 여성으로 보였고, 나는 10대 후반의 소녀처럼 보였기에 이 장면은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후후, 그냥 내버려 둬, 엘퀴네스. 네가 너무 반가워서 그러는 거니까."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동안 물이 없어서 트로웰이 가장 고생을 많이 했거든. 대지는 특히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편이니까. 해마다 죽어가는 동식물과 작물을 보살피랴, 툭하면 일어나는 산불을 수습하랴, 아마 우리 중에서 가장 네 존재가 절실했을 거야."
"흥, 미안하게 됬네요. 산불을 일으킨 원인이라서."

이프리트는 아예 대놓고 비아냥 거린다. 아까 내가 했던 자연스러운 비아냥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골려줄까 하는 마음이 들어, 나는 억지로 눈물을 짜냈다.

"이프리트, 미안해. 내가 안태어나는 바람에.. 네가 원인은 아니잖아. 내 잘못이야..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생했어, 다들."

눈물 맺힌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작 주춤하던 그녀는 이내 짜증난다는 듯 제 머리를 헤집었다.

"됬거든? 생글생글 웃는 얼굴 집어치워. 바보같아 보이니까. 하긴, 너 바보 맞지? 오죽 어리바리했으면 재대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엉뚱한 데에서 헤매다가 이제야 겨우 돌아온담."

나는 더욱 침울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몹시 처량해 보이리라.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

내 목소리가 점점 잠겨가자 트로웰의 인상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내 손목을 잡고 날 감싸듯 그의 뒤로 숨겼다.

"이프리트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뭘. 틀린 말은 아니잖아? 저 녀석이 공석인 동안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는지.."
"미안하다고, 수고했다고 엘퀴네스가 그랬잖아."

조금 성가시다는 듯 트로웰이 한숨을 쉬며 이프리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날 영혼 배속을 책임진 자가 실수한거잖아."
"흥- 그래. 너흰 그냥 반갑기만 하지? 난 돌아가겠어. 반가운 존재끼리 잘들 놀아보라고."

그녀는 상당히 유치했다. 나도 만만치 않지만, 날 괴롭히려면 적어도 지능적이어야지. 노골적이면 어찌하리.

"아직 어린애라니까."
"이프리트는 감정이 극단적인 편이야. 미안해. 대신 사과할게."
"...너희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애초에, 멍청하게 있던 내 잘못이었고, 그 애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어.."

미네르바와 트로웰의 얼굴은 더 굳어져 갔다. 완전히, 이프리트가 열세에 놓인 상황이었다. 이걸로 재미있으니, 그만 하도록 할까.

"...사실 처음에는 정말 무시한 거였어. 나도 엘퀴네스라 어쩔 수 없나 봐. 나도 잘못한 거야."
"이번 엘퀴네스는 상당히 마음이 넓군."
"그러게. 의외인걸. 이번 기회에 악연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럴지도 모르지."

말 그대로, 그럴지'도' 모르지.

...안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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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10-02 23:00 | 조회 : 1,266 목록
작가의 말
씨시 매그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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