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백

그날은 해가 힘을 품어 더욱 강렬해지는 칠월 달의 어느 날이었다.



어느 때처럼 5교시의 나른함을 넘기고 쉬는 시간에 매점을 다녀온 뒤였다.



한 손에는 바나나우유를 들고 뒤에 있을 수업을 어떻게 버텨야 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바람은 후덥지근하고 햇빛은 강렬했다.



이제 슬슬 매미울음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소리가 시끄럽겠지만 한편으로는 시원스럽기도 하겠지. 그러니까 매미를 미워할 수 없는 거 아닐까? 하는 쓸데 없는 생각이 늘어났다.



우리 반은 3층 복도 끝에 위치한다. 에어컨의 찬바람이 나오지 않는 복도는 해물을 익히는 찜통 같았다.



"드럽게 덥다."



꾸역꾸역 계단을 밟고 올라와 모퉁이에 들어서려고 할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한다."



남성의 걸걸한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고백을 하고 있었다. 뭐야 짜증나게, 고백 따위는 화장실이나 학교 뒤뜰 같은 은밀한 곳에서 하라고, 라고 생각하는 순간 몸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다니는 이 학교는 축구에 목숨거는 땀쟁이들로 가득한 남고였기 때문이었다.



언제 별로 친하지 않은 녀석들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훔쳐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학교에 게이가 있다느니 남자녀석들끼리 부빗거리고 있는 것 봤다느니 하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다.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니고경험했던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이렇게 직접 걸걸한 변성기의 남자녀석이 똑같은 시꺼먼 남자에게 고백하는 것을 본의하니게 옅듣게 되었으니,

그 녀석들이 주절거리던 게 실없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이거 참. 이 모퉁이를 돌아서 직진해야만 우리 반이 나오는데 한참 고백을 하고 받는 녀석들 때문에 갈곳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꼴이 되어버렸다.

얼른 끝나길 빌며 벽에 기대어 우유를 마셨다.



"난 널 좋아한다. 남자든 뭐든 상관없어.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은 진짜니까."



으에, 진지하다. 엄청나게 진지하다. 저돌적으로 고백하는 녀석은 상대방에게 어떤 대답이라도 듣겠다는 듯 전력을 다하는 듯했다.

문득 궁금했다. 과연 상대방은 뭐라고 대답할까? 당연히 거절? 혹은 둘의 마음이 통해서 받아들인다? 어쩐지 흥미진진해졌다.



"나는"



나는?!



"거절이다. 김진환"



걸걸한 목소리와 사뭇 다른 점잖고 단단한 목소리를 가진 자가 대답했다.



으아, 엄청 단호하게 거절했다.

잠깐 김진환이라고? 그 3반에 청소년 축구선수 김진환? 미쳤어. 그 녀석이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였다니! 이거 뉴스라도나면 저 녀석인생 매장당하는 거 아니야? 와 대박이다.



"역시, 거절… 니가 날 거절했어도 난 여전히 널 좋아 할 거다. 유지원."



에??? 유지원??? 김진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귀를 의심했다.

우리학교에서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유지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지원은 전교회장이기도했거니와 도전 청소년 퀴즈 쇼에 출연해 당당히 1등을 한 녀석이라 우리학교 사람이라면 모를 수 가 없었다.


와, 진짜 이거 너무나 큰 특종을 들어버렸다. 김진환의 마지막 고백을 끝으로 실내화 소리가 들리고 김진환과 유지원은 본인의 반으로 돌아간 듯 복도는 조용해졌다.


충격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고자 잠깐 바닥에 앉아 바나나우유를 마셨다. 일단 둘의 비밀스러운 상황이었고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겠지? 아아 그래 조용히 살자.


한번 심호흡을 크게 하고 일어났다. 둘의 상황에 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아예 없다.


김진환이 게이고 그 녀석이 좋아하는 상대가 초 엘리트 유지원이라고 해도 나와
관계없어. 관계없다! 그것을 되뇌며 모퉁이를 돌았다.



"아아아앗!!"



모퉁이를 도는 순간 심장이 입 밖으로 나오는 줄 알았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을 새도 없이 나는 다시 바닥에 주저 앉아야만 했다.

아주 싸늘한 표정의 유지원이 가만히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경고 혹은 협박 같아 괜히 뜨끔뜨끔했다.



"아, 까, 깜짝이야 놀랬잖아."



일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뗄 생각으로 멋쩍게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절대 난 너희들의 비밀스러운 장면을 듣지 않았어 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럴수록 이쪽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던 걸까 유지원은 꿈쩍도 하지 않은 체 여전히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뭘 봐. 사람 넘어지는 거 첨 봐?"



"고요한?"



어떻게 내 이름을?! 유지원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에 잔뜩 쫄았지만 티를 낼 수 없었기에 녀석의 얼굴만 쳐다봤다. 유지원은 싸늘한 눈을 들어 나를 봤다.



뭐라도 말해보라는 식의 시선 같아 괜히 뜨끔뜨끔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해도 이상할 것 같았다. 그래도 여기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도 이상했다.

뭐라도, 뭐라도! 이 상황을 넘길만한 무언가는 말해야 한다.



"지금 몇 분이지? 지금 몇 분인지 아냐?



내가 기억하기로는 애석하게도 아직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뭐라도 말한다는 게 고작 시간을 묻는 것이었다.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심 몇 분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5분"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깨고 유지원은 5분이라고 대답해줬다. 근데 오분?



"5분? 2시 55분?"



"아니 3시 5분"



"3시 5분?! 아씨! 타이머인데, 고맙다!"



미쳐! 수업 종은 안친 게 아니라 내가 못들은 거였다. 하필이면 수업시간 정각으로 지키는 타이머 수학선생시간이었다.

5분이나 늦었으니 들어가자마자 엉덩이 터지겠구나 각오하며 복도 끝으로 뛰어갔다.



뛰는 순간에는 축구선수가 게이고 그 상대가 전교회장 이라는 사실보다 매타작 당할 내 엉덩이 걱정이 더 커서 잠깐 동안은 그들을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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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8-10 13:51 | 조회 : 2,874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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