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화 마침표.

"없어, 아무 데도 없다고...!!"
이엘이 절망하며 두 눈을 손으로 가렸다. 그 사이로 작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모두가 보았지만 그들은 위로 한 마디 조차도 건넬 수 없었다.

그들 모두가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리나와 루드는 죽었을 것이라고.
만일 실종이라고 해도, 이미 학교나 제국은 모두 그 사건을 처리하느라 급급했기에 실종자들을 찾을 여력이 더는 없었다. 지금도 많은 인력을 실종자 찾기에 사용하고 있었고 더는 무리였다. 교수들에게 리나와 루드를 찾아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들어지기는 힘들 것이었다.


적어도 친구들에게 있어서 '리나와 루드는 더이상 돌아오지 못한다' 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미친듯이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렌과 디오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밤에 달이 뜰 때까지 학교를 휘젓도 다녔다. 리나와 루드를 본 사람은 없냐며 항상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다녔고, 리나와 루드의 숙소에 수시로 들리었다.
혹시라도 그들이 여느 때처럼 침대에 앉아,

'왜 또 헐레벌떡이야.'
'왜 그렇게 놀라.'

무심한 듯한 그 목소리로 자신들에게 말을 걸지는 않을까 해서.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 사실 리나와 루드는 못 돌아올거라고, 다시는 다 같이 행복하게 웃던 때로 못 돌아갈 거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다오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자 그가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오늘도 일찍 수업을 마쳐버린 텅 빈 교실에서는 그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이엘은 그들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어버린 것이었다.

"그런 거 아냐, 얼마든지 돌아올 거라고! 우리가 둘을 믿어야 하잖아. 우리 아니면 누가 믿냐고!!"
"그럼 왜 안 오는 건데?!"
"이엘-!!!!"
디오는 강하게 이엘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굳게 닫혀있던 교실의 문이 열렸다. 그 어떤 인기척도 없이 들려온 목소리는,
"아. 시끄러워."
차가운 남학생의 목소리.
"너흰 우리 없는 동안 변한 게 없네."
냉정하지만 정이 담긴 여학생의 목소리.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목소리였다.



"......루드?"
디오의 목소리에 눈물이 한 껏 묻어나왔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그는 진짜로 눈물이 흐르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가슴이 쿵쾅거렸다.



"우리 안 죽었어."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백금발빛 머리카락, 깊은 심해의 푸름을 그대로 담아온 것 같은 벽안, 새하얀 피부.
"멀쩡한 사람을 죽이다니."



"'"루드으으으-!!!!!!!"""
"""리나아아-!!!!!!!"""
루드 크리시와 리나 크리시.



-
-
-



"이것 좀 놓아줄래.."
"안 돼,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맞아!"
"하아......"
리나는 양옆에 바짝 붙어앉은 린과 카밀리를 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속에 작은 기쁨이 숨어있다는 것은 모두가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이제 진정 좀 됐지?"
루드 또한 디오와 리더시스에게 둘러싸여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얼굴만 빼꼼히 내밀어 묻는 루드에게 미림은 팔짱을 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사실 안 됐긴 하지만, 그동안 루드와 리나가 어디서 있었는지,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으니까.."

루드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대답했다.
"우리는 옛 침식이었던 곳에서 치료를 하고 있었어."


"옛 침식...?"
"침식이 그 날밤 모두 사라졌던 건 기억나?"
디오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리나가 그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이드리스가 죽고나자 빨갛게 물들어있던 땅이 곧바로 본래 색으로 돌아왔었어."
"듣고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그땐 너무 정신없어서 몰랐어."
리더시스는 렌의 설명을 들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은 빨갛게 충혈된 눈을 손으로 비비며 물었다.
"그런데 왜 굳이 그곳에서 치료를 한 거야? 도시에서 하면 훨씬 빠르게 회복할 텐데."
방금 리나와 루드의 행방불명에 대해 얘기하며 흘린 눈물을 가리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이미 보고 있던 리나와 루드였기에 그들은 약간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내보였다. 무뚝뚝하던 이엘이, 그들을 걱정했다는 것이 놀랍다는 의미였다.

리나는 단호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도시에서는 하면 안 돼. 다른 사람들이 위험했어."


"우리에게 말 없이 사라진 거와 관련있는거야?"
렌이 아직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보자, 리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럼 말해줘. 그 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갑작스럽게 이드리스는 죽었고, 너희를 둘러싸던 마력은 뭐였고, 무엇보다, 왜 사람들이 그때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거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싸움을 「켈른제국과 탑의 전쟁」으로 알고 있어!"
"진정해 렌."
쉴새없이 몰아치는 렌의 말에 루드는 약간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어느 새 아이들은 리나와 루드에게서 멀어져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직감적으로 이 대화는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디부터 얘기해야할지 모르겠다."


다시 말을 꺼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한참 뒤에 루드가 입을 열어서야 리나는 숨을 내뱉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우리가 한 거야. 그 때의 싸움은 잊는 편이 좋으니까."
"정확히는 우리가 한 게 아니라..."
리나와 루드는 서로의 눈빛으로 눈치를 보는 듯 했다. 그리고는 겨우 리나가 내뱉은 말은,

"...「태초신」이 한 거야."

자신들이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말.
리나는 그 말을 내뱉고나서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어쩌나, 하고서 불안감을 느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난 알고 있었어. 그때 그런 기분을 느꼈으니까."
리더시스가 선명한 눈동자로 리나와 루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더듬는다든지, 망설인다든지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다.
"커다란 마력이 너희를 가로막았을 때 너희 이름을 불렀어. 그때 루드가 뒤돌아봤는데 그 눈빛을 보고 알았어. 그 사람은..사람인지도 이젠 모르겠지만, 그는 내가 알던 루드가 아니었어."
루드가 그런 차가운 눈빛을 우리에게 내비친 적은 없었으니까.

"사실 나도 알고는 있었어."
리더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렌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레노아가 말해서 알았던 거였는데 듣고나니 알겠더라고."
렌은 레노아가 자신에게 소리치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저건 사람같은 것도, 마법사도 아냐. 우릴 만든「신」이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눈물이 흘러내리던 것 또한.


"...그럼 우리 말을 믿는거야?"
리나는 자신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내보였다. 루드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했지만 그도 놀랐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림은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놀라운 말이긴 하지만 못 믿을 건 없죠. 리나와 루드가 한 말이니까."
"...맞아. 너희가 일부러 거짓말할 이유는 없잖아."
이엘도 미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그들에게 대답했다.

결정적인 것은 리더시스가 그들에게 한 말이었다.
"우리는 너흴 믿으니까."


"........."
루드는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 모두가 자신들을 신뢰할 것이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믿어줄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건 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랑 신이 어떻게 관련있는지는 말하기 곤란해."
리나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돌려서 아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얘기를 하려면 파인더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해 너무 많은 것들을 설명해야하는 것 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루드도 얘기해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신' 일 때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 다음 생에서 어떤 험하고 힘든 삶을 살았는지.

"안 해줘도 돼. 어떻게 된 일인지나 빨리 설명해줘~!!"
디오는 숨 넘어갈 것 같다고도 덧붙이며 두 사람에게 칭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난 모두가 약간의 웃음을 내보이고 나서야 리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때 이드리스를 죽인 건 신이었고, 우린 선택의 기로에 섰었어. 아예 신이 되어서 살게 된다면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린 또다시 함께 행복하게 웃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신은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람한테 당한 게 생각보다 많아서 그런 것 같은데. 그들은 그냥 신으로 살고 싶어했지만 우린 생각이 달랐으니까, 서로서로 쇼부 보기로 했어.

각성했을 때는 신으로, 그렇지 않을 때는 인간으로 살기로."


"뭐어-?!?!?!"
"으엑!!!"
"그게 무슨 소리야?!!!"
루드의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린과 디오, 렌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소리지르다시피 질문한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직 덜 끝났으니까 앉아."
리나의 날카로운 말을 듣고나서야 그들은 슬그머니 제자리로 앉았다. 만약 그마저도 없었다면 아마 그들은 모두 숙소 밖으로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만큼이나 흥분한 목소리와 얼굴이었다.


"그 날 싸운 건 온전한 우리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싸운 몸은 우리 거였어. 즉 우리 몸은 많이 다쳐있었지."
"「태초신 」은 이드리스와 싸우기 전부터 우리 몸을 서서히 장악해가고 있었어. 그리고 그들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우리에게 다시 몸을 내어주면, 몸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건 맞는 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옛 침식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상처를 회복하고 있던 거였어. 굳이 그렇게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을 곳으로 갔던 이유는, 아까 신들이 사람을 싫어한다는 거 기억하지? 다른 사람이 오면 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런 거야."
그 오두막집이란, 리나의 전생의 삶이었던 델프로사 살던 집이었다. 앞마당에는 갖가지 꽃이 만개하던 곳.
물론 그건 얘기하지 않았다.

"우릴 치료해줄 최소한의 사람들만 곁에 남겨놓고. 그게 바로 오피온의 마스터와 렌 씨였어. 너희 오피온에 갔었지?"
"어떻게 알았어?!"
"뻔하지. 우릴 찾으려고 우리가 있을만한 곳에는 다 갔을 테니까."
루드의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는 아이들을 모두 놀라게했다. 새삼스럽게 그들이 두 사람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느끼면서.


"아. 그리고 참고로 얘기하는 건데 우리가 각성했을 때는 친한 척 안 하는 게 좋아."
"너희가 우리랑 진짜로 친하다고 해도 그냥 아는 척을 하지 마. 거슬리면 걔네가 너희 죽여버릴 수도 있어. 물론 우리가 최대한 내면에서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게 막겠지만, 어떻게 될 지는 몰라. 우리보다 그들의 힘이 더 강하니까.."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는 저마다 마른 침을 한 번씩 넘겼다. 리더시스는 그 때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던 그 눈빛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드리스가 죽고 나서 뮬이랑 껴안던 거 혹시 봤어? 우리가 마녀에게 사과했던 건데, 이젠 더 이상 빛과 어둠의 능력이 저주스럽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거야. 그 저주는 사라졌으니까."

"다행이다."
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리나와 루드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그 다음 제일 중요한 거. 기억! 기억은 어떻게 된 거야, 어디까지 사람들이 기억하고 어디까지를 잊고 있는지는 모르니까 대화를 할 수가 없어. 특히 이드리스와 싸웠다는 말을 꺼낼 때마다 아이들은 전부 그 이야기만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해!"


"우리가 바꾼 기억은 크게 하면 네 개 정도야. 범위는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마녀들, 이드리스와 함께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외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 대륙의 모든 사람들."

리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을 시작했다.
"첫 째, 이드리스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 날밤 우리는 용과 싸운 것이 아닌 탑과 싸운 것으로 기억을 바꿨어. 이드리스에 대해 말해도 아이들은 모를 거야.

둘 째, 그 날 밤 싸움을 도운 것은 갑작스레 나타난 검은 마법사와 순백의 마법사이지 리나 크리시와 루드 크리시가 아니다. 이건 순전히 우리의 편의를 위한 행동이었어. 우리가 1급 마법사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았던 예전으로 돌아가려면 이번이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했으니까.

세 번째, 렌이 황태자인 건 얘기하지 않았어. 미림이 공간의 마녀인 오페라가 만든 것인 것도, 디오가 거대한 용으로 변했던 것도 모두 없던 일로 했어. 이건 혹시라도 너희가 원하지 않을까봐 했던 거니까 필요없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말해.

그리고 네 번째."

리나는 네 번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눈길을 렌으로 살며시 돌렸다. 이 이야기는 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차가웠지만 그의 태양이었던 옛 빙설 '리즈 아브라멜린' 의 이야기.


"...네 번째는 새롭게 바뀐 마녀들.
원래대로라면 나와 리나 두 사람이 차기 창조의 마녀가 되었어야 했어. 그런데 그렇게 되는 건 우리 둘 다 사양이라서.."
"리나가 창조의 마녀일 거란 건 예전부터 예상했어요. 하지만 루드 씨도 마녀라니..애초에 두 사람이 하나의 능력을 나누어 가지는 게 가능한가요?"
미림은 예전 연무장을 청소하던 때를 떠올렸다. 모두가 녹초가 되어 잠에 골아떨어져있던 때 리나는 잠에서 깨어나 창조의 능력을 사용했다. 부서져버린 아티팩트로 계단을 만들어 세실리아의 초상화를 닦던 것은 아직까지도 명백히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있었다.

"불가능할 건 없지. 우리는 껍데기만 사람이지 속의 마력이나 능력같은 건 전부 신이니까. 그리고 애초에 창조라는 능력도 신이 만든 거고."
"아...."
미림은 '신' 이라는 말에 바로 입을 닫았다. 그 단어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으니까.


"어쨌든 차기 창조는 엔디미온 교장으로 하기로 했어. 일리아로 할까 했지만 비앙카 왕녀한테 책잡혀서 아무것도 못 할 것 같-"

"엔디미온 교장-?!?!??!"
"교장이 마녀가 됐다고?!!!!!"

리나는 다시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워진 주변에 몸을 움찔거리며 놀랐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다들 알려져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런 거 들어본 적 없는데?!"

리나는 디오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설마 아직도 비밀로 하고 있는건가."
내가 실습 얘기를 하면서 분명 말해줬는데.

루드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창조는 그렇게 일을 마무리 했고,
....빙설은..
그 날 탑주에 의해 공격당해 학생들을 지키려다 죽은 것으로 했어. 그리고 다음 대 빙설은 그 옆에 있던 레노아 황녀가 되었고."
"........"
렌은 그 말을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리나와 루드는 알 길이 없었다. 그가 슬픔에 잠겨서 말을 잃은 것인지, 멋대로 리즈의 희생을 그런 식으로 바꾸어서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리즈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에 또다시 허무함과 무력함을 느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구나."
한참 뒤에 한숨을 내뱉듯이 터져나온 렌의 말은 무거웠다. 아무도 그 말을 들은 후 쉽사리 말을 할 수 없었다.
분위기를 언제나 주도해오던 렌은 평소처럼 싱글벙글한 미소를 띄우며, '왜 그렇게 쳐져있어. 웃어!' 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괜찮다며, 나는 이제 신경쓰지 않는다고 얘기하지 못하는 렌은.


"정말로 죽은 거구나....."


기어코 눈물을 터뜨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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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한걸까."
리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밤공기는 말없이 그들을 맞이했다.
"........"
루드는 그저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금새 보름달이 될 것처럼 보이는 가득 찬 달은 하얗게 빛났다.

"응."
루드는 뒤늦게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렌을 위로하면서도 느껴지던 슬픔은, 리즈에게서 남겨질 렌의 마음이 이해가 가서였다. 그들도 한참을 고민했으니까. 신으로 남는 것이 최고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마스터가 우리에게서 남겨지잖아.'


"걱정 마 리나.
분명 힘들겠지, 다시는 씻겨지지 않을 것처럼 아픈 상처로 분명 남을 거야. 그 날 빙설이 오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다며 자책할 지도 몰라.
하지만 렌에게는 우리가 있어. 친구들이 있으니까.
분명 렌은..."
루드는 말을 멈추고 다시 회상했다. 밝게 웃던 렌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을 다시 이었다.
"견뎌낼 수 있을거야.
강하니까 렌은."


".......
그래. 그렇구나."
약한 건 도리어 나였구나.
리나는 입밖으로 내뱉지 않은 말을 몇 번씩이나 곱씹었다.


"잠깐."
다시 한번 밤바람을 쐐려던 순간이었다.
"왔어."
루드의 검푸른 눈동자의 색이 점점 더 짙어졌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그는 미세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리나에게 말했다.

"옛 침식의 숲."
"응. 나도 방금 느꼈어."
리나는 루드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각성을 걸었다. 이아나와 블로우로 변해버리기까지는 예전처럼 복잡한 각성주문를 외우는 절차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눈에서 뿜어져내린 작은 양의 마력을 신호삼아 각성해버린 그들은, 건물 3층 정도는 되는 높이에서 땅으로 곧바로 착지했다.


"......!!!
리나, 루드-!!!"

그들이 떨어지는 뒷모습만 본 채 당황한 리더시스가 두 사람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그는 그저 창문을 통해 리나와 루드가 떨어졌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봤자 상처 하나 없을 것임은 후에 기억해냈다.


"........."
이아나의 하늘색 눈동자가 리더시스를 차갑게 훑었다. '리나' 라는 이름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눈동자를 보고 나서야, 리더시스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신.. 말을 걸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급하게 입을 막아버린 리더시스는 이미 엎질러진 물임도 알고 있었다.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숨죽이던 리더시스를 향해, 이아나는 가볍게 말을 던졌다.
"들어가. 여름이라도 밤은 추워."



"........
어......?"
리더시스는 순간이동을 한 듯이 그들이 사라져버리고 텅 빈 창문 아래를 바라보았다. 멍한 얼굴로 그녀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서.




-





"멈춰라."
".....!!"
블로우의 목소리에 한 여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전할 말이 있어서 왔다.
루비몬테르."

고개를 돌린 채로 블로우와 이아나를 바라본 자는, 다름아닌 루비몬테르였다. 그녀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동자에 둘을 담아내면서도 입을 열었다.
"....당신이 진짜 왕일리 없어."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다시 예전의 일을 기억해냈다. 알이던 자신을 버리고선 어디론가 가버리는 진짜 왕.
자신을 버렸던, 그런-

"진짜는 날 버리고 가진 않았을 테니까. 당신은 언제까지나 가짜야...!!
가짜라고, 가짜....."
루비몬테르의 보랏빛 눈은 녹아내렸다. 언제까지나 따뜻한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내릴 때, 블로우는 그녀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이게 뭐지?"
"받아두어라. 원래 왕의 힘이다."
"......!"
루비몬테르가 쥔 것은 노란 색의 마석 덩어리였다.
"리더시스 디 아르티엔의 몸에서 빼온 것이다. 차기 왕이 될 자가 있으니 더는 진짜 왕을 위한 보험이 필요없어졌지."
"그렇다는 건...."
"그래."

블로우는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루비몬테르의 선명한 두 눈과 마주보고 나서야 그는 확고히 그의 뜻을 전했다.
"네가 다음 왕이다 루비몬테르. 이 힘을 가지고 부디, 나와 같은 실수는 하지 말아다오."

"........"
알겠다는 대답도, 거절도 하지 않은 루비몬테르의 몸으로 손에 쥐고 있던 마석이 스며들었다. 그녀 스스로도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려 하지 않던 것을 떠올리며.


'...진짜 왕이 맞아. 맞았어..'

"죄송...했습니다...."

루비몬테르의 옆에 서 있던 다른 마물들이 그들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주었다. 블로우는 그녀의 사과를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자리를 떠났다.


루비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더 이상 쓸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
-
-





"고개를 들어라, 시리우스 파뉴 드 리리네."

"......."
리네가 말 없이 명령에 따랐다. 손과 발에 묶여있던 족쇄는 움직임에 따라 금속 소리를 자그맣게 냈다.

헝클어진 짧은 보라색 머리. 온데간데 없는 트윈테일. 말라버린 입술과 초췌한 눈빛.
감옥에 갇혀있게 된 지 약 7일이 지난 날 밤. 직접 리네를 맞이하러 온 레노아는 철창 안의 리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린이 널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 면회가 끝나면 곧바로 형이 집행될 것이다."

얼굴을 약간 끄덕이며 뒤에 서 있던 병사에게 신호를 보내자, 감옥으로 들어오는 커다란 문이 열리며 린이 들어왔다.
사라져버린 트윈테일. 리네와 같은 멍한 눈빛.
보라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안으로 들어온 린을 보고 레노아는 모두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레노아를 제외하고 모두가 나간 것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문을 닫고 옆의 의자에 앉았다. 두 자매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듣겠다는 생각이었다.


"......왜 그랬어."
차가운 철창을 매만지며 린이 물었다.
"왜 죽인 거야, 사람을."
리네는 두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두 팔에 뻐근함이 느껴졌다.
"...언니를 지키려고. 나 때문에 언니가 더 이상 자라지 못했으니까."
"난 그런 건 괜찮아. 네가 날 보호하려 드는 게 싫었을 뿐이야."
"지금도 내가 싫어?"

린은 철창을 꽉 쥐며 말했다.
"정말 싫어. 그런데도...
죽길 바라지는 않아......"


"....언니, 고개 좀 들어 봐."
"......."
철창 앞으로 바짝 다가온 리네는 린의 어깨를 매만졌다. 두 팔에 끼워진 구속구에 철창까지 더해져 그녀에게 닿는 것은 힘겨웠지만, 리네는 린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언니. 언니는 잘못 한 거 없어.
잠시 뿐이지만 이드리스를 도우려고 했던 건 나 때문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잖아. 그때의 잘못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되 다시는 그러지 않음을 결심하면 되는거야. 결국 언니는, 황녀님을 살린 은사잖아..."
"....내가 너보다 나빠. 난 사람을 살리는 데에 망설였어. 한 번뿐인 기회를 망설였다고."
"누구나 다 그랬을 거야. 원망하지 마."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다독이는 리네를 보자마자 린은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황녀님. 리네가 정말로 사형인가요..?
형을 다시 집행하지는 않는 거에요?"


"...빙설능력자 '아만다' 와 전격능력자 '시로아' 의 살해죄로 형은 사형이다. 켈른 제국에서 사형을 엄격하게 다스린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터."
"하지만....!
이제서야 다 해결할 수 있었는데, 리네와 오해를 푼 것 같았는데-!!!"
린의 비명과 함께 그녀의 주위로 가시덩쿨이 솟아났다. 빙설의 마녀가 되어버린 레노아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린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어디에도 쏟아부울 수 없는 억울함과 분통함이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것이었다.


"들어와라."
레노아가 방 밖의 병사들을 불렀다. 이윽고 감옥 안으로 들이닥친 병사들은 철창을 껴안은 채 리네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린을 끌고 갔다.

"리네!! 리네-!!!!!"

"-언니...!"

거칠게 족쇄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리네는 끌려갈 수 밖에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린을 향해 소리치는 것만큼은 할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미안해..."




끼이익-
쾅.


리네를 끌고 간 쇠창의 문이 무겁게 닫혔다.

지하감옥에 남아있는 것은
쓸쓸하게 홀로 서 있는 린의 뒷모습만이었다.



-





"멈춰라-!!!!"


"윽....!"
렌이 뒤를 쫓던 한 남자가 휘청거렸다. 부러진 갈비뼈와 턱, 힘 없이 축 늘어진 팔은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겠는데.'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옛 침식이 있던 땅 위에는 숨을 공간조차 없었고 이미 켈른군은 그를 뒤쫓아오고 있었다.


"더 이상 갈 곳은 없다,
이프."
"....킥. 도망쳐서 겨우 다다를 곳이 켈른군 감옥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이프는 켈른군의 앞에서 그들을 지휘하는 렌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쪽이 황태자인 건 보자마자 알았어. 켈른제국에는 수도 없이 많이 왕래했으니까. 그래도."

이프의 손에 그려져있던 힘의 기사의 표식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그 날 밤 싸움으로 인해 뮬은 이프를 기사에서 제외시켜버렸고, 그 효력은 이제서야 나타난 것이었다.
이프는 싸울 힘도 없지만 싸워봤자 더 이상 상대도 되지 않는다. 그랬기에 이프는 힘 없이 두 팔을 렌에게로 내밀며 말했다.
"...너한테 잡히는 것만큼 기분 더러운 건 없겠는데."


"유감이군 제노이프."

찰칵.

그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순순히 켈른군을 따라 걸어가려던 도중, 이프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아. 아스터 교수가 어디있는지는 안 궁금합니까?"
"필요없다."
렌은 손목에 걸린 시계를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
"지금쯤이면 만났을 거니까."

".....누구랑?"
"말해줄 의무는 없지."
"뻔하지. 뮬 님이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시시하다는 생각을 한 이프는 다시 물었다. 렌은 이번에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





"멈추세요. 아스터 프리헤니르!"


콰아앙-!!!


뮬의 주먹에 땅이 굉음을 내며 갈라졌다. 아스터는 그 진동에 넘어질 것처럼 주춤했지만 다시 일어나 앞으로 뛰었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드리스를 찾는 것이었다.

'분명 있었어, 고대룡은 실존하는 거였다고! 그런데 그 때 그 꼬맹이가...그 꼬마들이 이드리스를..!
내가 다시 살릴거야. 이드리스를 다시 살려서,
나를..우리 왕국을 다시....!!'

"이제 그만 하시지요, 교수님."
"아아악..!!!"
전속력으로 달리던 아스터의 발목을 뮬이 잡아챘다. 그 힘만으로도 아스터의 발목뼈는 이미 분질러진 듯 했다. 그녀는 아픔에 몸부림을 치고 눈물을 흘렸지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앞으로 간다고 해서 그곳에 답이 있다는 확신도 없었지만, 그녀에게 이드리스를 되찾을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이드리스는 소멸했습니다. 더 이상 부활할 수 없게끔."
뮬의 한 마디가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기 전까지는.
"이건 신의 뜻입니다. 이드리스는 당신의 앞에 나타날 수 없어요.
두 번 다시는."

".....아....아아....
싫어어어어-!!!!!!!!!"
아스터는 두 귀를 막고 소리를 질렀다.
울분이 함께 토해져나오는 서러운 소리였지만 뮬은 가차없이 그녀의 뒷목을 세게 한 번 내리쳤다. 그 바람에 그녀의 눈은 초점이 사라지며 감겨버렸다. 기절해버린 것이었다.


"당신은 용서하기에 당신은 지은 죄가 많습니다.
벌은 달게 받으십시오."
뮬은 그녀를 어깨 위에 짐처럼 들고는 길을 떠났다.

"이드리스와 한패였던 자들은 모두 켈른제국에서 사형으로 다스리기로 했으니까요."




-





"무슨 짓이냐, 여긴 로아의 왕궁이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아무나가 아니다, 비앙카 왕녀."
"당신은....!"
비앙카가 벽 뒤에서 걸어나오는 여자를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주춤거리며 뒤로 간 곳이는 또다른 벽이 나왔고, 사방의 문에서는 켈른군이 쳐들어와 그녀를 가로막았다.

"그래.
저번에 내게서 훔쳐가려던 물건 덕에 기억은 나나보군,
내 얼굴이."
레노아가 살기를 가득 품은 얼굴을 한 채로 비앙카를 향해 걸어들어왔다. 그녀의 목에는 예전, 비앙카가 켈른 제국의 왕실에서 훔치려고 했던 '리즈가 준'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이젠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귀중한 것.

"한 번만 묻는다.
비비안은 어디있지?"
"나, 나나나는 몰라...! 아직 궁으로 돌아오지도 않았고, 전쟁 후로는 실종되서 우리도 찾고 있다고!!"
비앙카는 자신의 멱살을 잡은 레노아에게 다급하게 대답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이것 좀 놓으라며 말하는 것도 잊지 않은 채로.

"...정말인가. 아니라면 너부터 사형이다."
"지, 진짜-"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
다시 한 번 비앙카를 매섭게 노려보던 레노아가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나던 곳에는,


"없어. 아무데도 없어.
예시카도 아스터도 이프도 린도 이드리스도
아무도 없어. 사라졌어. 그때 그 마력 이후로 없어졌어. 못 찾아. 찾을 수가 없어. 없어. 없어."

딱-
딱-.
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톱을 물어뜯는 비비안이 있었다.


"비, 비비안...! 언제 온 거야?!"
"......."
'반응을 보아하니 여태껏 실종되었단 말은 사실인 것 같군.'
레노아는 가볍게 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타박상과 갖가지 상처들이 회복되지 않은 채로 그의 몸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 궁으로 돌아온 거지?'
라는 생각이 들 때 쯤,


"...때문이야. 전부 다..
너 때문이야 마녀-!!!!!!"
비비안의 비명에 그들이 서 있는 건물이 흔들렸다. 곳곳에 세워져있던 조각상들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천장은 무너져내렸다.

"죽여버릴거야...갈가리 찢어버릴 거ㅇ-"


"시끄럽다."


콰아아앙-!!!!!


비비안의 머리가 바닥으로 짖눌렸다.


"꺄아아아아악-!!!!!!!!"
한꺼번이 밀려온 통증과 함께 그는 피가 난 머리를 움켜쥐었다. 비비안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던 레노아는 손을 한 번 털고는 일어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전대 빙설만큼이나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 레노아는, 눈빛과는 정반대가 될 정도로, 미세하게 떨릴 정도로 화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넌 특별히 직접 사형시켜주지."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는 얼음의 조각이 떠다녔다.




-




"........."
예시카는 바람이 맞이하는 곳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날 밤처럼이나 차가우면서 포근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항상 두 사람이서 붙어다니던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동생인 제레미가 없었다.


'...처음에는 어땠지.'
예시카는 자신이 생각하는 처음 제레미를 보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때 제레미는 갓난아기처럼 어릴 때가 아니었다. 글을 쓸 수 있을 때의 나이. 꼬불꼬불 지렁이마냥 기어가는 글자를 보며 예시카는 이런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귀엽네.'


'네가 내 손에 죽어갈 때는,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예시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 생각만 해도 아찔함에, 당장이라도 단단한 곳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제정신으로는 그때를 다시 떠올릴 수 없었다.

제레미는 피가 나는 머리를 하고, 바닥을 기면서도 예시카에게 말했다.
'누나, 나 몸이 이상해. 고장난 거 같이 말을 안 들어. 누나라도 여기 빠져나가. 건물이 무너질 거 같으니까.'


'...그때 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모르겠다. 거울이 없어서 못 봤어.
제레미는 봤겠지.
웃고 있었을까. 담담했을까.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나?



".....아."
'아. 생각났다.'
예시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도 모르게 힘 없이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닦아내며.

'울고 있었구나.'



그깟 복수가 뭐라고.
내가 인정받을 수 있으면 뭐가 크게 달라진다고.
어차피 상대는 신이었어. 싸워봤자 질 싸움이었어.
예지했어. 싸움 전에 봤다고. 우리가 완패해서, 뿔뿔이 흩어져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것을.
그래도...

'널 죽인 대가가 너무 혹독해서 안 믿고 싶었던 건데...'

아. 제레미의 능력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그 애가 날 누나라고 부르는 걸 다시 듣고 싶은데.



".....누나."


".......?!"

예시카의 분홍색 눈동자에서 멈추지 않는 눈물이 그녀의 앞을 가렸다. 소리가 나던 곳을 보기 위해 그녀는 눈물을 다시 한 번 닦아냈고, 그런 그녀의 앞에는-


"울지 마. 누나가 울면 어떡해!"


"제레미......"

파란 머리의 제레미가 서 있었다.



"...제레미. 제레미...!!"

예시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작정 앞으로 뛰어갔다.
자신이 건물 옥상에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로.



어쩌면 알고 있는데도 그 행동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비쳤던 제레미는, 그녀가 만들어낸 환상이었으니까.


그녀가 그토록 연구했던 '금지된 마법' 을 이용해 만들어낸 환상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높다란 건물에서 떨어진 예시카의 몸은.

이튿날 아침 학교를 순찰하던 칸 교수에 의해 발견된 예시카의 시신은.


바닥과 충돌한 얼굴을 제외하고는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다고 한다.

3
이번 화 신고 2019-08-17 09:49 | 조회 : 2,379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다음 화 외전! 이렇게 길게 쓴 것도 처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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