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시작과 처음(3)

"죽는 게 두려워졌어. 어쩌면 나도 죽을 수도 있을테니까.."
빛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습니다. 혹시라도 어둠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약간 고민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죽으면 환생을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인간들에게 기회를 여러번 주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인간들이 환생하며 전생의 기억을 모두 잃는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들은 인간들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기회조차 주지 않는 운명이란 것은 참으로 가혹할 테니.


어둠은 빛의 걱정이 아무 소용없게 느껴질 만큼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어루만졌습니다.
"우리 한 번 정해보지 않을래? 우리가 환생하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다른 누군가가 어둠의 말을 들었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지만, 빛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둠은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것에는 그리 능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해야 상대방에게 위안이 되는지를 잘 몰라했고 다른 이가 상처받아있을 때면 이런 식으로 위로를 해왔습니다.

"..좋아."
빛은 어둠의 행동이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연한 미소를 띄워보냈습니다.


어둠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신이니까 죽을 일은 없겠지만 아주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응. 난 마물들의 왕이 되고 싶어."
"마왕? 이유가 뭐야?"
"내가 만든 아이들이니까 내가 돌봐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지."
"음. 그렇구나."
빛은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유난히 마물들을 아끼는 어둠이니까 이해가 가는 결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뭘 원하는 걸까, 하고 생각해본 빛은 불현듯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습니다.

"난 인간, 그것도 아주 평범한 인간.
화목하고 평범한 집에 작은 소녀로 태어난 인간이 되고 싶어."
"왜 평범한 인간이 되고 싶은거야?"
"평범하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알 것 같았거든."
빛의 입에서 더 이상의 추가적인 설명이 나오지 않자 어둠은 고개를 돌렸습니다. 스쳐본 빛의 얼굴은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이었기에 그 회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빛의 머릿속에서는 인간들의 삶이 영화처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부와 권력을 누리는 인간들은 종종 더 불행해보였고, 가난하지만 평범한 가족들은 오히려 더 행복해보였습니다. 실상이 어떠한지는 빛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평범한 가족들도 때때로 불행할 때가 있을 테였습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간에 빛이 볼 때마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광경은, 평범한 이들의 삶은 오히려 더 잔잔하고 평화로우며 조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어때?"
회상이 다 끝났는지 빛은 입을 열었습니다. 빛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 뒤돌아있던 어둠은 빛의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빛은 그런 어둠에게 제안했습니다.

"다음 생에서도 우리가 죽는다면,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쌍둥이 남매가 되자."
"쌍둥이 남매?"
"응. 서로를 정말 아끼는."
"그건 지금도 하고 있잖아."
"하지만 지금은 신이잖아, 인간으로든 마물로든 쌍둥이 남매가 되는거지. 만일 쌍둥이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쌍둥이로써 살아가는거야."
"좋아. 그게 가능하다면."

빛과 어둠은 잠시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후 민망함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지만 둘의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라있었습니다.

"....오늘따라 햇빛이 뜨거운 것 같아."
"그러게."


빛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뱉은 어둠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조용한 그들에게로는 구름 사이에서 내려온 햇빛이 품어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얼굴을 들지 못했지만 둘 모두 서로의 감정을 알 것만 같았기에 왜 자신을 보지 않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렇게 짧던 그 순간을 계속해서 곱씹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 어떤 누구도 그들에게 위기가 닥칠 것이라 예고해주지 않았습니다.

"큰일났습니다!"

어느 날 이드리스가 어둠에게로 빠르게 날아왔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훨씬 더 다급해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어둠의 직감을 키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건가-' 하는 어둠의 직감을.
그녀의 드래곤인 로지와 함께 어디론가 가 버린 빛을 대신해 어둠은 그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때마침 이드리스가 그에게로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어둠이 왜 그러느냐고 이드리스에게 묻기도 전에 이드리스는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인간들이 서로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있습니다. 단지 자신들에게 식량을 조금 적게 주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어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인간들은 가끔씩 작은 다툼을 가질 때도 있었지만, 그럴때마다 그 마을의 혹은 그 도시의 지도자가 그것을 통제해왔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이나 일이 지속되고 있어요.."

일주일씩이나 이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찾아나설 생각도 하지 못 한 채 곧바로 인간들의 마을로 내려가보았습니다.
"이건...."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그곳은 넓은 초원과 곳곳에 난 파란 꽃잎으로 물들어진 낙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둠의 눈에 담긴 것은 그저 그 아름답던 낙원마저도 뱃속으로 집어삼켜버리려는 검붉은 불길 뿐이었습니다.
인간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집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마법도 능력도 없는 그들은 그저 물을 길어와 집에 들이붙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작은 행동은 오히려 불길을 더 거세게 키울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불길 앞에서 평등하게 무능했습니다.

어둠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았습니다. 그가 보고 있던 그 마을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들이 사는 곳의 거의 대부분이 불에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대체 왜?
원초적인 물음이 그를 덮쳤습니다. 먹을 것을 평등히 나누어주지 않은 것은 분명 그들의 잘못이기는 하나 모두가 마을을 불태우는 것이 옳은 행동은 아님을 어둠은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넌 여기서 인간들을 지켜라."
어둠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드리스를 남겨두고 그들의 세계로 갔습니다. 인간을 만드는 데에 관여한 것은 빛이었습니다. 이 대규모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빛과 함께 얘기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블로우!"
어둠이 빛을 찾으러다니던 와중에 그의 뒷통수에 대고 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다름아닌 빛이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발견하자마자 그녀에게로 달려가며 말을 꺼내려했습니다.
"인간들이-"
"큰일이야. 마물들이 이상해."

"뭐?"
그의 입을 막으며 동시에 할 말을 없게 만든 빛의 한 마디는 짧고도 묵직했습니다.


"모두 싸우고있어. 몸집이 작은 스키피부터 큰 우피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서로 싸우느라 마계가 엉망이야."
"....인간계도야. 식량을 나눠주지 않았다며 큰 도시부터 아주 작은 마을까지 전부 불에 타고 있어."
"그게 정말이야?!"
빛은 어둠의 말을 듣고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둠 또한 그렇게 말한 후 빛의 말을 곱씹으며 절망했습니다. 대체 왜 마물들까지 이런 일이 일어난것이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 때 그들에게로 이드리스가 다가왔습니다. 어둠은 빛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자신이 이드리스에게 인간계에 남아있으라 말한 사실도 잊은 채 그녀를 절망섞인 눈으로 맞이했습니다.

"...사실 이것을 말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빛과 어둠에게로 다가온 그녀는 다짜고짜 이런 말을 내뱉었습니다.
"마물과 인간들의 이상행동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그 둘은 이드리스의 말에 더욱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일. 모두 창조와 관련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빛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드리스를 노려보았습니다. 창조는 그들이 만들어낸 첫 생명체이자 생명을 낳는 또 다른 그들이었습니다. 창조가 인간을 만들었고 마물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창조를 의심한다는 것은..


'잠깐. 창조가 인간과 마물을 모두 만든 건 맞아. 그걸 아는 이드리스가 이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이 일을 모두-'


""창조의 짓이야?""

빛과 어둠은 동시에 이드리스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그녀는 잠깐의 정적 이후 조용히 고개를 두 번 끄덕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둘은 모두 적잖이 충격을 받은 표정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습니다


"....현시간부로 모든 마석에게 명한다, 지금 당장 빛과 어둠이 있는 곳으로 모인다. 시간은 인간의 시간으로 1시간. 조금이라도 늦는 마석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소멸이다."
어둠은 마석들의 머릿속으로 목소리를 흘려보냈습니다. 빛은 어둠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머리를 손으로 가만히 짚고 있었습니다.

"가자."
"응."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빛은 어둠에게 말했습니다. 어둠은 가볍게 대답을 하고 빛과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잠깐, 어디를..!"
이드리스는 빛과 어둠에게 어디를 가는 것이냐고 물어보려했지만 그러기엔 둘의 속도가 너무 빨랐습니다. 빛과 어둠의 뒷모습은 점점 더 빠르게 멀어져갔습니다.
이드리스는 아무 말 없이 둘의 뒤를 보고만 있다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할 때가 아니라 움직여가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빛과 어둠은 창조에게 갔겠지. 그렇게되면 일단 절반은 성공한 거야. 그럼 난...'

"로지를 찾으러가야겠네."
이드리스의 피같이 검붉은 눈이 불빛에 비쳐 더욱 더 빨갛게 보였습니다.



-
-
-



"아뇨, 그건 거짓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지만 전 정말 억울해요!"

빛과 어둠을 향해 무릎을 꿇은 창조의 눈에서 여러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창조를 내려다보는 둘의 눈빛에는 어떤 자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창조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어떤 이유든지 자신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면.
억울하다느니, 내가 한 짓이 아니라는 말들은 소용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입만 아프게 헛짓을 한 것 뿐.


어느 새 그들의 주위로는 모든 마석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빛과 어둠 그리고 창조를 둥그렇게 둘러싼 채 셋을 보고 있었습니다.

"인간과 마물을 만들 때 공통적으로 들어간 힘이 바로 창조 너의 힘이다. 그리고 지금 그 둘이 죄를 저지르고 있으니, 그 잘못은 너에게 있는 것이다."
"죄를 지은 마석에겐 처분하는 것 뿐."
어둠이 손을 들어 창조의 목을 겨누는 어둠의 검을 꺼내들었습니다. 검푸른 색의 마력이 검에서 묻어나왔지만 창조는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습니다.

"아, 아하하하. 그래. 마음대로 하시죠."


"드디어 미쳤구나."
그 모습을 본 빛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아니. 미친 건 내가 아니라 얄팍한 술수에 넘어간 당신들입니다."


창조의 이가 으득거리는 선명한 소리와 함께 갈렸습니다.
"천 년이 지나고 만 년이 지나고 또다시 억 만년이 지난다해도, 너희를 증오하겠다. 너희는 모든 마석의「적인」, 절대 용서받지 못할 생명체. 모든 이가 떠받드는 신에서 고작 저주받은 능력 따위로 치부받는 인생을 살아보아라."
그녀의 눈에서 피같이 붉은 눈물이 단 한 줄기 흘러내렸습니다.


"목숨이 당장 날아갈 상황에서도 입만 살았군!"
꺼림칙함에 잠시 망설이던 어둠의 검을 빛이 대신 잡아들었습니다.


"당신들을 증오합니다."

마지막 순간, 소리는 나오지 않던 창조의 입이 뻐끔거렸습니다. 그 의미를 알아챈 빛이었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은 한순간에 벌어졌습니다.


"...어?"

잘려나간 창조의 목은 반짝이는 마석이 되었습니다. 그것 뿐이었다면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문제라고 한다면 그 뒤에 이어나올 것이었습니다.


"으아아악-!!"
마석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다. 아주 오래 전 빛과 어둠이 그랬던 것 처럼. 돌처럼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딱딱히 모두 굳어버린 마석들은 반짝이는 색깔을 머금은 채 힘 없이 인간계로 떨어져내려갔습니다. 그것들은 인간들의 땅에 부딪히며 수많은 파편들을 만들어냈고 그 파편들은 근처에 있던 인간들의 몸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많은 양의 마력을 버텨낼 수 있는 인간은 없었던지라 대부분의 인간들은 한 영혼과 한 몸 안에 하나의 마석파편만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살려주세요 태초신이시여, 마석이 되고 싶지 않아요...!"
힘은 멈추지않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빛의 팔을 붙잡으며 울부짖었습니다. 빛의 머릿속으로 인간들의 얼굴들이 모두들 지나가는 듯 했습니다. 죽고싶지 않다며 울부짖던 이들의 얼굴들, 마석들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눈물들.


"창조의 잘못이 아니었어."
"....뭐?"
어둠이 나지막한 빙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빙설 또한 힘과 마찬가지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힘처럼 태초신에게 애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째서 창조를 죽인 것이지?! 그건 명백히 창조의 잘못이 아니었어, 억울한 누명이었다고!"
"맞아. 창조를 죽인바람에 우리모두가 소멸되고 있는거야!"
빙설의 외침을 들은 공간이 빛과 어둠 모두를 향해 같이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소멸한다는 두려움과 절망감을 어디론가 표출시키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앳된 마음에 빙설이 한 말이, 태양보다 타오르며 달빛보다 차가운 시선을 함께 내뱉은 그 말이, 세계를 단번에 뒤바꿀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었습니다.


"너희 둘을 평생 저주하겠어."

3
이번 화 신고 2019-05-20 07:36 | 조회 : 1,823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뽀글뽀글뽀글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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