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여우비(2)

"비가..."

미림이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흐르는 빗방울을 만져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기계같은 손가락으로 흘러들어왔다.

예전에 호수에 한 번 빠졌을 때, 오페라가 와서 방수처리를 해주었기에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또 물에 오염되어 작동에 오류가 났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비는 내 예상이 맞다면 분명 「끝비」인데, 역시 저 쪽의 싸움은..
빙설의 마녀..!''

미림이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주 먼 거리였지만 확대기능을 사용하여 방어막의 앞에 리즈가 쓰러져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 있으면 비가 쏟아지겠지.''
미림이는 고개를 바닥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곳에는,

"으으....
그럴리가 없,어.... 내가, 이깟 인형한테 질 리가아....!!!"

분함에 부들거리며 고함을 지르는 비비안이 있었다.
그녀, 아니, 그가 그렇게 바닥에 널브러져 뒹굴고 있는 이유는-...


-




''미림아, 너에게 내 능력을 빌려줄게.''

미림이의 머릿속에서 울린 오페라의 말을 마지막으로 둘의 교신은 끊어졌다. 그리고 미림이의 몸에서는 오페라의 것이라고 증명하는 듯한 분홍빛의 마력이 일렁거렸다.

비비안은 그 마력을 혐오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인형주제에 어떻게 이렇게 인간처럼 움직일 수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이젠 그렇지도 않아.
중심부에 있는 마력까지 전부 내 능력 「인챈트」로 뽑아내겠어."

비비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실과 같은 가느다란 무언가가 뽑아져나왔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능력, ''인챈트''.
생명이 깃든 것이든 아니든 물체에 들어있는 마력을 한 마디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능력.


''확실히 나에게 있어서는 상성이 좋지 않아. 내 몸 속에 흐르는 어머니의 마력을 뽑아내버리면 난 운동을 멈춰버릴테니까.
하지만 그건, ''
어머니에게서 능력을 빌려받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눈을 번쩍 뜬 미림이의 눈동자에 오페라와 같이 별 모양이 새겨져있었다. 공간의 능력을 이어받았다는 일종의 증표.
이어받다기보다는 빌리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겠지만, 마녀의 능력을 빌려준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기에 어느 표현이나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
비비안은 흠칫했다.
분명 이쯤했다면 미림이의 몸 속에 있을 마력은 동이 났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해도 해도 끝이 없는거야, 어째서...!''



"괜찮으세요?
몸이 고장나신 것 같은데요."
".....!"
미림이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은 후에서야 비비안은 자신의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무리해서 마력을 사용한 것이 그 이유였다.

덤으로,
미림이와 비비안 둘 사이의 공간의 틈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 또한.

오페라에게서 받은 공간의 능력이었다.
그것이 바로 뽑아도 뽑아도 마력이 동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미림이의 몸에 흐르는 마력들의 공간 자체를 넒혀버리면 비비안은 그의 마력을 없애버릴 수가 없다.


"몸이 버티질 못하는 거군요. 피까지 토하는 걸 보니 많이 심한가보네요."

미림이는 한 걸음씩 비비안에게 걸어갔다.
그들 사이의 셀 수도 없이 멀었덤 거리는 미림이의 걸음걸이마다 크게 좁혀졌고 이내 두 사람은 손만 벌리면 닿을 거리가 되었다.

"오..오지 마...!!"
비비안은 황급하게 뒤로 물러서기 위해 뒷걸음질을 쳤지만 둘의 거리는 변함이 없었다.


"많이 아프신가요?
저 같은 인형따위는 감각센서를 꺼버리면 그만이라 공감할 수가 없네요. 인형보다도 못한 몸이셔서 그런걸 어쩌겠나요."
"뭐..?"

비비안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자신보다 항상 아래라고 생각하며 깔봐왔던 인형에게 뭉개지는 것이 이유였다.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아-!!!!"
분함을 이기지 못한 비비안은 품 안에 숨기고 있던 작은 칼을 손에 쥐었다.
코 앞까지 다가온 미림이의 목을 향해 단검을 겨누며, 힘차게 비비안은 달려갔지만
그에 반해 미림이의 반응은 냉담했다.

"........"

''어디 해볼테면 해봐라'' 라는 듯한 눈빛.


까앙-!!

날카로운 날붙이와 쇳덩이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비비안의 단검이 저 멀리로 날아가버렸다.


".....!
무, 뭐야, 왜.. 칼이 들어가지가 않아..?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미림이의 목에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포기하시는 건가요, 비비안?
그래도 조금 더 노력해보세요. 저 같은 한낱 인형이 마력을 가지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자...
한참 남았어요."

미림이는 이제 공포이 질린 듯한 비비안의 손을 꼭 잡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비비안의 귀로 들어오자 그녀의 온 몸이 소름이 끼쳤다.



"아직 반의, 반의, 반의, 그 반의 반, 또 그 반의 반 만큼도.
줄어들지 않았으니까!"


콰아앙-!!!

비비안의 온 몸을 강타하는 커다란 충격에 그녀는 맥 없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욕심이 과했군요 비비안.
당신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우리의 헬리오스와 모두를 지켜낼것입니다.
그만 죗값을 치르세요."

미림이는 기절해버렸는지 아무 말이 없는 비비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 둘 사이를 둘러싸던 분홍색의 거대한 공간도 걷히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앗. 힘이 빠져나갔다.''

미림이는 순간적으로 몸이 조금 무거워진 것을 느끼고는 ''오페라가 빌려준 능력이 빠져나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내 쪽도 정리가 되었으니 이젠,
저쪽인가!''

미림이는 잠시 쓰러진 비비안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지만 이내 리더시스와 이엘, 린 그리고 카밀리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렌과 리나가 있는 곳은 방어막의 가장 가장자리였지만 그곳은 인파가 너무도 몰려있어서 무언가 말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비비안을 체포해달라는 말 조차도.


''..다들 무사하겠지.
어떤 사람들인데. 지지는 않았을거야.''
그들을 굳게 믿어야 해.

미림이는 이러한 생각으로 리더시스가 서 있을 곳을 눈으로 찾았다.
몇 번을 좌우로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그는 저 멀리에 주저앉은 네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엘 씨, 린 씨, 카밀리 씨, 리더시스 씨-!!"
바로 저거다- 라는 생각으로 넷의 이름을 소리치며 달리던 미림이는,


"..무사했나보네."
"다행이다..."
"미림이라구?"

"그런데..
뭐라고 말하는 거야..?"



"-!!!
저건...!"

그들을 향해 날아가는 거대한 무언가의 형상을 보고는 흠칫하며 다시 외쳤다.


"피하세요-!!!!!!"




-



"어렵게 찾은 적임자였습니다.
대부분은 왕의 힘을 넣자마자 온 몸이 터져 죽어버렸으니까."

리스펜은 눈동자를 돌려 리더시스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이제 왕은 부활하셨으니,
죽어버려야겠습니다..."


"안 돼-!!!!"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블로우는 소리를 지르며 리스펜을 막으려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리더시스를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
미림이의 말을 어렴풋이 들었는지 리더시스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러던 도중 다가오는 리스펜을 바라보았다.

분명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리스펜은.
드래곤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리더시스는 그런 리스펜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그것이 리스펜이라는 사실도 알 수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리스펜?"

"........!!!"

리더시스는 리스펜을 알아보았다.


리스펜은 잠시 주춤했다.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약간 움찔하였으나, 이미 그는 리더시스를 죽이겠다며 그의 왕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죽이겠다고 결심했으면, 죽이는 것이다.

죽이겠다고 결심했으면,

''죽인ㄷ-''


촤아악-.


"어....?"
리더시스의 얼굴 위로 푸른 색의 피가 쏟아져내렸다.


"꺄아악!!!"
"이건 또 뭐야..!
리더시스! 어서 이리로 와!!"
카밀리는 칼이 관통당해 피를 미친듯이 쏟아내는 리스펜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피했고, 이엘은 피를 맞아 정신이 없어보이는 리더시스에게 피하라며 소리쳤다.


"....왕이시여
진정 저를 죽이려 하시는 겁니까...?"

리스펜은 등과 배를 동시에 관통해버린 기다란 검을 보며 부들거렸다. 그 검의 끝을 힘껏 잡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블로우였다.
리스펜이 리더시스를 죽인다며 날아갈 때 블로우는 그 뒤를 따라나선 것이었다.


"루드..?"
리스펜의 거대한 날개 틈 사이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 블로우의 얼굴이 보였다.


"리더시스, 뭐 해! 이쪽으로 피하라니까?!"
계속해서 리더시스를 부르는 이엘의 목소리를 듣고도 리더시스는 망설였다.


하나는, 무표정으로 리스펜에게 공격을 가하는 블로우의 얼굴에서 아주 작은 슬픔의 조각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이유였고.
두 번째는, 그동안 자신을 지켜주었다고 생각한 리스펜이, 자신을 공격하려 들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정말로 날 죽이려 했어?"

"저 멍청이가...!"
혹시라도 블로우의 근처에서 서성이는 디오나, 리스펜이나, 최악이긴 하지만 그들의 친구인 루드가.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이엘 자신을 공격할까 두려움을 느꼈기에 이엘은 섣불리 리더시스에게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저 약간 떨어져 그에게 계속 소리칠 뿐이었다.


"대답해 줘 리스펜."
"그래. 너 같은 인간 따위를 내가 진정으로 위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난 그래도 용서할 수 있어."

죽어가는 리스펜에게 리더시스가 말했다.
순간 리스펜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지만 이내 다시 돌아오며 그는 맞받아쳤다.


"용서?
인간 따위가 내게 용서를 한다니 웃음도 안 나오는군."
"처음에는 안 좋은 이유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잖아."
"네 까짓게 뭘 안다고 지껄이지?"

날카롭게 날이 선 그의 질문에 리더시스는 약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함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알아. 알 수 있어.
넌 지금, 망설이고 있잖아.."

"......!"
리스펜의 얼굴을 한 순간에 당황함으로 가득하게 만들 수 있었다.



''주마등.''

리스펜의 머릿속에서 영상이 틀어지듯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모두 떠올랐다.


인간과 너무도 닮은 외관에 마물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아주 오래 전의 일부터 왕과의 첫 만남, 그와 함께하던 일들, 왕의 죽음과 부활, 그가 완전히 부활하기까지 새로운 왕을 만들기 위한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난 리더시스.
십 여년간 리더시스의 가문에서 지내며 그와, 그의 가족과 함께 지낸 시간들, 그리고 마침내 만난 진정으로 부활한 왕까지.

리스펜은 계속해서 부정했다.
백 여년을 넘게 살아온 자신에게 있어서 겨우 십 년의 시간이 인간에게 정을 들게 한다니.


''리스펜!''

하지만 그 생각은 모두, 어릴 적 자신을 부르던 리더시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라졌다.
순수함으로 가득 차 언제나 웃으며 리스펜의 이름을 부르던 리더시스.


".......제가 틀렸던 것 같습니다.."
그 어떤 것도 증오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언제부터 인간을 무엇보다 증오하게 되었는지..

리스펜의 들릴 듯 말 듯한 중얼거림은 그의 몸과 함께 안개처럼 공기에 스며들며 사라져갔다.



"리더시스 씨-!!
다친 덴 없으세요?!"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야 미림이는 리더시스가 있는 곳에 달려와 도착을 했다.
그는 모두의 반응을 보고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그 앞에 서 있는 블로우를 보고 잠시 얼음이 되었다.


"......."
블로우는 모두의 눈동자를 한 번씩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이아나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버렸다.

"루, 루드 씨!!"
미림이는 황급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붙잡아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루드의 속도는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었기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정말..."

멀어져가는 블로우의 뒷모습을 바라만보고 있던 그들의 뒤로 디오의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넘기는 인간 ''디오 바루스'' 가 서 있었다.


"디오 씨!!!"
"너무 그렇게 소리 치지 마- 나도 어떻게 된 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확실한 건..."

'그들을 지켜라. 디오루그.'

"너흰 절대로 죽으면 안 돼."

디오는 자신에게 당부하던 블로우의 목소리를 기억해내며 중얼거렸다.

4
이번 화 신고 2019-02-27 09:44 | 조회 : 1,733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하나 만들어오는 데 5일정도 걸리는 거 같아요 아마 일주일에 한번씩 오게 될 듯ㅜㅜㅜ 완결나기까지 진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빨리 해야게써요!

후원할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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