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여우비(1)

타앙-!

"리즈 님, 뭘 하시려는 겁니까..?!"

레노아는 리즈와 자신들을 가로막은 방어막을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얼음보다 단단한 그 방어막은 그리 쉽사리 부서지지 않았다.


투명한 얼음같은 방어막 너머로 리즈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차가운 발걸음을 내딛으며 이드리스에게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리나!"
"-!!"
렌은 방어막의 옆에 서 있던 이아나의 옷깃을 붙잡았다.
초조한 눈빛인 그는 리즈가 무엇을 할 지 예상하고 있는 듯 했다.


"부탁이야, 어서 방어막을 없애줘. 그렇지 않으면 리즈가-"
"-리즈의 부탁이야. 렌."
애원하는 렌을 본 이아나는 약간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렌의 말을 끊어버린 그녀는 렌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단호한 그녀의 눈빛에서 렌은 잠시 리즈를 찾을 수 있었다.


이아나는 고개를 돌려 레노아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치유된지, 다시 말해 되살아난지 시간이 오래 지나지않았기에 그녀는 힘이 안정되지 않아있었다. 그랬기에 레노아는 힘이 약간 빠졌는지 주저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노아는 계속해서 리즈의 이름을 불러댔다.
애타게 뒷모습에 대고 리즈를 부르는 레노아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처량했다.


이아나가 레노아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마녀님이 부탁하신 겁니다 황녀님.
모두를 지켜달라고, 켈른의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해 달라고.
이 방어막이 절대로 뚫리게 하지 말아달라고."

"...리즈 님은 무엇을 하려는 것이지?"
레노아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아나에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눈물이 젖어있었다.

그리고 레노아가 질문을 던진 순간 리즈는 걸음을 멈추었다.



"제 발로 기어나오는 인간이 있다니 웃기는군. 이봐 이드리스, 저 인간은 먹어치워도 되는 것인가?"
리즈를 내려다보던 한 드래곤은 입에 고인 침을 한번 꿀꺽 넘겨내렸다.

이드리스는 잠시 리즈를 바라보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지금당장은 너무 이르고, 잠시 후 내가 엄호하면
그때 먹어치워라."


".........."
리즈는 그들의 눈을 천천히 감은 채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리즈가 하려는 것은...."
이아나는 레노아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망설이며 시선을 약간 돌렸다.
돌려버린 그녀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을 레노아는 보았지만, 차라리 못 보았던 것이 나을 뻔 했다.

흔들리는 이아나의 눈동자는 리즈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리즈가 용들을 상대로 하려던 건,
자신의 운명을 마력으로 바꾸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운명의 시간이 존재한다.
어느 순간 그 운명의 끝자락에 도착하게 되면 인간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리즈가 하려는 것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운명의 시간' 을 최소한만 남기고 모두 마력으로 되바꾸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된다면 리즈는 그 남은 운명의 시간동안 가질 수 있을 마력들을 한번에 가지게 되는 것이다.
평소 리즈의 마력, 그의 몇 십, 몇 백배의 마력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


그리고 다른 의미로는
'...나는 죽는다는 의미.'

수명을 마력으로 바꾸는 마법은 마녀들밖에는 할 수 없는 행위이다. 그리고 지금 싸움이 가능한 마녀는 빙설 뿐.
자신밖에 희망이 없다고 리즈는 스스로 생각했다.


그 많은 마력을 가진다면 분명 드래곤들을 죽일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켈른의 아이들은 무사하겠지.


'그거면 됐어. 나는..
그거면 충분해...'
더 바랄 것도 없이 나는 그들이 멀쩡히 살아남기만을 바라니까-.

리즈의 감았던 두 눈이 스르륵 떠졌다.



"아...안돼..
리즈 님, 안됩니다, 리즈 님...
제발!! 돌아오세요 리즈 니이임-!!!!!"

이아나의 설명을 들은 레노아가 울부짖었다.
그 강인하던 얼굴에 눈물의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레노아는 계속해서 리즈를 불렀다.

''이대로는 보낼 수 없어..
켈른을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저 밥통이를 위해서라도....!''




리즈가 서 있던 바닥의 주변으로 복잡한 마법진이 조금씩 생겨났다. 마법진에서는 검은색의 마력과 하얀 빛의 마력이 동시에 뿜어져나와 리즈의 온 몸을 휘감았고, 그녀의 두 손에는 얼음의 마력이 맴돌았다.


마침내 그녀는 최후의 마법주문을 외웠다.

"「리버스」-
피어나라 얼음의 꽃이여."


"...지금이다.
사이라 드리니아, 이제 저 인간을 먹어치워도 좋다."
"아하-!!"

이드리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의 옆에서 날개를 펄럭이던 한 용이 앞으로 나섰다.
그 용은 리즈를 어지간히도 먹어치우고 싶었는지 군침을 한번 삼키며 말했다.

"거 엄청나게 뜸 들이시네 이드리스 님~
그럼 어디, 몇 천년만에 맛 보는 인간은 맛있으려나-"



후두둑-!!!

리즈에게로 날개를 들이밀던 용의 붉은 피가 마치 비처럼 사방에 흩어져내렸다.
그리고 드래곤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시체도 볼 수 없게 흔적도 없이.


"......."
이드리스는 약간의 초조한 눈빛으로 리즈와 주변의 드래곤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드리스가 그들을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주위를 가득채우고 있던 드래곤들이 차례대로 죽어나갔다.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폭발음으로 용들의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엄청난..
마법...."

엔디미온은 죽어가는 용들 사이에 우뚝 솟은 리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비록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죽음이라 할 지라도, 그녀의 마법은 미칠듯이 아름다웠다.

마치 꽃과도 같은 그녀의 얼음이 방어막의 밖에서 피어났고, 용들의 피는 장미잎과도 같은 붉은 색으로 검은 하늘을 뒤덮었다.


"젠장, 이건....!"
이드리스의 눈빛이 약간의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리즈의 운명의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면 그녀의 마법은 그 자리의 모든 드래곤들을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드리스 자신을 포함하여.


리즈의 행한 마법은 운명의 시간을 마력으로 바꾸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그 마력들을 다시 한 곳에 모아담아, 하나의 범위를 설정해, 그 범위 내의 생명체들을 랜덤으로 죽이는 마법. 다시 말해 리즈는 그 마법의 범위를 드래곤들이 난무하는 하늘로 잡았고, 이제 그녀의 마력은 용들을 막무가내로 죽이기 시작할 것이라는 말.

그녀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면 그 자리의 모든 용들을 죽일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다는 아니더라도 드래곤들을 죽일 수 있다.
이드리스가 죽을 확률도 만들 수 있다.

그녀의 목숨을 걸 수도 있는 확실히 가치 있는 마법.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지켜주마, 저주 받은 이여."

생명력을 잃어가는 리즈의 몸은 그만큼 지쳐갔지만, 차가운 눈동자만큼은 또렷이 이드리스를 담을 만큼 분명했다.


"네가 오늘 이후로 이 땅을 밟을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털썩.

리즈는 이드리스를 향한 독기 품은 말을 마지막으로 땅에 쓰러졌다.
그녀보다 더 차가운 것은 없을 것이라고 다들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가울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죽어가는 사람의 몸에서는 온기가 느껴질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 와서 죽인다고 해도 마법은 발동된 상태-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이 상황을 그저 손 놓고 지켜봐야만 한다는 말인가....!!'

이드리스는 분함에 온 몸을 떨었다.
지금은 밤하늘에 가려져 떠오르지 않은 태양만큼이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리즈를 노려보았다.

한 번 죽었다가 부활하면서까지 세계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싶어했는데, 겨우 이깟 마녀의 한낱 마법 따위에 당해버린다면 모든 것은 헛수고이다.


심상치않은 기운을 풍기던 하늘에는 어느 새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
이아나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목구멍에서는 무언가가 점점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아나는 알고 있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차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어쩌면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먹구름의 뒤에 모습을 가리고 있는 것은 분명
「끝비」일 것이라고.
반짝이는 별과, 빛나는 달을 가리며 다가오는 저 먹구름은 분명 피하지 못할 운명도 함께 가지고 오는 것일 거라고.


모두의 눈 앞에 있는 드래곤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리즈의 마력을 담아낸 그 마법은 마치 불꽃놀이와도 같이 아름다웠다.
정말,
모든 것을 잊어버릴 만큼.


"....아름답구나."
예시카는 먼 발치에서 터져가는 드래곤들을 구경하며 중얼거렸다.


리즈는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점점 닳아가는 호흡과 맞추어지지 않는 초점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젠장.....!"
렌은 그런 리즈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
그리고 고개를 돌렸던 렌의 눈과 마주친 것은 시리우스 린의 눈이었다다. 그녀는 렌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린..."
렌은 린의 이름을 자그맣게 불렀다.
린에게서는 꽤 먼 거리에 렌이 있었지만 그녀는 렌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렌은 린이 레노아의 목숨을 살려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번만 더, 이번에는 리즈를 살려달라고 자신에게 부탁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놓고 부탁은 하지 못해도 분명 눈빛으로라도 그러한 분위기를 린 자신에게 풍길 것이고 린은 그 사실이 싫었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눈빛을 보기도 싫었고, 그보다 더 싫은 것은,
렌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린은 더 이상 이루어줄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소생의 능력은 단 한번으로 끝이니까.


"리즈 님, 조금만 버티십시요, 곧 있으면 켈른군이 올 테니 그때까지만이라도...!
그 때까지만...제발..."
레노아는 쓰러진 리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떨구었다.

그들에게 '곧 다가올 그 때' 같은 건 없다.
켈른군이 올 것이라는 말도 다 거짓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누구보다 켈른을 위하는 리즈도 알고 있다.


"...황녀 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리즈는 눈물을 흘리는 레노아에게 조용히 입을 열어 말을 건넸다.

"저희 켈른을 부탁합니다, 황녀 님."
"하지만... 태자가 된 건 레이안인데....?"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태자는 그의 친구와 함께 있을때가 가장 따뜻하다는 것을...."

리즈의 얼굴에 빗방울이 하나 떨어져내렸다.


"....아무래도 저의 운명의 시간은 그다지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여기 있는 저주받은 생명들을 모두 죽일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황녀님과 태자, 모두에게 뒤를 부탁하겠습니다."

그녀는 힘겹게 눈방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낀 어두운 밤하늘에서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끝비 」.


'아아. 이제야 알았습니다, 몇 백년을 살고 나서야.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봄」은, 언제나 나의 곁에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리즈 니이이임-!!!!!!!"

조용히 손을 떨군 리즈를 바라보며 레노아는 목놓아 울었다. 그 누구보다 울부짖으며 리즈를 찾는 레노아는 이아나의 방어막을 두들길 힘조차 생기지 않는지 축축해져가는 흙을 움켜쥐었다.


"........."
이아나는 그 모습을 보며 말 없이 눈물 한 줄기를 흘러보냈다.

리즈와 이아나는 첫 만남부터 그다지 좋지 않았다. 리즈는 다짜고짜 학생인 리나를 공격하려 들었고 리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 했다.
애초에 리즈는 빛과 어둠을 증오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아나는 울었다.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오는 그런 기분, 다들 한번쯤은 겪어보지 않았는가.
그런 느낌이었다.


아.
어쩌면,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 속 작은 사과 한 마디.
''미안했습니다'' 이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녹아내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저주받았다며 손가락질을 받았던 이들이 원했던 것은, 그리 커다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작은 사과 한 마디와 그들에게 내밀어 줄 손.
이것들이면 충분했는데.

5
이번 화 신고 2019-02-21 12:21 | 조회 : 1,954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오조오억년만에 업로드... 그동안 모아뒀던 연재예정분이 똑 떨어져서 많이 늦었습니당ㅜㅜ 앞으로는 계속 꾸준히 올게욤!!/// 그나저나 계속 작은 따옴표가 여기 업로드를 하면 큰 따옴표로 변하네요..불편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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