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왕 1화

동정호(洞庭湖).

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인 동정호는 말이 호수지 바다라 해도 과하지 않다. 청해 고원에서 발원하여 광활한 땅덩어리를 가로지르는 장강의 물줄기도 동정호에 이르러 한숨 돌리며 기력을 보충한 다음 동해를 향해 나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크다.

크기만 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예부터 유람객은 물론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름다운 동정 호반의 풍경에서 명시와 명문장이 나왔다.

동정호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를 꼽는다면 악양루(岳陽樓)가 있다.

쇠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오직 나무로만 짜 맞추어 지은 악양루는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의 침습에도 불구하고 의연함을 잃지 않은 채 우뚝하다. 여기에 층마다 황금색 띠를 두른 모습은 여간 고풍스럽지 않다.

당나라 시대에 명성을 구가한 시성(詩聖) 두보는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두보가 죽기 이삼 년쯤 전의 일이란다. 동정호의 무엇이 두보를 울렸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악양루에서 굽어보는 동정호의 풍경이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우리만치 수려한 것은 사실이다.

“호수와 달이 서로 어우러지고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수면은 거울처럼 고요하구나. 멀리서 동정호의 푸른 섬을 바라보니 하얀 은쟁반 위에 푸른 우렁이 한 마리가 있네.”

한 사내가 악양루 난간에 기대어 잔잔한 수면 위에 떠 있는 군산을 바라보며 당나라 시인 유우석이 지은 망동정(望洞庭)을 읊었다.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가 유명하다 하나 사내는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들게 하는 등악양루보다 유우석의 망동정이 좋았다.

사내는 한참 동안 동정호의 풍취에 젖었다.

석양이 질 무렵, 사내는 악양루에서 내려와 호변을 따라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어느 건물 앞에 이르러 멈추었다.

대륙전장 악양지점.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오십대 점원이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사내를 맞이했다.

사내는 품에서 패를 꺼내어 보였다.

순금으로 만든 동그란 패였다. 가운데에 자그만 금강석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박혀 있었다.

그걸 본 점원이 눈을 치뜨며 외쳤다.

“그, 금가(金?)!”

금가는 대륙전장에서 발행하는 가편(?片) 중에서도 최고의 귀빈에게만 지급되는 것이다. 모두 일곱 개뿐이며, 금가를 소지한 자는 대륙전장의 어느 지점에서라도 액수에 구애받지 않고 돈을 융통할 수 있었다.

사내가 말했다.

“계속 세워둘 거요?”

그러자 점원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점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후원에 있는 누각의 한 방이었다. 삼십 평 남짓한 방에는 춘란이며 두송 같은 분재가 있었고, 산수화와 족자 몇 점이 걸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소탈한 분위기였다.

점원이 말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면 사람이 올 겁니다.”
“군산에서 나는 은침이 일품이라던데.”
“준비하겠습니다.”

점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사내는 활짝 열린 격자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담한 크기의 정원이 보였다. 자그마한 연못을 낀 정원에는 푸른 매화가 흐드러져 있었다.

잠시 후 군산은침의 향기와 함께 한 여인이 나타났다. 왼손에 주판을 들고 있다.

사내가 여인을 보았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소득이로군.”
“…….”
“난 임건이라 하오. 소저의 방명은 어찌되시오?”

사내의 뜨거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여인이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칠성금가를 가지고 오셨다고 들었어요.”
“방명이?”
“칠성금가를 보여주시겠어요?”
“방명을 가르쳐주면 보여주리다.”

여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륙전장 악양지점장이랍니다.”
“악양지점장이라…… 악 소저였구려.”
“풉!”

여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굳이 이름을 가르쳐줄 이유가 없어서 직위를 댄 것인데, 사내가 그걸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대처하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난 것이다.

사내 임건이 칠성금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은자로 만 냥을 내어주시오.”
“전표로 준비할까요?”
“그런 건 악 소저께서 알아서 해주시오.”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건이 말을 이었다.

“그 돈 전부 소저를 위해 쓸 거니까.”
“…!”

여인이 깜짝 놀라 임건을 보았다.

임건은 내심 득의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본래 그는 전표만 챙겨서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인을 본 뒤로 생각이 바뀌어 버렸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겠는가.

‘흐흐!’

자고로 돈 많은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가 없다고 했다. 더구나 칠성금가를 가지고 있을 만큼 대단한 위치에 젊고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안 넘어오고 배길까.

팔 할은 넘어왔다고 임건은 생각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 모습에서 나머지 이 할이 넘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임건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대꾸했다.

“얼마든지.”



여인이 돌아왔다.

그녀는 칠성금가와 전표로 짐작되는 종이를 들고 있었다.

한데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임건이 말했다.

“기다리는 내내 소저만 생각했소.”
“…….”

여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문득 임건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여인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콧소리를 내며 ‘공자님도 참. 몰라요.’ 라는 식으로 말해야 했다. 하다못해 새침한 표정으로 눈이라도 흘겨야 했다.

하지만 여인의 표정은 돌덩이 같았다.

탁!

칠성금가를 탁자에 던지며 여인이 말했다.

“지급이 정지된 금가더군요.”
“…!”

입을 떡 벌리며 놀라는 임건을 일별하며 여인이 탁자 위에 들고 온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종이를 임건의 앞으로 쭉 밀며 말을 이었다. 감정이라곤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사무적인 말투였다.

“사흘 전에 본점에서 각 지점으로 발송된 문서입니다. 이걸 보시면 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임건은 눈알을 굴려 문서를 훑었다.

여인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떠그랄! 이 영감탱이가 치사하게 돈줄을 끊어?’

속에서 천불이 났다.

하지만 여인의 앞에서 속 좁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태연함을 가장하며 그가 말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소.”

그러자 여인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여긴 대륙전장입니다.”
“…….”
“볼 일이 더 없으시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군산은침은 마저 들고 가세요.”

여인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임건이 외쳤다.

“잠깐.”

여인이 임건을 돌아보았다.

“다른 볼 일이라도?”
“칠성금가를 맡기겠소.”

임건의 말에 여인이 눈을 치떴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씀이세요?”
“물론이오. 얼마나 내줄 수 있소?”

여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임건을 보았다.

칠성금가를 맡긴다는 것은 거기에 부여된 권리와 특권을 포기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그걸 빤히 알면서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고 있지 않는가.

‘미친 건가? 돈이 궁한 건가?’

이윽고 그녀가 대답했다.

“만 냥을 내어드리지요. 아시다시피 칠 일 이내에 되찾지 않으면 칠성금가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하는 걸로 간주됩니다.”

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오시오, 만 냥.”



여인은 금세 만 냥을 가져왔다.

“사용하시는 데 불편이 없도록 전표로 준비했어요. 백 냥은 은전으로 준비했고요. 자, 받으세요.”

여인이 전표 다발과 은전 백 냥이 든 전낭을 건넸다.

그러자 임건이 고개를 저었다.

“소저가 가지고 계시오.”
“예?”
“만 냥 전부 소저를 위해 쓴다고 하지 않았소.”
“…!”
“자, 갑시다.”

자리에서 일어난 임건은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가 반드시 손을 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 냥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전부 자신을 위해 쓰겠다는데 어떤 여자가 거부할 것인가.

여인은 망설이는 듯했다.

‘안 잡으면 여자가 아니지. 흐흐!’

임건은 여인의 입장을 고려해 시선을 피해주었다. 뜨거운 밤을 상상하면서.

곧 손에 반응이 왔다.

척!

“음?”

야들야들한 느낌이 아니었다.

차갑고 딱딱했다.

전낭이었다.

임건은 표정이 구겨지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미소를 만들어냈다.

“악 소저?”

그러자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저 돈 좋아하거든요.”

아무렴. 돈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겠나.

“임 공자님은 참 멋진 분이세요. 칠성금패를 가지고 계시니만큼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을 테고, 한눈에 반할 만큼 외모도 수려하시고. 게다가 한 여자를 위해 만 냥을 선뜻 쓰실 만큼 배포도 크시지요.”

쏟아지는 칭찬에 임건은 이내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여인이 말을 계속했다.

“정말 매력적인 분이란 건 잘 알겠어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공자님은…….”
“공자님은?”
“제 취향이 아니에요.”
“…!”

임건은 순간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여인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구천구백 냥은 제가 좋은 일에 쓸게요.”
“…….”
“안녕히 가세요.”

축객이었다.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 냥을 흔쾌히 투척하는 등 애를 썼으나 결국 객(客) 신세였던 것이다.

“악 소저.”
“…?”
“소저야말로 정말 매력적인 여자요. 나는 더 반해버렸지 뭐요. 내가 소저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찌해야겠소?”

여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 어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아니. 있을 거요. 내가 반했으니까.”
“휴.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앞으로 세 번.”

임건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안에 소저의 마음을 얻겠소.”

어떤 수로?

여인의 표정을 보자니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우선 백 냥으로 만 냥을 만들 거요. 만 냥을 만들어서 소저에게 직접 칠성금가를 돌려받겠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만 냥은 적은 돈이 아니에요.”
“소저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무지 적은 돈일 뿐이오. 백만 냥인들 아까울까.”

여인은 끝내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임건의 말은 기름기가 좔좔 흘렀지만 이상하게도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이런 감정, 그녀에게 좀처럼 드문 것이었다.

임건이 말했다.

“후딱 가서 만 냥을 만들어 오겠소.”
“어떻게요?”

여인이 묻자 임건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역시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구나.’

쿵쿵!

임건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두고 보면 알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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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6 16:00 | 조회 : 2,696 목록
작가의 말
오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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