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거부.

열심히 쓰고 껴놓고 바닥에 얌전히 내려놨는데, 이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한테 비밀로 하고 나가지 않기로 약속한 날 이후로 두 번이나 더 유곽에 들락날락 했지만, 내가 사라지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사카모토는 우주로 떠났다.

정말 공기... 아니 바람같은 남자처럼 올 때도 불쑥, 갈 때도 불쑥, 뜬금없이 선포하듯 말하고 사라졌다.

아마 우주에 가자는 것을 긴토키에게도 권유한 것 같았는데 예상한 대로 실패한 듯 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니, 아주 해맑은 얼굴로 헤어졌다.

이미 떠났는데도, 어쩐지 그가 심히 걱정된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유곽에 갔다가 아침에 돌아오는 긴토키와 동기들.

내가 무슨 회식 간 남편 기다리는 아내도 아니고...

"여, 카오루. 우리 왔다..... 너 설마 밤 샜냐?"

"네. 타카스기랑 카츠라는?"

"순찰 돈다고 나갔다. 아니 말 돌리지 말고. 너 말야, 우리 유곽 갈 때마다 밤 새는 짓 좀 그만할래? 항의하는 거냐, 너도 데려가 달라고?"

"거기 갈 생각 없다니깐요."

"그럼 가지 말라는 항의.... 응? 그건..."

"네, 서당 다닐 때 가지고 다녔던 책이죠. 긴상도 있죠?"

"그거야 뭐..."

부끄러운지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을 얼버무리는 긴토키를 보면서 나는 조용히 책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닥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긴상, 제가... 언젠가 이 책만 남겨두고 사라진다면..."

그러자 긴토키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져 물었다.

"가는거야?"

"...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때가 되면."

"꼭 가야하는 거야?"

"... 네."

긴토키가 돌아서서 물었다. 그의 옆모습이 상당히 화가 나 보였다.

"어째서! 십 년간 같이 있었으면서, 갑자기... 애초에 따로 갈 곳도 없다는 걸 내가 더 잘 알고있는데, 도대체 어딜 그렇게 간다는 건데?!"

"제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말 꺼내기가 힘들어 더듬더듬 얘길 하던 것이 긴토키가 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나 역시 덩달아 소리를 높여버렸다.

아, 이게 아닌데....

나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와 동시에 긴토키가 과격하게 양 어깨를 잡았다.
이마에 짚었던 손을 내리니 긴토키가 무서운 얼굴로 추궁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가고 싶은 게 아니라니! 너 설마, 누구한테 협박이라도 받은 거야?"

"그게 아닙니다. 분명 제 의지는 아닙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저도, 긴토키도, 그 누구도 붙잡을 수 없는 일이고요. 왜냐면 전, 저는..."

말을 하려다 순간 울컥해 목이 맥히는 바람에 말을 잇지 못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런... 울지 않으려 그렇게 애쓰며 할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며 연습했는데.

억지로 눈을 비벼서 눈물을 떨쳐냈다. 하지만 역시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 그러니까, 언젠가 제가 이 책만 두고 안 보인다면, 그 땐 긴상이... 저 대신 이 책 좀 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

긴토키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냐는 듯한 눈초리로 날 노려보더니 이내 내 부탁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를 악문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장 신사 안을 나가버렸다.

더 이상 대답을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얘길 했으니 최소한 버리진 않겠지.

사카모토보다 훨씬 더 않좋은 이별을 맞게 될 것 같았다.

안 좋은 건 언제나 들어맞는 내 예감이 그랬다.

책을 내려다 봤다.

고개를 떨구니 고여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 * *


티잉!

상념에 빠져있는 긴토키를 대신해 날라오는 유탄을 검을 휘둘러 쳐냈다. 각도를 약간 트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계속해서 적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칼을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한 명씩 적이 베어 넘겨졌다.

검을 횡으로 그어 내리며 한 명, 내렸던 검을 그어 올리며 또 한 명.

이렇게나 적이 밀려드는 데도 긴토키는 계속해서 몇 번이나 정신을 놓고 있었다.

다행히 전쟁에서 구른 경험 덕에 멍하니 있어도 몸이 알아서 반응해 적을 베고 있지만, 눈 앞에 적에서만 가능했을 뿐 방금처럼 멀리서 날라오는 유탄 같은 경우는 반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긴상! 정신 차리십시오!"

"아, 미안."

"이게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잘못하면 모가지가 뎅겅 할 뻔 했단것도 아시고요?!"

"......"

"긴상."

"......"

"...역시 며칠 전에 얘기했던 것 때문에 그런 겁니까? 그럴 줄 알았으면...... 얘기하지 않는 편이 나았습니다."

"너...!"

"헤어지는 게 싫다고 죽는 걸로 항의하려는 겁니까?"

긴토키는 무언가 말하려다 이내 몸을 돌렸고, 나 역시 굳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전쟁이 한창이었다. 여유롭게 말 다툼 할 수는 없었다.

답답했다.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말 한마디에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도 몰라서 두려웠다.

결국, 그 날의 전투는 우리의 심정의 영향 때문인지 엉망이었다. 졌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피해가 평소보다 심했다.
.
.
.
.

"도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타카스기가 다그치듯 물었다.

지금 긴토키와 나는 마치 싸운 것처럼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카츠라와 나는 작전을 다시 세우고 수정하고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암울한 분위기를 눈치채다 못해 눌린 타카스기가 먼저 입을 열었던 거였다.

"싸운건가?"

"싸운 적 없습니다."

입술을 깨물며 타카스기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이번엔 카츠라가 말을 걸어왔다.

"무릇 친구라면 안 좋은 감정으로 있을 수도 있고, 그로 인해 멀어질 수도 있고, 혹은 헤어질 수도 있네. 하지만 우린 동기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전우일세. 등을 맞대고 서로 목숨걸고 싸우는 전우이지.
전우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네.
그 말은 즉, 마음이 맞지 않는 전우는 패해서 뿔뿔이 흩어지거나 전쟁터에서 죽었단 뜻이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지 않나.
가장 돈독한 사이였던 자네들끼리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우리로선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하루라도 빨리 쌓인 감정을 털어야한다고 생각하네."

카츠라의 진심어린 말에 서로 돌리고 있던 등은 마주보게 되었다.

나는 마주보게 된 긴상을 보고 더듬거리며 열심히 변명했다. 지금의 기회를 놓쳐 버리면 이대로 사라지게 될 때까지 계속 등을 지게 될 것 같았다.

"긴상, 전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힘들더라도 전처럼 남은 시간을 보내야, 그래야..."

"알고 있어. 너한테 화난 것도 아니야. 단지... 조금 머리가 복잡해진 것 뿐이야. 도대체 네가 숨기고 있는 그 엄청난 비밀은 대체 뭔지."

긴토키는 울 것 같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쇼요도 사카모토도 곧있으면 나 역시 그의 곁에서 멀어진다.

옆에 있고 싶었다. 계속. 그가 행복해질 때까지.

그를 끌어안았다. 신장이 작아 허리를 끌어않는 꼴이 됐지만.

긴토키가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내가 먼저 작게 소근거렸다.

"죄송합니다. 계속 옆에 있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 아무 것도 해 줄수가 없어서."

긴토키 역시 소근거리듯 대답했다.
그렇게 서로 한 참을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 * *


"결국 오늘 가는 겁니까?"

"어. 내일 아침엔 올 테니까."

긴토키, 타카스기, 카츠라는 또 유곽에 가기 시작했다. 긴토키에게 처음 떠난다고 얘기한 지 벌써 약 일주일 정도가 지나갔다.

정말... 남은 시간 같이 좀 있자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한계는 일주일이었나 보다.

하지만 같은 남자로서 이해하지 못할 사정까지는 아니었기에, 조금 기분이 좋진 않았다만 결국 가는 것을 승낙했다.

"하아... 일단 화로에 불씨부터 살려야겠네. 아냐, 일단 물부터. 주전자가 타면 안되니까."

나는 일단 바깥에 나가 물을 길러 솥단지와 주전자에 물을 붓고, 솥단지에서 주전자로 바꿔 걸었다. 그리고 잿더미 속에 파뭍힌 불씨를 살렸다. 물이 끓자 찻잎을 넣고 한 참을 더 끓였다.

곧이어서 어느 정도 시간이 되자, 찻잔에 쪼르륵 따랐다.

"후우... 으아! 드럽게 뜨겁네."

한 모금 마시자마자 뿜을 뻔한 찻물에 툴툴거리며 찻잔을 내려놨다.

"쳇, 멋 좀 내보려 했더니...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일을 하면 안돼."

그리고 카츠라와 얘기했던 작전에 대해 지도를 봐가며 검토하고 살폈다.

작전은 전투에 강한 나와 긴토키, 카츠라. 이 셋이서 전방에서 화려하게 전투선과 적의 주의를 끌면 일반 병사보단 강한 귀병대를 타카스기가 이끌고 적의 본진을 강하게 치고 바로 빠지는 거였다.

마침 적의 보급 부대가 도달하는 날짜니 시기도 알맞고, 지리상에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래도 도박에 가깝다 이거지. 승률은 거의 15퍼센트인가... 낮지는 않지만 높지도 않은 게 사실이지. 딱딱 들어맞어줘야 성공을 하는 거니까."

나는 중얼거리며 무심코 손에 잡히는 뜨거운 찻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푸확!

"으와악! 악!"

결국 입안을 데이는 참사와 함께 찻물을 뿜었고, 뜨거운 물에 옷이 젖어들어갔다.

"아, 젠장. 오늘 왜이래?"

나는 재빨리 젖은 옷을 벗어내고 품에 넣어놨던 책을 꺼냈다.

다행히도, 책은 젖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네. 진짜 뭔데?"

겉옷과 책을 한 쪽으로 밀어둔 채 쏟은 찻물을 대강 닦았다.

지금은 전쟁터에서 입던 바지 형식의 키모노가 아닌 언제나 입던 눈송이 키모노 였는데, 겉옷을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매와 하체 하단부가 찻물로 얼룩져있었다.

아야메가 손수 자수를 놓은 옷이었다.

"아아, 정말... 이거 다신 못 구하는데! ...... 얼룩 남을려나?"

나는 투덜거리며 이미 물을 먹어, 얼룩진 애꿎은 옷을 탈탈 털었다.

"어라...?"

순간 몸이 휘청거리며 기울었다.

다행히도 재빨리 벽을 짚는 바람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주저 앉았다.

설마, 아니겠지. 아직...

"하하... 요새 너무 피곤했나?"

억지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짚었다.
그러자 바로 앞의 공간이 잡아먹을 듯 일렁거렸다.
그러자 더 이상 다가오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뭐, 뭐야. 긴토키는 아직 유곽에 도착할 시간이 아닌데...? 아직, 이른 저녁이란 말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외치며 옆에 놓여있는 소도를 그러쥐었다.

일렁거리는 공간은 점점 다가오며 블랙홀처럼 날 빨아들였다.

멍하니 공간을 바라보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정신을 차렸다.

"설마, 저번의 유곽이었나?"

나는 순간적으로 전생에서 보건 시간에 배웠던 수업을 필사적으로 끄집어냈다. 완벽히 수업을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만 상식이기도 했기에 기억에 대강 남아있었다.

"착상 기간이, 9일에서 열흘......"

저번 유곽을 다녀온지 정확히 9일이었다.
나는 주저앉아있던 자세에서 벌떡 일어나 달렸다.

손이 떨려왔다. 이번에 만나는 게 아니야. 긴토키가 아야메를 만난 건...

"... 지난 번이었어."

머릿속에서 인정한 걸 입으로 꺼내자 다시금 충격으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지금은, 아직은 안 돼. 쇼요 선생님이... 아니, 아니야. 최소한 긴토키한테 얘기하고... 긴상...긴상!"

하지만 몇 발 내딛기도 전에 휘청거리는 바람에 다리가 풀썩 꺾였다.

넘어진 내게 일렁거리는 공간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저번과 마찬가지로 현기증과 빨아들일 때에 울렁거림까지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거부했다.

'안 돼... 아직은 안 돼. 못 가!'

4
이번 화 신고 2017-08-13 01:26 | 조회 : 2,230 목록
작가의 말
나른한 고양이

지난 댓글 진짜 감동이었어요8ㅇ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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