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내일은 나가봐야 해요."
아무말 없이 그가 나를 쳐다본다. 내게 어딜가느냐 묻는다.
"저 내일 선생님 대신 인터뷰 같은 거 하나 하잖아요."
"가지 말라니까."
"거기 드세서 안돼요."
갤러리 열 때 도움을 많이 준 곳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눈치가 많이 보여 도통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만큼 핸드폰과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인데 내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될때까지 연락을 해댔더란다.
"그 여자 있던 곳이잖아."
"에이, 그 사건 이후로 짤린 지가 언젠데요!"
선생님의 심기를, 아니, 나를 건드리는 바람에 머리가 온통 잘려버린 그날의 여자를 잊지 못한다.
아무도 모르는 우리의 집 앞까지 찾아온 그 여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갤러리 한 가운데에 흩뿌려진 그 여자의 머리카락까지도.
"오히려 그 일 때문에 면목 없어서라도 가야 할 판인데요, 뭘."
"네가 왜,"
"알아요.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잘못은 그 여자가 한 거지만."
딱히 나를 보내는 게 탐탁치 않아보이긴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그림이 또다시 세상에 알려졌고, 사람들은 또다시 관심을 가졌으니까.
마냥 가만히 있는 다고 해서 사그라드는 관심이 아니더라. 기자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한동안 무리한 탓에 내가 그림을 억지로 그에게서 떼어놓았다. 쉬엄쉬엄 해도 될만한데 그는 강박증이 있는 사람처럼 눈을 감지도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가 유일하게 눈을 붙이는 시간은 나와의 관계를 맺은 후였다. 그것도 아주 잠깐.
"그렇게 잠깐 주무시고 안피곤하세요?"
"죽으면..."
"네?"
"죽으면 평생 잠드는 거잖아."
"......."
"그 전까지는, 많이 담는 게 후회없겠지."
무엇을?
캔버스 안에, 그림을?
혹은
당신의 눈에, 나를?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왜."
"당장에 잠깐 안보이는 것도 싫은데...."
괜히 울컥해서 목이 메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다.
내가 억지로 치워두었던 도구들이 구석에서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다.
그는 작업은 잠시 쉬었지만 매일 같이 나를 그리는 일 만큼은 그만두지 않았다. 하루하루 쌓여간 내 그림은 방 하나를 가득 차지하고도 더 이상 둘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죽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내 잘못이다."
순간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려고 했지만 그는 강한 힘으로 나를 껴안아 위로 고개를 들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왠지 그 품안에 있는 게 더 좋아 나도 그의 허리를 감쌌다.
주책맞게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었는데, 신기하게도 그의 품에 갇히자 조금씩 멎어갔다.
"내일 사진은 안 찍나?"
"네?"
"너만큼은, 예쁘게 나와야 할텐데. 사진에."
"......."
그가 나를 위해 이만큼이나 바뀌었다.
원래도 좋은 사람이었지만, 이젠 정말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람.
"눈 안 부을 거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
"같이 가고 싶은데..."
괜히 투정을 부리며 그를 침대로 끌고 갔다. 살짝 쥔 옷깃에서 불이날 듯 뜨거운 감정이 전해진다.
"잘 하고 올게요."
나를 통해 당신을 볼 사람들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