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다 내 잘못이었다. 그러니 네가 날 떠나고, 그런 상처받은 표정으로 날 바라봤겠지.
*
고등학교 2학년이 막 시작될 무렵, 그 애는 전학을 왔다. 이름은 은바다. 어두운 인상과는 다르게 약간 밝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굴이 잘생겼으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약 일주일 정도 힐끔거리며 지켜본 결과, 바다는 사교성이 아주 최악이다. 자신이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기는 커녕 주변에서 걸어오는 말도 모조리 무시한다. 성격이 싸가지가 없다고 모두들 흉보고 다녔지만 그런 애들 중에서 바다를 싫어하는 아이는 거의 없을거다. 왜냐면 바다는 잘생겼으니까.
그 날은 잠을 잘 자지 못한것인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있었다. 한층 더 어두워진 인상이었으나 모두들 더 분위기 있어졌다며 수군거렸다. 야자도 안하고 집에 가는 애가 왜저렇게 피곤해하나 생각해봤다.
바다는 집이 아주 잘 산다는 소문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은씨는 흔히 볼 수 있는 성이 아니었고 개중에서 부자인 집안은 얼마나 될까? 늘 이어폰을 끼고 있어도, 휴대폰을 내지 않아 걸려도 바다는 교무실에 불려가서 조용히 타이름을 받을 뿐 별다른 벌을 받거나 압수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 바다가 그저그런 부자가 아닌 이름난 재벌일것이라고 말했다.
은씨 성에 이름난 재벌집안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손꼽아주는 전자제품 기업이었다. 그 이야기가 퍼지자 그 다음부터 아무도 바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바다는 이상하게 야자도 하지 않고 수업도 거의 듣지 않았지만 ? 사실 안듣는 척 하면서 듣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 성적은 늘 최상위권이었다.
빼어난 외모에, 넘치는 부에, 화려한 성적과 모두가 동경할만한 커다란 키에 알맞는 비율까지. 바다는 우리 학교의 스타였다.
그런 바다와 내가 어떻게 친해졌을까.
친해지게 된 계기에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목이 말라 음료수를 뽑으려 자판기앞으로 갔지만 안타껍게도 100원이 모자랐다. 먼저간다는 친구들을 내버려두고 혼자서 온 상태라 돈을 빌릴만한 곳도 없었다. 결국 못마시나.. 하고 축 늘어졌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동전을 넣어주었다.
누구지, 하고 뒤를 바라보자 바다가 서 있었다. 새삼스레 바다의 키가 크다는걸 다시한번 느끼게 되었다. 바다는 멀뚱히 날 내려보더니 동전을 더 넣어서 내가 고르려던것과 똑같은 걸 2개나 뽑아서 하나를 내게 건내줬다.
“고마워.”
바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약간 고개를 끄덕이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다는 먼저 앞서가며 캔을 따서 음료수를 마셨고 나도 졸졸 따라가며 음료수를 마셨다. 교실 뒷문에 도착하자 바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맛있네.”
솔직히 웃는게 너무 멋있어서 쓰러질 뻔 했다. 그 날 이후 바다는 조금씩 내에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사소한 말들이었지만 날이 갈 수록 아침에도 인사를 하고 해어질 때도 인사를 했다.
바다는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내게만 그랬다, 다른 아이들은 함부로 다가가지도 못하는 바다가 내게만 특별하게 대해줬다. 그 별것 아닌 것들은 어린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평소에 같이 놀던 친구들보다도 바다와 더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어느 순간 우리는 같이 식사도 하고 늘 같이 앉고, 전화번호도 교환해 서로 밤늦게까지 톡도 하고. 그렇게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서 믿음을 얻었던 것인지 바다는 내게 누구에게도 절대 알려서는 안될,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될 비밀을 알려주었다.
“… 나 남자 좋아해…”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그리고 스쳐가는 지난 기억들. 바다는 은근히 스킨쉽을 좋아했다. 몰래몰래 손등을 쓰다듬는가 하면 어느 새 교복 와이셔츠의 소매를 파고 들어가 차가운 기운을 내게 선사하기도 했다. 그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면 바다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주고는 했다.
설마..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미안해. 나 많이 더럽지?”
눈물이 방울방울 맺힌 눈동자가 바다 답지않게 가녀리게 떨리고 있었다.
“아, 아니야. 그런 생각 안했어. 그, 그냥 좀 놀라서…”
“… 정말…?”
“어? 어, 응…”
무슨 말이든 해야 겠다는 생각에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바다는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이 반짝거려 어쩐지 서글퍼보이기도 했다.
바다는 날 꼭 껴안고 중얼거리듯 고백했다.
“나, 나 너 좋아해. 처음부터 좋아했어… 싫으면 이대로 밀쳐내도 좋아. 발로 막 차도 되고 손으로 막 때려도 되.”
어쩐지 바다가 두려워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사회에서 핍박받는 동성애자를 향한 단순한 동정이었을까.
아니면 모두가 동경하는 이가 오로지 내게만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우월감이었을까.
나는 바다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를 더 끌어안아주었다.
바다는 눈물맺힌 목소리로 고맙다고, 정말 잘하겠다고 울부짖듯이 중얼거렸다.
이후 바다는 이 학교로 전학오기까지 그간의 일들을 전부 털어놓았다. 고등학교 1학년, 어린 패기에 부모님에게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밝힌 후 달라진 부모님의 태도. 정신병이 있는게 분명하다며 유명한 정신과의사를 불러다가 하루도 빠짐없이 치료를 했다는 것. 정상인 자신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받은 스트레스보다 부모님이 자신을 철저히 정신병자로 취급한 것에 대한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 그리고 그로인한 괴로움까지.
말을 다 마친 바다는 내게 노을같은 미소를 지어주며 슬며시 다가왔다.
“손 잡아도 돼..?”
나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바다가 더 다가와 코앞에서 말했다.
“안아도 돼?”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바다는 날 제 품에 끌어다가 뼈가 으스러질 듯 끌어안고는 목덜미에 코를 박아 체향을 맡았다.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간질간질한 좋은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내 모습에 가볍게 웃던 바다는 이번에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키스 해도 돼?”
나는 고개를 뒤로 살짝 물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진중한 표정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바다가 날 안고있던 손 하나를 빼내 뺨 한쪽을 부드럽게 잡은 뒤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게 했다.
“키스 하고 싶어.”
이번에는 좀 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바다는 진하게 입을 맞췄다. 얘 어디서 키스하는 학원같은거 다니는거 아니야? ?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다의 키스는 환상적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몰래몰래 키스를 했다. ? 물론 키스만 한건 아니다. 껴안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했다. ? 도서관에서, 아무도 없는 체육관에서, 학교 건물 뒷편에서, 화장실 맨 끝칸에서. 넘치는 스릴에 나는 정말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날이 갈 수록 바다의 집착은 더 커져만갔다. 평소라면 끝냈을 톡을 두세시간이나 더 하게 만들었고, 몰래몰래 하던 키스를 이제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재빠르게 입을 맞추고 돌아서고, 언제 어디서나 내 손을 잡아야만 할 정도로.
처음에는 좀 더 스릴있게 하려나, 라고 생각했지만 바다는 그게 아니었다. 이제는 학교뿐만 아니라 온종일 같이 있고 싶다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러면서도 날 사랑한다고, 세상에 저를 이해해줄 사람은 오직 나 뿐이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버거웠다. 그 애의 사랑이 너무 커져버려 태양보다도 컸고, 태양보다도 뜨거웠다. 너무 힘들었다.
시도때도없이 전화를 건다거나, 몰래 키스를 하던 중 누군가가 오는 소리가 들려도 놓아주지 않는다거나. 그러더니 이제는 나와 연인관계라는걸 밝히고 싶댄다.
날 보면 자기 부모님들도 분명 이해해 줄거라고. 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를 받아들이니 못할 수 없다며. 그는 열렬하게 구애하는 수컷처럼 내게 매달렸다.
“…미안해…”
그렇게 거절을 한 이후로 바다와의 사이가 조금 멀어진 듯 했다. 길었던 톡도, 아무때나 오던 전화도, 거침없던 스킨쉽도 모두 줄어들어버렸다. 솔직히 약간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젠 버겁지 않았다. 힘들지 않았다.
그 해방감에 취해 그 애의 이야길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다.
아직도 다 기억나지 않지만 드문드문 드는 기억으로는 이제 정신병이 다 나았냐고 계속해서 물어보는 부모님. 장차 회사를 이끌어갈 자식들 중 하나로 받아야만하는 스트레스들이었다. 겨우 18살의 아이가 전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중 하나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은바다랑 사겨”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냐고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 애가 이미 전교에 소문이 다 났다고 한다.
매일 둘이서만 다니고, 언젠가 누군가가 우리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순간 사고가 정지하고, 만일 그게 사실로 밝혀진다면 앞으로 학교에서 당해야만 하는 모두의 차가운 시선들, 괴롭힘 들이 생각났다. 나는 다급하게 아니라고 친한 척 어깨동무를 했지만 머릿속은 이미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나는 재빨리 바다에게 카톡을 보내고 야자도 째버리고 근처의 카페로 왔다. 내가 먼저 불러서 보는건 처음이라 바다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처음 몇초간 망설였다. 하지만 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흘러나왔다.
“우리 헤어지자.”
“어…?”
“… 미안…”
“어, 하, 하늘아…”
바다가 다급하게 내 손을 잡았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나는 재빨리 손을 빼버렸다.
바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바다가 움직이지 않자 나는 슬그머니 바다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가 흔들었다.
“야.. 은,. 바다..?”
하지만 바다는 거칠게 내 손을 밀쳤다. 깜짝 놀랐다. 바다는 단 한번도 내 손길을 거부한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먼저 다가가면 마치 초콜릿을 받아든 어린아이 처럼 초롱초롱한 눈을 보이며 감격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으니까.
바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살짝만 건드려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당황한 내가 바다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바다는 재빠르게 카페를 나갔다.
나는 얼른 뛰어가 그의 팔을 잡았지만 바다는 그 팔을 거칠게 내뺐다. 그라고 내게 말했다. 아주 상처받은 목소리로.
“왜 따라와? 또 동정이라도 해 주려고?”
“어…?”
바다의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툭 떨어졌다.
“넌 그냥 내가 불쌍해서, 그래서 사겨준거잖아. 아니야?”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면 틀린 말이 하나 없었으니까. 그리고 주변에서 누군가가 들을까봐 안절부절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본걸까. 바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하! 하고 웃더니 말을 했다.
“나는 널 사랑했는데, 너는 그게 아니었던거지. 그냥 너한테 내 사랑은 한순간의 재미에 불과했던거야.”
“……”
차마 바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애절한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들어보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네게 너의 부모님보다도 더 깊은 상처를 안겨줬다는걸.
“넌 날 사랑하지 않았어.”
미안해, 하지만 이 말을 할 수는 없어, 왜냐면 난 그런 말도 내뱉으면 안돼는 쓰레기니까. 그런 짓을 내가 저질렀으니까.
“나만 널 사랑했던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