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 장마(1)

장마철이라 그런지 주룩주룩 비가 내립니다. 비 냄새가 만연하게 퍼져있지만 남자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저벅저벅. 무거운 발걸음과 어두운 얼굴. 비로 인해 약간 젖어버린 바지 끝단이 어쩐지 무거워 보입니다. 남자는 통곡소리가 여기저기 들리는 장례식장에 들어왔습니다.

멈출것 같지 않던 그의 다리가 드디어 멈춰섭니다. 구석에 아주 작게 치뤄진 곳. 인간관계마저 단조로웠던것인지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남자는 황망한 눈으로 정면에 놓인 사진을 바라봅니다.

단정한 이목구비로 슬며시 지어보이는 미소가 예쁜 사람입니다. 아직 젊은 것이 남자보다 약간 어려보였습니다.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아주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의 사진을.

"... 이 주흔.."

남자는 조그맣게 제 옛 연인의 이름을 불러보았습니다. 평소라면 왜? - 라는 차갑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귀에는 아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씨발.. 이주흔.."

꼭 울 것만 같은 목소리. 덜덜 떨리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곧 눈물을 흘릴 것 같았습니다. 그런 남자를 누군가 거칠게 뒤에서 끌어당깁니다. 표정 변화가 없을 무뚝뚝해보이던 남자가 깜짝 놀란 눈으로 뒤를 바라보았습니다.

사진 속의 남자와 닮은 듯, 안닮은듯. 남자는 잠시 여자를 보았습니다. 아, 제 애인이였던 사람의 쌍둥이었습니다. 의절당한 보수적인 집구석에서 유일하게 그의 편을 들어주었던 형제.

여자는 원망이 가득 담긴 눈물을 후두둑 떨어트리며 남자의 뺨을 냅다 내리쳤습니다.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지고 여자가 말을 거세게 내뱉습니다.

"너 미쳤어? 아주 머리에 든게 없지?! 왜? 니 잘난 대가리는 이런데 너같은 새끼가 오면 안된다는 말도 안해주던?! 나는 빡대가리라서 모르겠는데! 그렇게 잘나신 네 대가리에서 그런 말이 안나오더냐고!"

처음엔 원망섞인 소리였으나 가면 갈 수록 우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내려치다가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해 남자의 품안에 무너져 내려 웁니다. 언제나 당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남자의 연인에게 마음속의 기둥이 되어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욱씬욱씬

이상하게 가슴이 아픕니다. 남자는 심장을 움켜쥐었습니다. 너무 이상했습니다.

먼저 사랑한건 남자였습니다. 더 사랑한건 남자였습니다. 먼저 다가간것도 남자였고, 먼저 멀어진것도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먼저 버린것도 남자였습니다.

사진 속의 연인은 아직 보수적인 남자의 기업에서 남자를 저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존재였습니다. 이제, 언제 어디서 연인이 들킬까 걱정할 필요 없고 더 이상 쓸데없는 감정싸움으로 힘을 뺄 필요도 없고 이젠 수월하게 집안에서 맺어준 사람과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고 승진을 해서 회사를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분명 남자의 앞길은 훤하게 뚫렸습니다. 자신의 앞길을 막았던 존재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웃어도, 좀 기뻐해도, 하다못해 홀가분한 기분이라도 들면 좋으련만, 어째서인지 남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한방울

두방울

세방울

...

분명히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왜이리도 가슴이 벅찬것인지. 왜이리도 목이 매이는 것인지. 왜이리도

눈물이 나는 것인지.

남자는 재빨리 장례식장을 뛰쳐나왔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시신을 못봤잖아? 이주흔은.. 주흔이는 좀 장난이 심한 애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집에 가면 날 놀래켜주려고 기다리고 있겠지. 오늘이 무슨 기념일인가봐. 내가 기억못하는. 그러니까 가는 동안 좀 기억해보자. 아니면 주흔이는 또 토라지니까...

남자는 아주 빠르게 질주했습니다. 빗길에 아슬아슬 차들을 피해 재빨리 도착한 곳은 남자와 그의 애인이 함께살던 집이었습니다. 6개월전, 그들이 해어지고 난 뒤에 한번도 오지 않았던 곳.

남자는 차를 아무데나 주차시켜놓고 차에서 나왔습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듯 비가 내리지만 남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꽤 높은 층에 있습니다. 내려오려면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참지 못한 남자는 재빠르게 뛰어올라 갔습니다. 10층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자는 숨을 고르고 벨을 눌렀습니다. 경쾌한 소리가 나고 끝나기 전에 그의 애인은 문을 열고 활짝 웃으며 언제나 그를 반겨주었습니다. 그런 당신이 좋아, 남자는 비밀번호를 알고 있음에도 언제나 벨을 눌렀습니다. 얼른 그가 나와 저를 반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지 않게 헤어졌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다 남자의 잘못인데. 너무 늦었지만 용서를 빌어볼까 합니다. 이런, 아무래도 그의 애인이 단단히 삐졌나봅니다. 남자는 다시 한번 벨을 눌렀습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남자는 또다시 벨을 눌렀습니다. 그의 애인은 벨소리가 3번이 넘어가기전에 뾰루퉁한 얼굴로 마지못해 나온적도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 이주흔..?"

이상합니다. 벨소리가 다 지나갔는데, 왜 문이 열리지 않은 걸까요. 남자는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그의 애인은 단단히 화가 났나봅니다. 남자는 벨을 눌렀습니다.

한번

두번

세번

...

왜 문이 열리지 않을까요.

"...주흔아, 주흔아, 이주흔..! 이주흔! 문 열어!! 안에 있는거 다 알아!!!"

남자는 허탈하게 웃으며 소리질렀습니다. 쾅쾅쾅 아파트가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에 드디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남자가 원했던 집의 문이 아닌 이웃집의 문이었습니다.

"거 조용히좀 합시다. 여기 그쪽 혼자 삽니까? 아무도 없는집에 뭐하는 짓이야?"

"... 아무도 없다구요?"

"뭐야, 몰랐나? 그 집 비워진지 두달이나 됬어. 좀 있다가 세입자 들어온다 하던데.."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는 다시 비를 맞으며 차에 올라탔습니다. 시동을 켜자 차에 달린 DMB에서 뉴스가 흘러나옵니다.

[어젯밤 한국 현대 미술의 유망주인 故 이주흔씨가 폐암에 시달리다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전문의는 평소에 담배를 자주 하던 故이주흔씨의 평소 습관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말했습니다...]

남자는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쳤습니다. 그러다 경적을 눌러버린 것인지 빠앙 하고 경적소리가 크게 났습니다. 하지만 금세 빗소리에 파묻혀버립니다.

원채 술을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쓴맛에 절대로 길들여지지 못하겠다며 술을 멀리하던 그였습니다. 하지만 담배는 달랐습니다. 남자가 하던 담배를 보며 멋있다고 말하던 그의 모습이 아른아른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남자는 은근슬쩍 담배를 권했습니다. 독한 향 때문인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과일향의 전자담배는 괜찮았는지 늘 끼고 다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렇게 쓸데없는걸 권유했을까요.

"아아아악-!!!"

남자는 아직도 연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

그 날은 장마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같은 고등학교에서 그런 사람을 본건 처음이었습니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서늘한 피부를 보면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행여나 슬며시 웃어보이기라도 하면 온몸이 달아올라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미술을 한다던 그는 꽤나 소문난 실력자였습니다. 유명한 대회에서도 상을 휩쓸어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습니다. 남자도 만만찮게 교내에서 유명인사였지만, 그의 앞에만 서면 온몸이 굳어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주 미술실에 얼굴을 들이밀다보니 어느새 남자는 그와 친해져있었습니다. 예전같았으면 살짝 닿는 어깨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멀리 떨어지던 그가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다가오고 목에 팔을 걸었습니다.

맨살과 맨살이 붙는 아찔한 경험이었지만 남자는 꾹 참았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노렸습니다. 언제 고백을 할까. 마치 먹잇감을 앞둔 짐승처럼 말이죠.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가 남자를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남자의 곁에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멀리 도망쳐버리기도 합니다. 겨우 가까워진 사이가 처음보다 더 멀어졌습니다. 남자는 태어나 처음으로 좌절이라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젊음의 패기로 금세 되살아나 그를 뒤쫓기 시작했습니다. 몇번의 추격전 끝에 겨우 잡은 그를 마주보니,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걸 느꼈습니다.

"좋아해.!"

남자는 용기를 내서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다 안절부절 못하며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들썩거리는 어깨에 깜짝놀라 보니 그가 울고있었습니다. 왜 우는것인지, 혹시 저가 싫어 그런건지.

하지만 그의 대답은 전혀 달랐습니다. 훌쩍거림 사이로 간간히 들리는, 설탕과자보다도 더 달콤한 말들.

"... 나도 좋아해..."

장마는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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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10-04 00:55 | 조회 : 3,317 목록
작가의 말
류화령

이번엔 다 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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