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完)

성현과의 다정한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성현의 스케줄로 인해 성현이 당분간 해외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하는 잔뜩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그러자 성현은 싱긋 웃으며 정하에게 말했다.


괜찮아. 금방 올 거니까.

... 응..


이제 몇시간 후면 떠나는 성현에게 이것저것 믈어보고 싶은게 많았다.

그중, 가장 궁금했던 것은,


우리.... 사귀는거... 야..?

어? 음.. 글쎄..


아닌가..? 하고 정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성현이 정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너는 나 좋아해?


정하가 고개를 들지 않고 조심스레 끄덕였다.

그에 성현도 대답했다.


나도 그래.


갑자기 밝아진 정하가 고개를 들어 성현을 바라보았다.

성현은 그런 정하를 안아주었고, 정하도 성현에게 안겼다.

둘의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금방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정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성현에게 인사했지만, 성현은 전화로 연락하면 된다고 이야기 했다.

그에 정하는 알겠다며 웃어 보이고는 성현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한참 CF를 찍던 정하가 갑자기 배를 감싸쥐고 바닥에 쓰러진 정하는 매니저가 곧장 병원으로 실고 갔다.

하지만 이내 정하는 산부인과로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아이가 앞으로도 영영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하의 일을 수습하기 위해 매니저는 잠시 정하의 곁을 떠났다.

정하는 잠시 혼자 생각했다.

누구의 아이일까.

월? 하주? 아님 성현?

누구의 아이든 상관없다.

왜냐면 이제 이 아이를 볼 수 없으니까.

뱃속의 아이를 꺼내는 수술을 하던 날, 정하는 매니저에게 절대로 오지 말라고 했다.

수술을 끝낸 정하는 곧 마음 한구석에서 허전함을 느꼈다.

차가운 침대 위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있었다.

저 커튼 너머에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하지만, 정하의 공간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곳은 오로지 적막과 싸늘함만이 맴돌았다.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닦아줄 이는 없었다.

정하는 산부인과에서 나눠주는 초음파 사진을 하나 들고는 그대로 집에 왔다.

모든 활동을 접어버리고 그대로 편하게 쉬고 싶었다.

그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굴까, 하고 정하는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월이었다.

다시는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던 사람이 오히려 먼저 찾아온 것이다.

정하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고, 월은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집 이리저리를 둘러보던 월은 침실로 들어가 침대 옆에 있는 초음파 사진을 들었다.

아, 역시 틀리지 않았다.

월은 정하가 쓰러졌을 때, 병원에서 산부인과로 간 것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정하 너, 임신했니?

..... 선배가 신경쓸 일이 아니잖아요...


애초에 월이 자신을 호텔로 데려가서 그런 짓만 하지 않았으면 하주가 자신에게 그렇게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정하는 월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월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큰 마음을 먹고, 설마 자신의 아이이면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오게 된 것이다.

얼굴을 보면 다시 힘들어 질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용기를 내서 온 것이였다.


뭐? 그게 왜 상관이 없어. 내 아이잖아.

.... 아닐 수도 있죠.

그게 무슨 소리야.

....... 선배의 아이가 맞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어차피 앞으로.....


정하가 눈물을 흘렸다.

차마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월이 당황하며 정하의 곁으로 다가오자 정하가 그를 뿌리쳤다.


애 죽었어요. 유산이래.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있는 지도 몰랐어요. 알았으면... 알았으면...


정하는 그대로 몸을 웅크린채 울었다.

그런 정하를 바라보던 월은 숨을 크게 내쉬며 집 밖으로 나갔다.

월이 떠나가고 나서 정하는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커튼을 치고, 문을 닫아 아주 작은 공간에서 정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눈이 떠지면 떠지는 대로, 눈이 감기면 감기는 대로 이불 밖으로 단 한발자국도 내딛지 않은채 자다깨기를 반복했다.

정하는 자신의 몸이 점점 힘이 빠지는걸 느꼈다.

너무 무력했고, 이대로라면 죽는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눈이 감기던 도중 굳게 닫혔던 침실문이 열렸다.

정하는 살짝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에 있는건 다름아닌 하주였다.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피해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주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나온 정하는 또다시 하주와 섹스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번과는 다르게 정하의 눈에는 생기가 돌지 않았다.

멍하니 커튼을 친 창문만을 바라보는 정하의 모습에 하주는 답답했던 것인지 조금 짜증섞인 말투로 말했다.


좀 반응 하지? 꼭 시체를 껴안는것 같단 말이야.

......


정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주는 혀를 한번 차면서 정하의 몸을 뒤집어 머리를 눌러 침대에 박히도록 했다.

그러던 중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스탠드의 앞에 놓여있는 새하얀 종이를 보았다.

저게 뭘까, 하는 생각에 하주는 그것을 뒤집어 보았다.

다름아닌 초음파 사진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하가 조금씩 흐느끼고 있었다.


젠장.


하주는 조금의 욕설과 함께 정하의 안에 내보내고는 도망치듯 정하의 집을 빠져나왔다.

씻지않으면 배가 아프기에 정하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샤워를 했다.

그리곤 하주와의 관계로 어지럽혀진 침실이 아닌 거실의 소파에 누웠다.

구석에 놓여있는 큰 담요를 가지고 와서 몸을 감쌌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갑자기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정하는 느릿하게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정하야!


전화를 건 이는 다름아닌 성현이었다.

휴대폰 저 너머에서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넘어오는 것 같았다.


잘 지내고 있지?


잘 지내고 있냐고?

누가 보아도 정하의 모습은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 응..

별일은 없고?

......... 응..


별일.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 모든 일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커다란 해일이 되어 정하를 덮쳐버렸다.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이젠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이제 이틀 뒤면 돌아갈 수 있어.


어둡고 차가운 바닷속에서,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한 이 바닷속에서.

누군가가 정하를 향해 손을 내미는 듯 했다.

아주 따스하고, 찬란하게 느껴진 그 손.

정하는 물끄러미 그 손을 쳐다보았다.

잡을 수 있을까, 내가.


이제 금방 볼 수 있을거야.


주변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정하가 있던 곳은 어두운 바닷속이었는데, 이젠 푸르고 맑은 곳이 되었다.

주변을 살펴보았다.

밝은 기운이 흘러 넘쳤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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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8-06 23:54 | 조회 : 4,466 목록
작가의 말
류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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