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황비가 되다(최종화)



긴 꿈을 꾸었다.




꿈은 계속 비슷한 방향으로 반복되었다. 검은 머리칼을 가진 이드가 거대한 검은 손을 뻗치며 다가오면, 마인이 자신을 구한다.



가끔씩 희미한 의식 속에 익숙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리나의 것으로 생각되는 여린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늘 그 날 있었던 이야기를 들뜬 듯 조잘댔고, 틱틱 대는 말투가 특징인 미차드의 것은 '이 몸이 특별히 와 주었다.' 로 시작되었다.



콘들과 카인의 목소리도 자주 들렸다. 그러나 늘 뿌연 정신 속에 갇혀 있으면서 줄곧 기다렸던 건, 낮게 울리는 중저음의 마인의 목소리.




"오늘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짧게 하루를 이야기해주는 그 목소리는 이 말로 끝이 났다. 그리고 또 다시 다음 날이 되면 이 말을 되풀이하며 밤이 끝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답답한 고독 속에 갇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검은 시야에 뿌옇게 빛이 들어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정신이 점차 맑아지기 시작하면서, 시체처럼 힘이 풀려 추욱 늘어져 있던 육체에 피의 활력이 띄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힘이 쉽게 들어갈 듯한 손가락에 집중하자, 손가락이 까딱- 하고 움직였다.




오랫동안 뜨지 않아 흐린 시야를 몇 번 힘을 주어 깜박였다. 바쁘게 마인을 찾아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러나 바람과는 다르게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본 이는 꽃을 떨어트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메리나였다. 꽤나 오랜만인듯한 그녀는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방 밖으로 뛰쳐 나갔다.

마인을 불러오는 것일까. 그가 오면 무어라 말해야 할까.




기다렸냐고, 깨어났다고ㅡ





행복한 고민에 잠기며 찌뿌둥하게 결린 몸뚱이를 일으키려 해보았다. 그러나 아직은 무리인 듯 내 마음대로는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부들거리는 팔에 의지해 침대의 시트를 딛었다. 그제야 약간 마른 나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식물인간이었음에도 살이 많이 빠지지 않은 것은 에리아나의 신력 덕분일까.

그런데ㅡ.




















"리안..!"



심장박동이 일순간 멈추진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로 크게 울렸다.

두근두근ㅡ




고개를 돌렸다. 거친 숨을 내쉬며 열린 방문으로 성큼 성큼 들어오는 그가 보였다. 여전했다. 그의 푸른색 머리칼도, 날카롭게 뻗은 눈매도, 베일듯 오뚝한 코도, 붉은 입술도, 강직한 어깨도.



마인의 것이다.


그 사실에 방금까지 움직이지 않던 몸이 기력을 쇠한 것도 잊은 듯 움직였다. 겨우 뜨인 시야는 그에게로 집중했다. 며칠간 누워있었는 지 알 수 없는 익숙한 침대의 포근함에 벗어나 달렸다. 달리는 그 짧은 순간이 누군가가 잡고 늘린 듯 길고, 느리게 흘러갔다. 그가 손을 벌린다.




터억. 익숙한 느낌과 익숙한 라벤더 향기. 낮게 머리 위로 울리는 저음의 웃음소리. 내 힘 없는 몸을 꼭 끌어안는 굳건한 팔의 힘이 하나 하나 비현실적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다녀왔어요, 마인."











***






리안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운 소음들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냈다. 말을 듣지 않고 볼품없이 부들거리며 떨리던 몸도 어느덧 많이 회복되었다. 아직 기름진 음식은 입도 못대고 있지만, 그거야 뭐 어떤가.



하얀색 제복의 머릿깃이 팔랑거렸다. 리안은 이게 꽤나 창피했으나, 메리나가 이것이 격식이라며 단단히 충고한 까닭에 붉은 깃을 차마 빼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뻣뻣한 제복의 은빛 소매를 다시금 정리하며 리안은 식탁에 올려져 있던 와인잔에 든 물을 들어올렸다.



긴장을 안했다고 할 자신은 없다. 솔직히 표정이 굳어갈 정도로 긴장되었다. 길게 심호흡을 하며, 벽장 뒷장에 쳐진 붉고 큰 커튼을 살짝 열어보았다. 그러자 회장을 뜨거운 열기로 달구고 있는 하객들의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예상은 했지만 엄청난 숫자다. 리안이 또 한 번 심호흡을 내쉬자, 뒤에서 콘들이 키득거리며 어깨를 톡톡 쳤다. 뒤를 돌아보니 그 또한 평소에 입던 치렁치렁한 생활복이 아닌 녹빛 제복을 갖춰입고 황빛 모자를 쓴 미차드와 함께 하고 있었다.




"긴장되지?"

"이런걸로 긴장하다니, 쯧쯧."




콘들과 미차드의 장난스러운 말투에도 리안의 표정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오늘은 다름아닌, 마인과 저와의 '결혼식'이었으니까. 태어나서부터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기쁜 날이었으니까.
리안은 쿵쾅대는 가슴 부분을 진정시키려 주먹으로 탕탕 작게 쳤다.


그때 귀를 때리는 듯한 나팔 소리가 회장 안을 크게 울렸다. 콘들이 싱긋 웃으며 리안의 등을 떠밀었다.



"신부가 등장할 차례지-?"




리안은 떠밀려져 레드카펫이 깔려진 회장 안으로 드러섰다. 양쪽을 가득 채운 하객들과 정신없이 화려한 샹들리에에 정신이 멍했다. 그리고 시선이 고쳐 잡은 곳엔,


검은 제복을 차려입은 평소보다 몇 배는 멋있는 풍미를 풍기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인이 있었다. 그와 시선이 닿은 순간 떨림이 점차 멎어 들어갔다. 뻣뻣하게 굳은 표정을 풀고 한 걸음 내딛었다.



-성큼

그가 웃는다.





-성큼

그가 손을 뻗는다.



-성큼

나의 이름을 작게 불러준다.






레드카펫 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갔다. 하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손을 잡아, 리안."




그가 격식을 강조하듯 한쪽 팔을 등 뒤로 둔 채 뻗은 오른 손 위에 리안이 손을 포개 겹쳤다. 그리고 에리아나가 기다렸다는 듯 단상 위에 나란히 선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사회를 보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지루한 인사는 생략해라."




마인이 리안의 손을 꼭 그러잡으며 작게 명령하자, 에르아나가 그것을 받잡듯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둘은 평생을 사랑하며, 아끼며, 자손 대대 번성할 것을 가리어드를 수호하는 나, 신녀 [에르아나 그리스토뤼아]의 앞에서 맹세하라."



마인과 리안은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답은 정해져 있다. 둘이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맹세한다/ 맹세합니다."



"신녀의 앞에서 맺은 약조는 평생이 지나도 변하지 말아야 하며, 둘의 사랑과 새롭게 맺어진 황실의 영광은 오래토록 지속되어야 한다. 그럼 둘은 마지막으로 맹새의 키ㅡ"





에르아나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마인이 리안의 잡은 손을 끌어당기며 그대로 고개를 꺾어 입술을 맞추었다.



리안은 그동안 겪어왔던 오랜 고행을 잊어가며 그에 순응하듯 그의 입술을 받아내었다.



긴듯 짧은 잊맞춤을 멈추고 마인이 고개를 떼었다.



"너는 이제 내 황비. 처음 만날 때 했던 말을 다시 해주지. 이제부턴 내 명령없이 죽지도, 떠나지도, 맺어진 약조를 깨는 일을 하지 마라. 사랑한다, 리안."





"명령 받잡겠습니다, 폐하."





이번엔 리안이 발끝을 들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젠 영원히 함께다. 오래토록 더 이상 혼자 있지도, 혼자 견디지도 않아도 된다. 그 사실에 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이제부턴ㅡ








행복하게 될 것이라 믿어. 그리고 마인이 그것을 이뤄줄 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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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3-26 00:47 | 조회 : 3,313 목록
작가의 말
렌테

다음편은 후기입니다~! 요즘 너무 힘든 일이 잦아서 올리는 게 지연됐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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