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그럼, 나랑 사귀어요.

-07.-




하랑은 입을 떡하고 벌리며 제하의 집을 구경했다. 들어오는 입구부터가 보통이 아니었다. 큰 쇠문 옆에 있던 차고에는 3대의 차가 더 있었고. 차에서 내려서 작은 정원을 지나 집 앞에 섰을 때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집 크기와 웅장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 ..혀..형. 뭐하는 사람이예요? "

" 어? 나? 그냥... 사업가? "

" 집... 좋네요. "


신기하다는 듯이 방을 돌아다니는 하랑이 귀엽다는 생각에 제하는 말릴 생각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내버려 뒀다.

하랑은 두 번째 방의 문을 열었다. 뒤에는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고 그 앞으로 노트북 한 대와 크고 넓은 책상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닥에는 고급 카페트가 깔려 있었기에 하랑은 헉! 소리를 뱉었다.


" 우와. 본인이랑 안 어울리게 이 책들은 다 뭐야... "

" 뭐 임마? "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하랑이 흠칫 놀라서 천천히 뒤를 쳐다봤다. 어이없다는 듯이 서있는 제하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이고는 총총 걸음으로 책상 앞으로 갔다.


" 엄청 편해보이는 의자! "


하랑이 의자에 앉아서 허리를 뒤로 쭉 폈다. 의자는 하랑의 몸에 맞춰 부드럽게 넘어갔고 하랑은 자신의 낡은 침대보다 더 편하다고 생각하며 의자 위에서 그르렁거렸다.


" 너가 고양이야? 의자 하나에 이렇게 좋아하다니.. "

" 말도마요. 저 같은 서민 침대보다 더 좋은데요? "

" 흠..... 줄까? "


제하의 진지한 말투에 하랑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 원래 이렇게 막 주는 스타일인가?

하랑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고 우연히 눈길이 간 엎어져있는 액자를 살며시 들었다.


' 예쁘다... '


하랑이 넋 놓고 액자 속 사진에서 웃고 있는 여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앳되어 보이는 제하가 해맑게 웃으며 서 있었다.


" 이건 안돼. "


제하가 얼른 액자를 뺏어 들었다. 하랑은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완고한 제하의 표정에 조심스레 물었다.


" ...누구..예요? "

" .... 내 반쪽. "


쿵.


" .... 내.. 아내. "


쿵.


" ... 내 평생이 될.. 여자. "


하랑은 편한 의자에 앉은 체로 세 번 떨어져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무기력해지고 수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 몇살이에요? '
' 지금 어디있어요? '
' 어디가 좋아요? '
' 왜 좋아요? '
' 그 여자만 보여요? '

' 나는, 안 돼요? '


제하는 씁쓸하게 웃었던 미소를 지우고 액자를 다시 책상 위에 엎어뒀다. 그리고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는 하랑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 우악! "


하랑은 갑작스레 들어온 손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을 줬다. 그럼에도 제하는 꿈쩍도 하지 않고 하랑을 들어 올린 체로 방에서 나갔다.


" 형! 나 무거워! 내려줘! "

" 이 새끼가... 이게 무거운 거면 신다현은 지구를 뚫고 나가냐? "


제하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하랑은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느낄 수 있었다.

제하는... 저 방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구나. 그래서 액자도 덮어놨구나...


' 내가... 생각나게 했구나. '


" 형! 이제 내려줘! 나 물 마실래! "


하랑의 말에 제하는 하랑을 내려놓고 부엌까지 같이 들어왔다. 하랑은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가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맥주에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 술고래야!? 왜 이렇게 많이 마셔! "

" 글쎄다~. "

" 어휴. 이거 다 내가 먹어버려야지! "


하랑이 재빠르게 안에 있던 맥주캔을 양 팔로 가득 들었다. 제하가 한심하다는 듯이, 자랑스럽게 양 팔 가득 맥주캔을 들고 가는 하랑을 쳐다보며 일침을 날렸다.


" 또 사면 되잖아. 바보냐? "

" ... 우와. 지금 나한테 바보라고 한거야? "

" 똘똘한 새끼가 가끔 보면 멍청하다니까. "


하랑은 제하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대한민국 세 손가락안에 들어가는 국립대, 그 중 들어가기 힘들다는 법대! 그 법대의 수석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해온 하랑이다.


" 어이없다, 형. "


하랑의 말에 제하가 얼굴을 찌뿌리고는 하랑에게 다가와서 그의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그리고는 하랑이 방을 돌아보느라 정신없을 때 꺼내놨던 티와 바지를 대충 하랑에게 던져줬다.


" 이거라도 입고 나와. 양복 계속 입고 있을거야? "

" 아, 고마워. "


제하는 하랑이 나올 동안 유리로 된 상 위에 사온 과자와 맥주를 풀었다. 그리고는 비싸보이는 쇼파 위에 털썩 앉았다.

끼익-.


" 형이 다 세팅해 논거야? "

" 어? 어. 야, 근데 너. "


제하가 미간을 살짝 찌뿌렸다. 하랑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제하는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늑대의 소굴로 들어 온 것은 하랑이 아닌 자신이라고. 자신을 노리고 있는 순한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바로 하랑이라는 사실을.

원래 체격자체가 달랐기에 (제하는 어깨가 넓고 가슴이 있는 편이라면 하랑의 어깨는 지극히 평범한 수준) 원래부터 제하의 옷이 맞을리가 없었다. 목 부분은 가슴골 중간까지 내려왔으며 쇄골과 어깨가 적날하게 다 보였다. 옷이 금방이라도 스스륵하고 팔을 타고 내려갈 것 같았다.

그리고 팔뚝이 있는 제하에게 익숙해진 옷은 제하보다 비교적 얇은 하랑의 팔에서 나풀나풀거렸고 바지는 길어서 살짝 질질 끌고 있었다.


" 너. 왜 이렇게 작아? "


제하가 혀를 한 번 차고는 하랑의 옷을 만져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넉이 나갔던 제하, 자신도 모르게 옆에 있던 맥주를 쳤고, 맥주는 상에서 떨어져 또르르. 굴러갔다. 하랑이 아! 하고는 맥주캔을 집었다.


" 조심해. "

" 어어. "

" 어! 형 그거 따지마! 그거! "


푸슉!

제하는 자연스럽게 맥주캔이 바닥을 굴렀다는 것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뚜껑을 따버렸다. 경쾌한 알루미늄 소리와 함께 맥주가 터져나와서 앞에 있던 하랑의 얼굴에 들이 부어졌다.


" 아... 헐. 야, 미안. "

" 아... 진짜... 얼굴만 씻고 올게. "


하랑이 씻으러 간 사이 제하가 몸을 뒤로 누워 쇼파의 등받이에 기댔다. 진정해야 한다. 아까 차 안에서처럼, 괜한 실수하면 안돼! 제하는 몇 번이고 마음 속 자신과 다짐했다.

이상하게 하랑과 단 둘이 있으면 뭐든 절제가 되지 않았다. 하랑에게서는 묘햔 향이 흘러나왔고, 자신은 그 향이 싫지 않았다.


' 여자가.. 고팠나...? '


제하는 최근 관계를 맺지 않아서 많이 싸여 있었나? 싶어 자신의 분신을 살짝 내려다 봤다. 흐음... 하고 제하가 깊은 고민에 빠져있을 때 하랑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 형, 수건 그냥 아무거나 썼어. "


젠장. 쟤는, 남자 맞어? 아. 미치겠네.

제하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귀여웠다. 그냥, 귀여운 동생쯤으로 충분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이런 반응을 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래. 이리와서 마셔. "


하랑이 제하의 말에 쫄래쫄래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제하가 사온 이 십만원 어치의 과자를 먹으며 맥주를 까서 마셨다.



-




하랑의 볼이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 술기운이 돌고 있어서 그런지 길게 내려오던 바지가 답답해졌다. 조금 졸린 것 같기도 하고.


" 덥냐? "

" 응. 갑갑해. "

" 기다려봐. 반바지 줄게. "

" 네! "


하랑은 생글생글 웃으며 제하를 기다렸다. 제하는 4부정도의 짧은 바지를 건냈다. 그런데... 이거... 아무리 봐도.


" 이거, 여자꺼 아냐? "

" 어. 맞어. 근데 아마 맞을 거야. 이런거는. "

" 뭐... 더우니까. "


하랑은 기분이 급격하게 다운되는 걸 느꼈지만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 방에 들어가서 바지를 갈아 입었다. 하랑이 나오자 어느새 열 캔 넘게 마시고 있는 제하가 보였다.


" 아! 치사해! 혼자만!! "


하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자 살짝 취한 듯해 보이는 제하가 피식 웃으며 하랑에게 오라고 손 짓을 했다. 하랑은 천천히 걸어가서 제하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캔을 따려고 손을 뻗자 제하가 얼른 자신이 마시던 걸 건냈다.


" 내가 딸게. 너는 마셔. 손 다쳤잖아. "

" ..고마워요... 형 때문에 다친거 아니니까 이럴 필요 없는데... "

" ...아냐. 나 때문이야. ...미안하다. "


제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랑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갸우뚱했지만 제하가 취한 줄 알고 그의 등을 토닥토닥해주었다. 그 순간 제하가 얼굴을 확 들었다. 하랑은 순간적으로 비춰진 제하의 눈에서 이유모를 슬픔을 느끼고 토닥거리던 손을 멈췄다.


" ...형. 아까.. 그 여자 분이... 신여주라는 분이에요? "


하랑이 조심스레 묻자 제하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하랑을 쳐다봤다. 그런 제하의 반응에 하랑은 제하를 재대로 보지도 못하고 아니예요..하며 고개를 숙였다.


" ...맞어. 신여주야. 우리 여주. "

" ...많이 좋아하시나봐요..? "

" 응. 좋아해. 사랑해. "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하는 제하의 모습에서 답답함, 짜증남, 그리고 부러움을 느낀 하랑이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자신은 20년 넘게 사랑을 갈구했다. 항상 사랑받고 싶었다.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이유도, 남자와 사겨 온 이유도,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여자와의 알콩달콩한 연애가 아닌, 항상 다른 남자들의 먹잇감이 되었던 자신을 지켜줄, 그리고 사랑을 줄 남자를 원했다.


" ...부럽네요... "

" 뭐가? 내가? "

" 풉. 그럴리가요. "


하랑이 생글 웃으며 말하자 제하도 표정을 폈다. 그리고 하랑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을 꺼냈다.


"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되잖아. "


아... 당신은 정말 야속하군요. 이렇게 몰라주다니...

말 없이 술을 마시던 하랑은 어딘지 다급해보였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마치 귀신에게 쫒기듯. 제하는 인상을 찌뿌리고는 하랑의 손에서 맥주캔을 뺏었다.


" 그만마셔. 왜 이래? "

" ...부러워서 그래요. 부러워서. "

" ...휴. 어린애같군. "


제하가 낮게 웃으며 말하자 하랑이 빤히 제하를 쳐다봤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하랑의 양 손이 제하의 뺨을 감싸자 제하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하랑의 입에서 신음소리와도 같은 목소리가 기어나왔다.


" ...싶어..요... 사랑.. 받고 싶어요... "


진심을 보이듯 제하의 양 볼을 감싼 하랑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이내 하랑은 눈물을 보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가느다란 어깨와 팔둑이 떨려오고 잔뜩 움추린 몸이 함께 떨려왔다.


" 하랑아... "

" 부르지마. 부르지마요... "

" 이하랑.. 하랑아.. "


제하가 불안한 듯 하랑을 불렀다. 하랑은 몇 번 제하를 거절하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 제하를 마주봤다. 그리고 하랑이 피식 웃고는 가볍게 제하의 입에 자신의 입을 겹쳤다.


" ...그 분, 어디 갔어요? "


하랑이 제대로 입을 떼지도 않고 말하자 제하가 하랑을 밀치듯 떨어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순결한 그녀에게 더러운 것을 숨기듯...


" 유학 갔어. 언제 올지도 몰라. "


제하의 거부에 하랑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제하를 쳐다봤다.


" 결혼하자 약속했어. 미안. 결혼을 약속하고 유학을 보냈어. 그래서 그 뒤로 여자랑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않아. 아니, 아예 밤일을 하지 않아. 혹시나 아이가 생길까봐. 혹시나 그 여자가 나를 찾아 올까봐. "


제하가 중얼거리듯 마음 속에 묻어놨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하랑은 힘 없이 몸을 축 늘어트리고 앉아 있다가 미동 없는 눈으로 제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 그럼.. 나랑 사겨요. "


하랑의 말에 제하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하랑을 쳐다봤다. 하랑은 해맑게 웃으며 여전히 힘이 빠진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는 제하의 무릎 위에 앉았다.


" 나, 남자라서 아이를 가질 일도 없고. 그 분이 오면 순순히 물러가 줄 의향도 있어요. 다 큰 남자가 그렇게 참으면 힘들잖아요. "

" 이 하랑.. "

" 나도 ... 형 같은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 같애요. 그 분 오기 전까지 나랑 관계도 맺고, 좋은 곳도 가고 그래요. ...나를 가져요. "


하랑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눈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입꼬리는 덜덜 떨리며 내려가지 않게 고정하고 있었다. 제하가 한참을 하랑을 보다가 그의 허리에 손을 감싸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 너 상처받아. 그만해. "

" 괜찮아요. 더 한것도 견뎠어요. 이제 괜찮아요. 제발...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나한테도 줘요. 형이 가지고 있는거. 대용품이라도 좋으니까 잠깐이라도.. 응? "


이윽고 하랑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하는 하랑의 울음소리와 심장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들었다.


" 뚝하자. 응? 하랑이, 그만 울자. "

" 흑... 형.. 제발... 형.. "


애절하게 하랑이 제하를 불렀다. 하랑의 눈은 눈물로 가득차서 제하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제하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꼭 거절하는 것 같았다.

제하가 최대한 울음소리를 삼키며 울고 있는 하랑을 보다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천천히, 느릿하게. 받아드리며 말했다.


" 울지말고, 나를 봐. 뭐를 줄까? 뭐 해줄까? "


제하의 말에 하랑이 제하의 얼굴을 들었다. 제하는 자신이 깨물어서 피가 나고 있는 하랑의 입술을 쳐다봤다.

...상처를 준 건가.


" 사랑... 사랑을 주세요. "

" 그래그래. 줄게. "

" ...키스해주세요. "


하랑이 제하의 목에 손을 두르며 말하자 제하가 하랑에게 응하듯 입을 곂쳤다.

슬픈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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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8-02 18:33 | 조회 : 6,916 목록
작가의 말
MIRIBYEOL

조금 있으면 19금판 (뒷내용) 올라올 예정입니다. 혹시나 성인인증이 걸리시면 제 블로그에 따로 올려놓을까 생각중인데... (개방적인..) 어떻게 해야할 지 의견을 말해주세요. :) 애절한 둘! 애절애절해! 자. 음란마귀 여러분 터질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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