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쎄끈해. 쎄끈해.










-04.-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밝은 천장과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의 형상들. 어떻게 된 일이지? 정신을 차리랴고 눈을 부릅뜨려고, 어릴 적 나는 발버둥을 쳤지만 손가락 하나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를 보던 사람들은 내가 발버둥치는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계속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눈 앞의 초점은 제대로 맞춰지지 않았고 제대로 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내 몸을 더듬는 손길만 느껴졌다. 집요하게, 끈적거리며, 막 10살이 된 내 몸을 짓밟고 제대로 먹지 못해 또래보다 작았던 내 몸을 주먹으로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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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랑아. 여기 커피 아무거나 하나만! "

" 네! 카페라떼 드릴게요~ "


여기서 일한 지도 벌써 2주. 하랑은 어느덧 이 풍경에 물들었다. 일은 다현이 말했던 것처럼 커피를 타고, 청소를 하고, 형님들이 과로로 쓰러지면 일을 도맡아 해주는 것들 뿐이었다. 몸을 쓰던 예전의 일들보다 훨씬 마음도, 몸도 편했다.

그리고, 여기 형님들은 나쁜사람들이 없었다. 모두 하나같이 하랑을 친동생처럼 아껴주었고 왠만한 힘든 일(무거운 걸 들고 나르는)이나 장시간 서있는 일들을 시키지 않았다.


" 박 과장님! 시럽 한 번 넣었어요! "

" 캬! 역시 하랑이라니까!! "


하랑 역시 초반에는 소극적이었지만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이보다 더 싹싹할 순 없었다. 싹싹한 데다가 피곤해하는 자신들을 대신해서 해 논 일은 흠 잡을 데 없었고 부지런하고 성실하니 누가 싫어하랴.


" 부사장님 오셨어요? "


제하를 본 하랑의 입가에 미소가 띄였다. 제하는 알았다는 듯이 손을 휙휙 저어보이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하랑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제하에게 다가갔다.


" 오늘도 아메리카노인가요? "

" 아, 어. 진하게 타줘. "

" 투샷으로 해드릴게요. "


하랑은 피곤해보이는 제하를 뒤로 하고 싼로가 있는 방으로 돌아와서 최선을 다해 아메리카노를 내렸다. 그러고보니 제하가 피곤해 보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보였다. 일단, 제하의 옷과 머리. 평소와는 다르게 왁스를 써서 뒤로 확하고 올린 머리와 평소에는 덥다고 와이셔츠 하나 밖에 (그것도 팔까지 걷어올린) 입지 않았는데, 오늘은 완벽한 풀 세트 정장이었다.

" 왠일이세요. 이렇게 세... 아... "

" 세 뭐 임마? "


끈..하게. 세끈하게. 아.


" 세..센 척 쩌..쩔어요. "

" 이 새끼가! 휴... 그냥 노친네들 모임에 맞장구 치고 오는 거야. "

" 아, 그렇군요. "


하랑은 자신의 마음을 들긴 것 같아서 얼른 몸을 돌려 작은 방으로 돌아왔다.


' 미쳤어! 미쳤어!!! 이하랑 미쳤어 정말!!!'


하랑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쇼파에 누웠다. 며칠 전, 제하가 사준 병아리모양 인형을 가슴팍게 꼭 끌어안았다.


[ 자. 거기 쿠션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거라도 배고 자고 싶음 자던가. ]

[ 에? 예?! ...아, 감사합니다. 근데... 왜, 병아리입니까? ]

[ 비실비실하잖어. 딱 너처럼. ]


그리고 피식 웃는 제하는 정말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섹시했다. 아아! 하랑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저 사람은 노멀이다. 그리고 뼈 속 깊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 자신의 것이 아니다. 알고는 있지만 뭐랄까, 곁에 있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치유가 되는 듯 했다.

그냥, 곁에 있는 것 만으로도 좋았다.


" 하랑아~ 부사장님이 잠시 나가자시는데? "

" 네? "


하랑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김 부장이나 다른 형님들과는 여러번 같이 다녔지만 부사장이 같이 나가자고 한 적은 처음이었다.


" 아아. 꼬맹이. 지금부터 잠시 자선파티에 가야하는데, 비서 역할 좀 하자. "

" 네?! ...저 이 꼴인데요? "

" 그니까 옷 사러 가자고. "


제하는 귀찮다는 듯이 말하고는 하랑에게 어깨를 두르고 폭풍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하랑은 확 하고 풍겨오는 제하의 냄새에 머리가 아찔해져서 그저 제하에게 질질 끌려가기 바빴다. 차를 타려던 제하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하랑을 쳐다봤다.


" 왜... 왜요? "

" 음. 너 허리 몇 인치? "

" ...아! 그건 또 왜요! "

" 날카롭기는. "


하랑은 귀가 벌게져서 제하를 살짝 노려봤다. 제하는 하랑의 반응에 여자같음이 콤플렉스인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는 하랑의 허리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 부...부사장님!!! "

" 시끄러워. "

" ..벼..변태입니까!? 부사장님은!? 정말로! "

" ...뭐!? 너 계속 나를 변태로 몰래!?!? 죽고 싶냐!? "


제하의 소리침에 하랑이 살짝 흠칫하고 떨고는 제하를 살짝 밀어냈다. 제하는 어짜피 떨어질 거였다는듯이 쉽게 물러서면서 흠. 하고는 차에 탔다. 그리고 앞에서 운전을 하던 운전수에게 말을 걸었다.


" 야. "

" 예. 부사장님 "

" 우리 옷집에 있는 동안 허리띠 하나만 사놔줘. "

" 허리띠요? "

" 어. 검은색에 그냥 단순한 걸로. "


운전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랑은 옆에서 듣다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갑자기 왠 허리띠이지? 허리띠가 낡아서 사시려는 건가?


" ... 부사장님. 갑자기 왠 허리띠예요? "


하랑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물음에 제하의 눈이 가늘게 떠지더니 하랑은 살짝 내려다보고는 삐졌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 변태 부사장 취미다. 왜! "

" 아... 쪼..잔.."

" 뭐? "

" 아니요. 대인배인 우리 부사장님께서 미천한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라고요. "


제하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든 체 코웃음을 쳤다. 하랑은 이런 소인배에 쪼잔한 인간을 다봤나! 하며 헤헤. 웃었다.


" 우리가 지금 가려는 양복집은 29인치 아래로는 없거든. "

" 아,... 그래서. "


하랑은 자신이 내뱉어 놓고도 뭔가 거북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뿌렸다. 그리고는 제하를 휙 하고 쳐다봤다.


" 그냥 29 입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

" ... 줄줄 흘러내릴걸? "

" 아니라고요! "

" 야, 솔직하게 너 27인치지? "


하랑은 뜨끔 거려서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휙휙 저었다.


" 2.. 28입니다! "

" 거짓말. 너 26에서 27입지? "


하랑은 한 번 더 놀라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물론 정확하게 몇 인치다! 라고는 말 못하지만 확실히 교복은 제일 작은 사이즈였던 28도 허리띠를 둘러 맸을 정도니... 그럼에도 하랑은 자존심에 달린 문제다! 하며 고개를 다시 한 번 저었다.


" 오호. 그렇게 나오겠다. 그럼, 내기하자! "

" 네? "

" 양복집 가서 사이즈 재보고 28이면 네가 원하는 거 뭐든 다 해줄게. 대신에 26에서 27이면. 넌 죽었어 임마.

" ...안 그래도 돈도 뭣도 없는 불쌍한 대학생한테서 뭘 뜯으실려고요. "


하랑의 말에 제하는 흠.. 하고는 고민하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사악하게 한 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하랑의 턱을 잡고는 말했다.


" 돈이 없으면 몸으로 떼워야지? "


하랑은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됨을 느꼈다. 이 남자가 뭐라고 하는 건가... 몸으로 떼우라니... 그게 무슨... 하랑의 얼굴이 일순간 굳자, 제하가 하하! 웃으며 손을 놨다.


" 앞으로 10년간 부려먹어야지. 저임금으로! 크크크. 평생 내 커피나 만들게 해야지. 일이나 시키고. "


아, 그런 의미인가. 하랑은 그제서야 엉뚱한 오해를 한 자신이 부끄러웠고 한 편으로는 그렇게 안겨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식으로도 옆에 있으면 어떨까. 싶었던 자신의 마음이 야속하고, 웃기고, 어이가 없어서 낮게 웃었다.

비웃음. 자신을 향한.

사랑은 받는다는 것과 자신은 역시 멀고도 먼 관계인건가... 이런식으로 라고 옆에 있고 싶다라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 였나, 이하랑이란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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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7-30 19:19 | 조회 : 7,423 목록
작가의 말
MIRIBYEOL

어제는 홍대로 나들이 :) ㅋㅋㅋㅋ 음흉한 부사장님 박제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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