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Wish


27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삶을 살면서 무언가를 진심으로 바란 적 없었다.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그 정도라면 모를까, 가난에 찌들어 본 적도 없었고 이렇다할 불행을 겪어보지도 못했다.

내게 있었던 단 한 가지 결점이라면 선천적으로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 뿐이였다. 그러나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낄 일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국회의원이였기에 누구도 날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는 점이 크게 한 몫했다. 화목했던 가정 분위기는 사춘기조차 무시하고 지나가게 만들었다. 나는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아도 될 만큼 행복했다.

아버지가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 * *


“아, 우욱.”

[경고! 부작용으로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 거북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창을 애써 무시하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자 등 뒤에서 토닥이는 느낌이 따뜻하게 전해져왔다. 눈을 다시 뜨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지윤우다.

“선배, 악몽 꿨어요? 진정하고 숨 좀 쉬어봐요.”

다정한 말투에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그에게 다가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분명 매몰차게 밀어낼 그였다. 이제와서 그게 무섭다면 죄는 나에게 있는 걸까. 가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윤우. 열 아홉 살. 1급 팬텀인 동시에 아카데미 조기졸업을 딱 1년 앞두고 있는 미래의 기대주. 그럼에도 귀족 출신이 아니기에 세간에서 그를 지칭하는 말이 많았다. 돌연변이부터 시작해서 사실 왕가의 사생아라던지. 물론 고귀하신 왕께서 노발대발했기에 쉬쉬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거리에 나가면 그마저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초기의 이야기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적색 전쟁으로 얼굴이 알려지면, 그의 잘생겨먹은 낯짝과 친절한 가짜 성정에 홀린 사람들 덕에 우대받는 영웅이 된다. 그쯤이면 난 싸늘한 시체로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을테고.

어떻게 미래에 대해 단정할 수 있냐면, 우선 이곳이 소설 속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가 쓴 소설. 돈이 많았던 아버지께 감사하며, 집에서 놀고먹기만 했던 나의 유일한 취미는 글쓰기였다. 어렸을 적부터 유치한 글을 읽어주던 남동생이 갑자기 정식 연재를 제안했고, 빠르게 출판사와 컨택하며 떳떳한 작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익숙한 클리셰가 판치던 소설계에 새로운 세계관이 받아들여질 자리는 없었다. 골방 신세를 졌다는 말이다.

여기서 팬텀은 일종의 이능력자다. 7급에서 1급까지 존재하며, 지윤우와 같은 1급 팬텀은 세계관 내에서도 굉장히 드물었다. 그리고 우울하게도 나는 그런 지윤우에게 깝치다가 핏덩이가 될 5급짜리 고구마다. 이런 걸 빙의라고 하던가. 이왕 빙의시켜 줄거면 저 싹바가지한테 빙의시켜 주지. 한도경, 반듯하게 쓰인 명찰을 원망스럽게 본 게 몇 번이였는지.

결국 내게 빙의 전과 같은 선택지는 없었다. 때문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 진심으로 빌어보았다. 이 이야기의 끝에서 죽지 않도록. 지윤우의 검이 내 목을 향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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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3-02-06 14:03 | 조회 : 56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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