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재회

이쯤에서 다시 느낀다.
에밀리아 프뢸리히와 처음 만났던 날, 그녀는 바그너라는 남자의 모습을 보였지. 그게 한낱 연기일까 아니면 정말 그녀가 이미 죽은 바그너와 교감을 할 수 있는 걸까 점점 의문이 든다.
그 부분에서 그녀를 살려둔 거긴 하지만 요즘은 그녀가 바그너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면 내가 그녀를 살려둔 이유가 없는데...

요즘따라 머리가 너무 아프다.
프뢸리히 공녀의 바그너 행세, 갑자기 퍼진 전염병, 가문을 이을 생각 조차 하지 않는 칼럼과 카밀라의 사형 집행까지. 먼저 카밀라의 사형 집행을 막아야 한다. 그녀의 사형 집행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일단 프뢸리히 공녀를 설득해야겠지.

프뢸리히 공녀...
그녀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다. 사람들을 속이고 설득하는데 익숙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얻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라면 사람을 죽이는 거 따위는 손 쉽게 할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 넘치고 영리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영악하고 피도 눈물도 없었다.

솔직히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은 없었다. 그녀를 설득하다가 오히려 내가 설득 당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내 약점을 잡았으니 나도 그녀의 약점을 잡아야 한다. 그녀의 약점이 뭐가 있을까? 그녀가 카밀라를 모함했다 할까? 아니지, 그녀는 공녀이고 카밀라는 그저 평민이다. 그리고 사형을 집행할 때는 어떻게 사형을 집행하게 되었는지, 누가 사형수를 고발했는지 밝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의 약점이 무엇이 있을까. 아니, 그녀가 약점이 있긴 할까?

"올리비아, 너 프뢸리히 공녀의 저택으로 옮기기로 했지?"
"네, 공작님."
"아... 그래..?"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올리비아, 너 급히 돈이 필요하다 했지?"
"아... 네."
"흐음... 그러면 일 하나 해볼래? 아주 간단한 거야. 돈도 많이 챙겨줄 테니까"
"네? 혹시 무슨 일인지..."
"간단해, 프뢸리히 공녀의 저택에 가면 내가 널 프뢸리히 공녀의 측근으로 둘 거야. 그 일은 내가 할 거니까 넌 그냥 기다리고 있고. 측근으로 가면 그녀의 일정이나 어떤 일을 했는지, 어디에 갔는지, 그녀의 저택에 누가 방문했는지 모두 다 체크해서 나에게 보고하면 돼. 아주 간단하지?"
"아, 네!"
"그리고 넌 이제 올리비아 라우터바흐가 아니라 올리비아 퀴헨이야. 알았어?"
"아... 네. 그렇긴 한데 왜 갑자기 그러시는지..."
"그건 알 필요 없어."
"아! 네!"

올리비아는 급히 방을 뛰쳐 나갔다.

그녀를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조금 고민이 되었다. 그녀와 나는 약혼자 사이다. 그러므로 인연을 끊을 수는 없다. 인연을 이어나가면서 그녀에게 휘둘려서는 안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날 옥죄어 오고 있다. 그녀에게서 벗어나려고 한 발자국을 나가면 발목에 사슬이 감겨오고 두 발자국 나가면 다른 발목에 사슬이 감겨온다. 계속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면 칠 수록 점점 다가오는 사슬에 팔을 내주고, 상체를 내주고 결국은 목까지 내주게 되어있다.

그녀는 한 번 잡은 먹잇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에게 잡힌 먹잇감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 그녀의 장난감이 된다. 겉으로는 세상 친절한 척, 자신의 영리한 머리를 착한 쪽으로 굴리는 척을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장난감을 찾으러 다니며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가지고 놀다 그 사람이 죽기 직전이 되면 그 사람을 세찬 비가 내리는 숲 속에 버려버린다. 그들은 그녀에게서 벗어났다고 안심하고 행복해 하기도 잠시.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누군가에게 인생의 빛을 빼앗겨 버린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그녀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서 벗어나도 아직 그녀의 손아귀 안 이라는 걸 깨닫게 되며 그 장난감의 인생의 막이 내린다.

그런데

그게 정녕 내 미래란 말인가?

내가 그녀에게 흥미를 느끼고 그녀를 가지고 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 반대로 놀음에 이용되던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그녀는 내가 정말 아끼던 것들을 하나 하나 뺏어가 의지할 곳은 그녀 밖에 없다는 걸 알려준 후, 그 사람을 천천히 고립시킨다.

누군가는 그녀가 왕권을 살리려 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왕권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며 그녀에게 많은 관심을 주고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 한다.

근데 그렇게 영리한 그녀가 왕권을 살리는 것에 만족할까?

아니, 오히려 자기가 왕권을 뺐어 버릴 걸?

머리 속이 갑갑해질 때 즈음, 방문에 노크 소리와 함께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한 손에는 빨간 루비가 달려 있는 부채를 들고 들어왔다.

"공작,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프뢸리히 공녀 덕분에 잘 지냅니다."
"그렇군요, 왜 저를 공작의 저택에 불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녀가 들어오며 그녀의 하인들과 나의 하인들, 그리고 그녀의 전속 집사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그녀는 어울리지도 않게 교양 있는 척, 예의 있는 척을 하며 존댓말까지 쓰고 있었다.
그래, 그녀는 대중의 반응과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예민한 사람이지.

"별 건 아닙니다. 그 전에 하인들을 내보내는 게 좋겠죠?"
"그렇게 중대한 말씀이시라면."

그녀는 하인들과 그녀의 집사까지 내보내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다리를 확 꼬았다.

"그래, 왜 불렀지?"
"이제야 공녀 성격이 나오는군."
"시간 없으니까 본론만."
"그래, 알겠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3 개가 있네. 먼저 우리 저택에 있던 여자 하인 올리비아를 그대의 저택으로 보내려 하는데 어떤가?"
"올리비아?"
"그래. 자, 여기 사진이랑 소개장이네."
"생긴 건 꽤 반반하게 생겼군, 눈치도 빨라 보이고 말이야. 가문은... 오, 퀴헨 가문의 영애군.아드리앙 퀴헨 자작의 영애 맞지?"
"그렇네."
"흐응... 꽤 마음에 드는 애야. 근데 데려가진 않겠어."
"...뭐?!"
"소리 낮춰, 이 애 말이야... 수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야."
"무슨 소리지?"
"수상한 점이 4가지 있지. 첫 번째, 그녀의 거주지가 퀴헨 자작이 사는 케임브리지가 아니라 퀴헨 자작의 옛 거주지인 맨 체스터로 되어있군? 퀴헨 자작이 얼마 전에 이사를 했을 때 내가 에덴 퀴헨 영애와 친분이 있어 방문 했을 때, 오너러블 제임스 역시 자작과 함께 살고 있더군. 그럼 그녀 또한 그들이 이사 왔을 때 알았을 터. 그렇다면 그녀의 거주지 또한 맨 체스처로 되어 있어야겠지."
"그건 그녀가 퀴헨 자작이 맨 체스터로 오기 전 적은 소개장이라 그렇다네."
"그래?"

그녀가 소름 끼치게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난 퀴헨 자작이 맨 체스터로 이사를 왔을 때 그의 집을 쭉 둘러본 적 있었네. 그 집은 2층으로 조금 작은 저택이었는데 방이 총 지하실과 1층과 2층 합쳐 9 개가 있었네. 그 중 하인과 하녀들의 방은 총 2 개와 지하에 있는 방 하나, 에덴 퀴헨 영애의 방 하나, 오너러블 제임스의 방 하나, 아드리앙 퀴헨 자작과 챠를로트 퀴헨 부인의 방 하나, 손님방 2 개가 있었다네. 그렇다면 방이 하나가 남는데 그 방은 아드리앙 퀴헨의 누나 엠마 퀴헨의 방이었지. 그렇다면 그 저택엔 올리비아 퀴헨의 방이 없나? 라고 생각을 했지. 그녀는 하녀 일을 하며 한 번도 집에 돌아간 적이 없으니까 그럴 수 있다 생각을 했어."

그녀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런데 퀴헨 자작의 가족 사랑이 엄청난 건 그대도 익히 알고 있을 사실이야. 그는 지금 거의 3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오너러블 제임스의 사진을 호주머니에 소중히 넣고 다니더군. 그 집에 가족 사진이 총 3 개가 있었네. 근데 그 중에 올리비아 퀴헨의 모습은 눈을 비비고 봐도 찾아 볼 수 없었어. 그건 어떻게 변명할 거지?"
"..."
"그리고 세 번째, 퀴헨 자작의 자식은 아들 하나, 딸 하나로 알고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자식은 오너러블 제임스와 에덴 퀴헨 영애 밖에 없네. 근데 올리비아가 퀴헨 자작의 숨겨진 딸이라면 왜 그는 그걸 세상에 밝히지 않은 거지? 그렇게 자식 사랑이 넘치는 그가?"
"..."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이걸 한 번 읽어보게."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건넨 두 장의 종이를 보았다. 첫 번째 종이는 그녀가 퀴헨 자작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그 내용은
''''''''''''''''아드리앙 퀴헨 자작, 날씨가 점점 따뜻해져 꽃들이 만개하더군요. 이러한 와중에 잘 지내시나 안부를 묻고 싶어 서신을 써보았습니다. 에덴 퀴헨 영애가 좋아하는 꽃들이 저의 저택에 만개하였습니다. 언제 한 번 저희 저택에 와 함께 차라도 마시면 좋겠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퀴헨 자작의 밑에 오너러블 제임스와 에덴 퀴헨 영애 외에도 또 다른 이가 있나요? 어떤 이가 퀴헨 자작 밑에 숨겨진 딸이 있다 제 게 이야기를 하여 제가 그에 맞게 벌을 주고 교육을 하였지만 그 자가 정말이라 수 백, 수 천 번 얘기하길래 혹시 몰라 물어봅니다. 정말 그런 건 아니겠지요? 걱정이 되어 밤 잠을 설친 지 오래 입니다. 제 게는 거짓 없이 답해 주셨음 좋겠네요. 그럼 곧 저희 저택에서 뵙죠.''''''''''''''''

순간 머리를 망치로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이미 그녀는 내가 올리비아를 소개 하지 않았을 때도 올리비아의 뒷조사를 하고 다녔었나?

그 다음은 퀴헨 자작의 서신이었다.
''''''''''''''''먼저 서신을 주시다니 황송합니다. 제가 다음 주 수요일 날 저택에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초대까지 해주시다니 이거 참 황송하여 어쩌할 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밑으로는 제임스와 에덴이 전부입니다. 그 자가 잘못 알고 말하는 것 같으나 이런 말이 밖으로 세어나가면 저의 아들과 딸에게 피해가 갈 것만 같아 무섭습니다. 공녀님께서 따끔히 벌을 내려 주시고 교육을 시켜주셨다니 무서움을 덜었으나 그 자가 계속 그렇다고 말하니 언젠가 밖으로 세어나갈까 노심초사합니다. 요즈음 왕권이 점점 무너져서 그런지 한 번 이런 구설수가 민간에 올랐다가는 다른 귀족 분들께 해를 끼칠까 걱정됩니다. 프뢸리히 공녀님께서 제대로 입 막음을 해주십시오.''''''''''''''''

"자, 어떤가?"
"아..."
"이래도 변명할 수 있겠는가? 공작."

#19세기물 #혐관 #전염병 #퓨전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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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08-27 16:07 | 조회 : 360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