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마지막일지 몰라

“하… 완벽해! 방금 여왕이 내 칭찬한 거 봤어? 로지아레즈같다고 했어!”
“어련하시겠어요~”
“이제 내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다이애나를 죽일 수 있다고!”

궁전을 나오자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는 게 보였다. 아… 하인들도 안 끌고 왔는데…

“아, 비오는데 어떡하지?”
“모르지, 그냥 비 맞는 수 밖에 있겠어?”
“비를 맞고 가겠다고? 그냥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면 안돼는거야?”
“그래도 되긴 한데… 지금 비가 그칠 기미가 안 보이는데…”
“공녀 신분에 비 맞고 다니는 게 더 우스울 거 같은데?”
“뭐… 그렇긴 하지. 그럼 근처 상점에나 들려서 우산 사올 테니까 공녀님은 여기서 꼼짝말고 기다리세요~“
“뭐야… 그럼 나도 갈래.”
“안돼, 아직 너 노리는 청부업자 있다니까? 나 따라 왔다가 갑자기 납치라도 당하면 어쩔려고?”
“듣고 보니 그렇네, 알겠어. 기다릴게. 대신에 얼른 와야해.”
“응, 당연하지.”

그는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빠르게 뛰어 근처 상점가로 달려갔다. 비 때문에 신경써서 입고 온 초록색 드레스는 비에 젖어버렸고, 하이힐 안에는 빗물을 조금 스며들어갔다.

“으… 찝찝해.”

그가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니 조금씩 피곤해져 갔다.

“아… 언제 오는거야…”

점점 눈이 감겨오고 졸려올 때 즈음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들렸다. 니콜라이 후작인가? 하며 몸을 뒤로 돌리려 한 순간

푹!

등에 무언가가 세게 꽂힌 느낌이었다. 바닥의 빗물이 붉게 물들어 갔고, 드레스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입에선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프흡, 커억… 누, 누구야…”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배에 젖 먹던 힘을 주어 뒤를 돌아보자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내 등을 찌른 칼을 다시 꺼내 손 위에서 돌리고 있었다.

“안녕, 공녀님~ 저번에 우리 애 하나 반 죽여놨더라? 내가 그걸 보고 오죽 분해야지… 공녀 인생 되게 편했을텐데… 이제 끝이야, 어디 한 번 살려고 발악해 봐.”

그는 그런 말을 남기고는 칼을 바닥에 버리고 유유히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다리엔 힘이 풀려 쓰러졌고 정신 또한 몽롱해지며 눈이 점점 감겼다. 차가운 빗물이 눈 앞으로 떨어지며 내 눈을 감기려고 애를 썼다.

그래, 감아 줄게. 감아 준다고.

라고 생각한 찰나에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음과 함께 정신을 잃게 되었다.

*

정신을 차렸을 땐, 몸이 흔들리는 느낌을 계속 받을 때였다. 빗물은 계속해서 내 얼굴을 마구 때렸고,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서서히 눈을 뜨자 눈 앞에 보인 사람은 금발의 남자였다. 금발에… 파란 눈…?

익숙한 남자였다.

“ㅋ… 카틀로우 공작인가…?”
“프뢸리히 공녀? 정신을 차린건가?”
“그, 그런… 거 같네. 아흑…”

복부와 등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꺼졌다. 손에는 검붉은 핏덩이가 묻어있었다. 입에선 쓴 맛이 나는 피가 묻어있었다. 아… 나 칼 맞았었지…

“프뢸리히 공녀? 괜찮은 건가?”
“괜찮네, 아아… 약간 복부에 통증이 있는 거… 아악!”

순간적으로 통증이 밀려왔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이 고통스러웠다.

그는 내 신음소리를 듣고는 날 안고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곧 병원이네. 조금만 참아줘…”

그는 불안해하며 목소리를 덜덜 떨었다. 그에게 고맙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하인을 시키지도 않고 자신이 직접 날 안고 뛰는 걸로 보아 그는 날 아직 사랑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안심되었다. 그의 품에 몸을 가둔 채,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이었다. 간호사들이 날 안고 뛰어 들어오는 그를 보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러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날 보자 깜짝 놀란 채, 병원 침대를 끌고 와 날 침대에 눕힌 채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개인 병실로 들어와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옷을 벗자 가슴 부분 바로 아래 등 부분에 큰 상처가 나있었다. 아직도 그 상처에선 피가 줄줄 흘렀고, 한 간호사는 지혈을 했고, 두 번째 간호사는 내 얼굴에 묻은 피와 빗물을 닦았고, 세 번째 간호사는 수술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혈을 어느정도 끝낸 뒤에 간호사들은 나에게 수술복을 입히고 침대에 눕힌 채,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실 앞 의자엔 카틀로우 공작이 다리를 떨며 앉아있었고 침대에 눕힌 채, 들어오는 나를 보고는 안심을 한듯 한숨을 쉬었다.

그가 날 이렇게까지 걱정한다는 것에 나 또한 안심이 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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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07-27 10:54 | 조회 : 408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