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은호 형"
"응, 설아 왜?"
"형은... "
막상 입을 떼니까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은호 형은 지루하거나 짜증나지도 않는지, 내가 말할 때까지 아무말 않고 기다려줬다.
그 모습에 더 말하기가 힘들어졌지만..
"은호 형."
"응"
"절 처음 봤던게 형은 언제에요?"
"...승호한테 얘기 들은 후라서 그런지 많이 복잡하지?"
"...네.."
은호 형은 안 그래도 좋은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설명을 해줬다.
"너 생각대로일거야.."
"네?"
"너 생각대로 어렸을 때, 이미 너를 알고 있었어."
"....."
"넌 승호 친구였잖아."
은호 형은 웃으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웃는 얼굴이었기에 웃으면서라고 했지만, 내가 봤을 때는 마지못해 웃는 모습이었다.
"설이 너는 기억안나겠지만, 승호가 성격이 옛날부터 그랬거든. 주변에 사람은 넘쳐나는데, 승호 자기자신은 딱히 옆에 누가 있는걸 좋아하던 성격이 아니었거든."
"아..."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애가 친구 생겼다면서 얘기를 하면서 들떠보였거든, 자기딴에는 뭐... 들뜬걸 표현 안하고 싶어하긴 했는데,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엄청 들떠보였어. 고작 한 살 밖에 많지 않은 내가 눈치 챌 정도면 뭐.."
"아...."
은호 형은 생각보다 동생에 대한 사랑이 깊어 보였다.
이때동안 백승호랑 같이 있었을 때에는 서로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백승호의 과거 얘기를 하면서는 정말로 행복하면서 씁쓸한 얼굴표정으로 얘기했다.
"아무튼 그래서, 너를 우리 집으로도 데려왔었어. 그러다가 점점 사람도 늘었지."
"그건 태겸이랑 도하랑 준이 말하는거에요?"
"....맞아. 너네 2명에서 3명이 추가 되서, 5명이서 맨날 손잡고 다니고 그랬거든."
"...."
"내가 아마 너를 처음 본게, 초등학교 2학년이겠다.."
"...형이요?"
"응.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고, 설이 너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설마설마 했는데, 은호 형도 처음만난게 아니었다.
원작에서는 은호 형은 그렇게 큰 비중이 없었는데 이렇게까지 원작이 뒤틀린 것 보면.. 사실 잘 모르겠다.
이제는 내가 있는 곳이 소설 속인지도 확신이 서질 않았다.
'확실한 해답은 하여운한테 있는건가..'
"설아."
"...네?"
"니가 사고가 난 후에 애들에 대한 기억도 잃고, 나를 봐도 그냥 지나가길래 처음에는 그냥 지켜만 봤거든?"
"...."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너 그때 뭔가 너같지 않아보였어."
"그게 무슨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에는 그냥 귀여운 동생이었는데, 다른 애들에 비해서 너무 약하고 더 조그만하니까 더 챙겨주고 싶었던게 컸었는데,"
은호 형은 아까보다 더 씁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형 괜찮아요?"
"응.. 나야 괜찮지. 너가 사고 난 후에 사람이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근데 보건실에서 만났을 때에는 뭔가 달랐어."
"그게 무슨.."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 사실 나도 그래.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
"분명히 똑같이 생겼고, 분명히 윤 설일텐데, 난 설이 너가 사고난 후에 만났을 때는 뭔가 이질감같은게 느껴졌어."
"이질감이요?"
"그래."
은호 형이 하는 말을 자세히는 못 알아듣겠지만, 내가 기억을 잃은 것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하여운? 걔가 갑자기 나타났어."
"....하여운이요?"
갑자기 은호 형이 하여운의 이름을 언급했다.
'순간적으로 들은 이름에 당황스럽긴 했지만, 은호 형도 하여운얘기를 꺼냈다는건...'
"하여운 걔가 갑자기 승호랑 애들 주변에서 보이기 시작했어."
"......."
"백승호가 언젠가 갑자기 어떤 애 한 명을 집에 데리고 왔었어. 조금 다친 것 같은 애더라."
"....언제쯤이었어요?"
"그 때가 아마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
"그래서 나도 조금 의아했어. 백승호가 웬만해서는 집에 누구 안 들이거든."
"아..."
"그런데 갑자기 데리고 와서는 상처를 치료하더라."
"누구 상처요?"
"하여운인가 걔 상처."
'은호 형이 말하는게 지금 백승호랑 하여운의 첫 만남인건가. 백승호는 기억을 못 했는데, 어떻게 은호 형은 기억을 하는거지...'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뭐가요?"
"하여운, 걔 백승호가 싫어하는 행동이랑 거슬려하는 행동 등을 너무 잘 알고 있더라. 처음 봤다고 했는데."
"......"
"더 이상했던 건 그거였어."
"......"
"백승호가 더 이상 널 생각 안하더라."
'날 생각 안한다는게 무슨 소리지..'
"그게 무슨 소리에요?"
"너에 대한 걸 조금씩 잊는다고 해야하나?"
"........네?"
"너랑 같이 찍은 사진들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했어. 심지어는 벽장 안에 넣어버리더라."
"..."
"그래서 나도 더 이상은 아는 척 안하는구나 싶었어."
은호 형의 말에 따르면 하여운을 만나고 나서부터 뭔가 이상했다는 소리인 것 같다.
아무래도 하여운은 나처럼 그냥 차원을 이동한게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가 찜찜하고 이상했다.
"..그것때문에 하여운잉 이상하다고 생각한거에요?"
"...아니, 그것만이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아까 말했듯이, 나는 널 정말 귀여운 동생이라고 생각했었어. 승호랑 애들이 널 보는 시선은 뭔가 다르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
"그런데,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 널 볼 때마다.."
"그게 무슨소리에요?"
"설이 너가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언제 오나 기다리게 되고, 나랑도 얘기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고, 설이 너가 안 좋은 일 있어서 울때마다 달래주고 싶었어..."
은호 형의 고백아닌 고백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쿵했다.
'나 진짜 왜이러냐고...'
"그랬는데, 어느 날 너가 사고가 났다더라. 부모님 따라서 바로 병실로 달려갔는데, 애들은 울고 있고, 엄마는 그걸 찍고 있고.."
"......"
"잘 들어보니까, 위험한 건 아니라길래,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어. 그런데 너가 자길 기억하지 못한다고 승호가 그러더라. 그렇게 계속 널 못 본채로, 고등학교에 입학했어. 근데 널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어. 마침 파티 한다더라. 난 기업같은 거 전혀 신경도 안쓰고 물려받을 생각도 없었어. 근데 너 얼굴 보려고 파티장에 그냥 갔었거든.."
"......"
"근데 파티장에서 마주친 너는 뭐라고 해야할지 너같지 않다고 해야하나,, 느낌이었지만, 웃기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설이 너가 아닌 것 같았어. 순간적으로 마음이 휑하더라."
은호 형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순 없지만, 아까 백승호랑 애들이 했던 얘기들이랑 비슷한 것 같았다.
"......그래서요?"
"파티장 갔다오고나서 더 머리가 아파졌어. 신경이 더 많이 쓰이더라."
"....."
"그런데 하여운 걔가 우리 인생에 나타나고 나서, 뭔가 너에 대한 기억이 점점 없어졌어. 그니까 한 마디로 누가 강제로 지운듯한 느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에요?"
"나도 뭐라고 딱 설명하긴 힘든 것 같아.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꺼든.."
"...."
"너가 우리 고등학교에 전학 온다는거 알았는데도 별로 아무느낌도 안들더라."
"......"
"사고를 많이 친다는 얘기를 들어도 딱히 아무상관도 없는 애라고만 생각했어."
은호 형의 말에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형은 앞에서 책상위에 올려져있는 내 손을 잡아줬다.
"놀라게 해서 미안. 그래도 알려줘야 할 것 같아."
"아니에요. 말해주세요."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평소처럼 다니다가 보건실에서 너를 마주쳤을 때, 익숙한 감정이 들었어. 그렇게 너를 볼 때마다 너에 관한 기억들이랑 감정들이 맞춰져갔어. 마치 퍼즐 맞추는 것 처럼. 비어있던 부분에 너에 대한 기억들이 채워지고 있었어."
"....."
"안 믿기지.. 괜찮아. 그냥 필요할 것 같아서 얘기한거야."
"아니에요.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그만 떨어.. 괜찮아?"
'은호 형이 해준 얘기가 그렇게 무서운 얘기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손이 벌벌 떨리는 느낌이지.... 왜 이런거지...'
은호 형은 떨리는 손을 진정하라듯이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형.. 근데 오늘 완전히 고백한거 아니에요?"
나는 웃으면서 형에게 얘기했다.
형은 똑같이 웃어주면서 얘기해줬다.
"..고백은 아니야. 이렇게 이상하게 고백하는게 어딨어. 그냥 알아달라고. 생각보다 오래 좋아했다고."
"중간엔 잊어버렸으면서.."
"너도 나 잊었으니까, 쌤쌤이 해줘. 그리고 초반에는 나만 좋아했단 말이야."
"...지금도 형만 좋아할 수도 있는데요?"
"그런가~ 조금 더 힘내야겠네. "
은호 형은 내가 한 말에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정말 산뜻한 사람인 것 같아.'
"와 벌써 9시 다 되가네.... 우리 얘기 엄청 오래 했다."
"그러게요."
"그나저나 설이도 나한테 궁금한거 있었잖아. 물어봐."
"......."
'형은 제가 윤 설이 아니어도 좋아해주실거에요? 제가 윤 설이 아니더라도 다정하게 웃어줄거에요? 미워하지 않을건가요?'
내가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많았지만, 나는 그 질문들을 미루기로 했다.
내 이기심일수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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