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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욕실이 아니었다.
언제 옮겨진 건지 처음 보는 방, 침대 위였다.
옆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수현이 누워있었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허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부드러운 이불에 쓸릴 때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따가웠다, 몸은 얼마나 깨문 건지 피멍이 들었다.
목에서 피맛이 났다.
수진은 입만 몇 번 뻐끔거리다 포기했다.

"목 말라?"

언제 일어난 건지 수현이 눈을 천천히 뜨며 물었다.

수진은 대답 대신 눈을 깜빡였다.

수현은 금세 미지근한 물을 가져왔다. 일어날 힘이 없는 수진을 일으켜 앉히려 했지만 수진은 이불이 쓸리면 아파했고 결국 누운 상태로 물을 마셨다. 물의 반은 이불로 흘렀다.

물이 들어가자 갈라진 목소리로 수진이 말했다.

"이불. 따가워."

수현은 최대한 이불이 몸에 쓸리지 않게 치워냈다.
여과 없이 몸이 드러났지만 수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온몸이 쑤시다.

이불이 사라지자 찬기운에 몸이 떨렸다.

"추워..."
"보일러 올릴게."

한여름이었지만 히터를 틀었다.

점심이 지나가 쓸려도 몸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근육통이 남아있었다. 비틀거리며 옷을 입은 수진은 눅눅한 침대 대신 마루에 있는 소파에 누웠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입에서 알는 소리가 났다.

한동안 보이질 않았다고 생각한 수현이 부엌에서 쟁반을 들고 나왔다.
쟁반 위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이 올려져 있었다.

"먹어."

숟가락을 쥐여준 수현은 앞치마를 대충 접어 반대쪽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건지 죽은 파는 것만큼 맛있었다.

"괜찮아?"
"맛있어."

수현이 피식 웃었다.

"몸 말이야."

수진은 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좋았다.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사실 아직도 감각이 살아있는 듯했다. 수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수현을 힐끗 쳐다보자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환멸나지 않아?"

부끄럼이란 감정은 전혀 담기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왜 아직도 내 옆에 있어?"
".. 무슨 의미야."
"네가 그토록 존경하던 형이 네 밑에서 다리나 벌리고 헐떡이는데 창피하지 않아?"

수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괜히 미안해서 옆에 있지 말고 갈 거면 빨리・・・"
"어떤 새끼가 그래?"
"보편적인 생각을 얘기하는 거야."

수진은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살기를 처음 느끼는 건 아니었다. 계약을 하기 위해선 서로를 망설이지 않고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도 가야한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수진을 위협하지 않았다. 주먹보다는 직급이었고, 직급보다는 돈이었다.
돈을 손에 쥐고 있는 수진에게 거스를 자는 한 번도 없었다.
수진은 처음으로 아무 보호장치도 걸리지 않은 살기를 느꼈다.

수진은 태연하게 죽을 떠 잎으로 옮겼다. 기계적인 동작이다.

"그렇게 생각 안 해."
"왜?"
"그야."

수현은 말을 잊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관계는 오늘까지야. 여기서 나가. 그리곤 다신 돌아오지 마. 돈이 필요하면 말해."

수현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조금 가까운 상대지만 원나잇 상대에게 뭘 바라는 건지,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있다.

수진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죽은 처음 쟁반에 들려왔을 때와 얼마 다르지 않았다.

"네가 있으면 내 자리가 위험해. 정말 날 생각한다면 예전처럼 아무 말 없이 떠나."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현이 팔목을 잡아 당겼다.
너무나 약한 힘이어서 수진이라도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 정도였다.

"... 이것만 다 먹어."

어제와는 나르게 손끝이 차갑다.

순간 어릴 적 수현이 눈앞에 겹쳐 보인다.

"하..."

수현을 떨쳐내지 못하는 자신이 미련하게만 느껴졌다.

수진은 수현의 손을 밀어냈다.

덩그러니 남겨진 수현은 가만히 식어가는 죽을 바라봤다.
수현은 눈을 질끈 감고 마른 세수를 했다.

"먹자며."

수현이 손짓을 했다.

어리둥절한 수현이 부엌으로 향하다 식탁 위에 반찬이 올려져 있었다.

"목 막히게 죽만 먹으면 얼마 안 들어가."

계란과 김치, 콩나물이 식탁에 올라오자 그럴싸해 보이는 식탁이 완성돼 있었다.

"앉아."

수진이 쟁반 위에 있던 죽을 가져와 식탁 위에 올렸다.

대각선으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 없이 다시 수저를 들었다.

수진은 유치하지만 만약 둘이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했다.

친형제는 아니어도 둘은 꽤 잘 지냈을 거다.
가끔 먹을 거로 싸우기도 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나, 평범한 대인관계로 힘들어하며 술을 마시며 서로를 위로했을지도 모른다.

숟가락을 다 놨을 때는 이미 접시는 깨끗이 비어있었다.

수진은 수현을 쳐다보지 않았다. 수현은 식탁에서 일어났고, 잠시 사라지더니 금세 옷을 갈아입고 나타났다.

"잘 있어."
"..."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수진은 정말 혼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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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4-11 22:52 | 조회 : 1,797 목록
작가의 말
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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