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장 (1)

지난이 오자마자, 상황은 갑작스레 종말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크헉-!"

무언가가 몸에 강하게 박히면서 튕겨 나간다. 하지만 그 고통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자는 미소는커녕, 오히려 얼굴에 한가득 분노를 띄운 채로 그에게로 걸어간다.

"당장 일어나라. 너는 그 정도로는 죽지 않잖아...?"

조금씩 목소리가 떨리면서 평소의 차분한 지난과는 다른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모험가 길드>에서 봐왔던 모습과는 아주 많이 달랐던 모습인지라, 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겁을 먹고 만다.

곧이어 가운데 턱에 한 방, 그리고 오른쪽 관자놀이에 두 방. 거기에 더 추가되는 다리 관절 부분에 꽂히는 발차기. 모두가 급소 부분이었다.

(즉, 이 녀석은 정말로 나를 죽이려는-)

암살 부문장이 생각할 틈도 없이, 또다시 지난의 주먹이 그의 턱을 겨누어 휘둘렀다.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 엄청난 스피드를 지녔기에 피하지 못한다. 정신을 차려 공격하려고 해도 그동안 소비된 에너지가 너무나도 많았다.

(왜, 하필.... 이런 중요한 때에 오는 거냐!)

"-<창격>."

점점 그가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 들어감과 동시에, 몸에 쌓인 부상이 점차 심해진다. 그 순간, 들어오는 지난의 찌르기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신체의 한가운데에 큰 구멍이 나버린다.

"커헉-!"

아무리 봐도, 치명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상처.

지난은 그의 몸에 손이 들어간 것에 불쾌함을 느꼈는지 재빨리 그의 손을 뒤로 빼낸다. 광장에 있었을 때만 하더라도 하얀색이었던 그의 장갑이 몇 차례의 격전을 거치고 난 후에는 많은 이들의 선혈이 묻은 검붉은 색으로 염색되어 버렸다.

"후우, 이제 이 장갑은 더는 못 쓰겠군. 네 녀석의 피로 더러워졌으니."

툭, 하고 지난은 손에 있는 장갑을 벗어 땅바닥으로 떨어트린다. 마치 필요 없는 무언가를 제거하는 듯한 행동이 암살 부문장의 위치가 반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응? 뭘 보는 거냐. 설마 무기가 없다고 이 떨어져 있는 장갑을 주워서 무기로 쓴다던가 그런 식의 농담을 한다는 건 아니겠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있던 자리는 강자로서 적을 먹는 쪽이었을 텐데, 이제는 그가 약자의 입장이 되어 먹혀버리는 쪽이 되어버린다. 강자가 약자를 조종할 수 있다는, 아주 자연스러운 생태계의 법칙.

부상을 입고 헐떡대는 암살 부문장의 모습을, 지난은 위에서부터 분노에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절대로 이길 수가 없는 좌절감과 무기가 지난에 의해 모두 파괴되어 활발히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크윽.... 이러면 완벽히 내가 조금 전 저년의 처지가 되어버린 거잖냐...!)

지난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위기가 닥쳐왔다.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저 목표를 인질로 쓰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거리가 떨어져 있고.... 아니, 우선 제일 급한 건 무기의 조달이다. 주위에 쓸만한 무기가 있는지를 찾아봐야 한다.)

그가 가진 와이어와 단검은 지난에게 저항할 때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깨지기 쉬운 포션 또한 전부 그의 품속에서 깨져버려 회복도 불가능한 상태.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주위를 살펴본다.

(잠깐! 그러고 보니 분명 저 남자의 손에는 독이 묻어있는 단검이 있었잖아! 저걸 가져와서 이 녀석을 찌른다면 충분히 승산이-)


-콰아아앙!


굉음이, 한 차례 일어났다. 그것도 자신의 바로 옆에서.

마치 지진 소리와도 같았던 그 소음은 그의 귀를 스쳐 지나가 발이 바닥에 꽂히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 사신을 이긴 괴물 같은 길드 마스터라면 똑같은 동작이라도 더 강력하겠지.

그러나 이 정도의 근거리에서 지난의 공격이 빗나갈 리는 없었다. 일부로 그에게 공격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렇다면 무언가 목적이 있다는 것은 자명.

"...내가 너를 아직 살려두고 있는 이유는 딱 2가지다. 첫째로, 아직 흑월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는 점. 여기에 대해서는 광장에서 잡혀버린 검은 녀석하고 몇몇 흑월의 부하에게서 들을 수도 있으나, 네가 그곳의 지배자급이니 직접 들을 필요가 있어서다."
"...뭐,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지. 따로 묻지도 않았고. 그러면, 두 번째는 뭐냐."

하나는 암살 부문장으로서도 예측했었고, 이해 가능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한 가지는, 과연 뭐란 말인가.

"그리고 둘째는 바로, 여기에 있는 이니가 살아있다는 점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죽어있었다면, 나는 임무고 뭐고 내팽개치고 바로 네 녀석부터 없앴겠지."
"아아, 저 목표가 살아있길래 내가 살아있다는 말이냐. 이거, 무슨 공동운명체도 아니고. 아무래도 너보다는 내가 저 여자와 더 운명적인가 보다."

무언가 틈이 있을까 끊임없이 지난을 도발한다. 그가 자신을 죽일 수 없는 이유를 드러낸 이상, 이 이상 자신의 목숨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것보다, 지금은 빨리 구멍난 상처를 어떻게 해서라도 복구해야 한다. 저 녀석은 죽지 않을 정도로 조절을 했다지만, 다른 부문장들이었다면 바로 즉사했을지도 모르는 일격이라고....)

조금씩 몸을 틀 때마다 고통이 물 밀려오듯 온몸에 퍼진다. 포션도 응급처치할 도구도 없는 지금에서는 흐르는 시간만이 점차 그의 고통을 덜어주겠지.

"그것보다 이제 내 위에서 내려와 주시지. 다리 하나로 내 몸을 완전히 막고 있어서 숨을 쉬기조차 어렵거든? 거기에 폐로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워. 이러다가는 나, 죽어버린다고."
"....."
"이봐, 조금 전에 네 녀석이 정보를 얻기 위해 취조를 해야 한다고 했잖아. 나로서도 이렇게 허망하게 죽고 싶지는 않다고. 그게 아니면 아까의 말은 전부 거짓인가?"

그렇게 살짝 도발해보자, 지난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다리를 올려 제자리로 돌린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제압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뭐,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양손을 들어라. 우선 너를 구속하도록 하지. 무기는.... 전부 파괴된 것 같군."

지난의 명령에 우선 순순히 따르도록 한다. 아직은 저항할 능력이 남아 있지 않다.

가끔 그가 밧줄로 묶은 곳이 그가 입은 상처 부위를 민감하게 건드려서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이 자의 성격으로 보아 그런 것은 1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지금껏 암살 부문장이 해온 악행들을 일일이 따지면서 괴롭힐 가능성이 더 크겠지.

"저항하지 마라. 움직이지 마. 머지않아 너는 네 녀석의 부하들과 함께 심판대로 갈 거다. 그러나 잘해봐야 종신형, 조사에 따라서는 사형될 거다. 그리고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그곳의 경호는 내가 할 생각일 테니까."
"하아, 이미 그 말을 들은 벌써 힘이 빠지기 시작했군."

그의 말대로 여기서 투항한 그를 잡아가서 형벌을 주는 것까지는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질 테다. 그러니까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이 1순위. 가능하다면 안전지대까지 대피하는 것이 2순위였다.

(가능하다면, 이 녀석을 죽여버리고 말이지.)

"저, 저기...! 기, 길드 마스터...!"

암살 부문장의 포박을 완료한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의 여성이 다가오는 것을 지난은 감지했다.

이 사태에 말려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광장에서 보였던 순백의 드레스는 이미 뒷거리 특유의 새까만 먼지와 핏자국이 듬뿍 첨가되어 있었다. 거기에 몇 차례의 심한 부상을 입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쪽으로 다가오지 마라, 이니!"
"그, 그렇지만...."

그러나 직후, 갑자기 지난이 큰소리를 내자 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춘다. 지금의 그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이니,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나도 알아.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야. 내 앞에는 이 뒷거리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의 위험한 범죄자가 있다. 한시라도 눈을 뗀다면, 이 녀석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지금의 그녀를 보는 지난의 눈빛은 놀랍도록 차갑고 냉정했다. 평소 <모험가 길드>에서 일하고 있을 때의 눈빛과 비슷한 면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달랐다.

(분명 매일 보던 평범하게 소탈한 길드 마스터의 얼굴이야. 그리고 지금 내리는 지시에도 이상한 점이나 어색한 부분도 없어. 그런데 왜....)

"미안하지만, 이니. 조금 멀리 떨어져서 잠깐만 다른 곳을 보고 있어 주지 않을래? 이미 이 주위에는 다른 자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길드 마스터...."

평소와는 사뭇 다른 무언가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그녀의 관찰 능력으로도 확인하기 힘든, 무언가가.

계속해서 그를 보면, 무슨 일인지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은 길드 마스터가 위태로운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도대체 그동안 길드 마스터께서 무슨 일을 겪으셨길래....)

이니로서는 알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용사의 보호라는 목적으로 한동안 왕궁에 있었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난의 고뇌와 분노가 보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그의 심정을 자세히 알고 있을 사람은 여기서 단 한 사람.


"흐음, 범죄자에 대한 증오심인가...."
"...!"


똑같이 흑월에 대한 피해로 고뇌와 분노가 가득 찬 암살 부문장뿐이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지? 네가 범죄자를 혐오하는 것처럼 나 또한 모험가들과 기사들을 혐오하는 것뿐이야. 당연한 이치라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너희들이 우리를 좋아할 리가 없겠지. 어떻게 들어봐도 흉악한 범죄자의 변명이다."
"흠?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길드 마스터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건가."

암살 부문장은 구속된 상태에서 고개를 떨궈 땅을 한번 쳐다보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얼굴을 위로 올린다. 아까의 약한 모습과는 대조되는, 무언가 약점을 잡아 틈을 찾았다는 기분 나쁜 모습이었다.

"거기, 아가씨. 이 녀석이 이끄는 <모험가 길드>는 완전하지 않다.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실리적이며, 누군가를 버리는 데에 망설임이 없지. 우리와 별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어이, 네 녀석! 조용히 입 닥치고 있어!"
"이미 많은 모험가가 던전이나 이 부근의 위험한 숲.... 통칭 그레이트 포레스트에서 배신과 음모로 인해 버려져 쓸쓸히 죽어 나갔지. 그곳에서 일했던 적이 있던 너도 짐작 가는 것이 있지 않은가?"

이니는 지난의 뒤에서 그의 말을 듣고는 며칠 전에 안내원이었을 적에 올렸던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린다.
분명 암살 부문장의 말대로 매년 모험가들이 행방불명되는 일이 많아졌다는 정보를 들어본 것도 사실.

"이니, 이 녀석의 말에 현혹되지 마라! 극악의 범죄자인 만큼, 언제든 우리들의 틈을 엿보고 있을 거라고!"
"역시 내부의 문제를 드러내려고 하니까 급하게 입막음을 하는 건가. 어찌 보면 순수하기까지 한 그녀의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군. 역시 너희들도 우리와 다를 게 없는 녀석들이다."
"이 녀석이-!"

지난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허공으로 올렸다가 문득 떠올랐다. 밑에서 그를 보고 있는 범죄자의 시선이 향한 곳이 자신 쪽이 아닌, 그보다도 더 뒤쪽이라는 것을. 그의 뒤에 있는 여성이 이 상황을 보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다면 이 자가 계속해서 입을 놀리는 것을 지금의 지난으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미 전투 의지가 상실된 그를 때렸다가는 법에 접촉될 수도 있는 문제니 폭력으로 입을 막을 수도 없다.

"아아, 이런. 아직 구속 상태에 있는 용의자를 때리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군. 이러다가 한 대 치기라도 하겠어. 나를 고문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래서 저년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여기서 떠나라고 한 게 아니냐?"
"...큭!"

미처 그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행동을 적에 의해 들켜버린다. 이니가 그가 말한 현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암살 부문장이 계속해서 그녀를 자극하는 듯한 행동을 한다면 어쩔 수 없이 폭력에 따른 정보 수집은 여기서는 불가능하게 되어버린다.

(...완전히 말려들었군. 이런 녀석한테...!)

단 몇 마디의 말로 페이스가 완전히 저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물론, 이 상황을 타개할 정도의 위협적인 발언은 아니나, 흑월의 엄청난 정보력을 토대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몰아붙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잠시 비켜주실 수 있나요, 길드 마스터?"
"...이니?"

그때, 갑자기 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무언가를 굳게 다짐한 듯한, 그녀의 힘 있는 목소리가. 그러면서 점차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랑 조금 대화를 할 필요가 있어 보여서요. 잠시 몇 마디 대화를 나눠봐도 될까요?"
"이니, 조금 전까지 말했듯이 이 녀석은 위험한 녀석이야! 혹시라도 가까이 가다가 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스터께서 말려주실 거잖아요? 왜냐하면, 그만큼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계시니까. 저는 믿어요."

그녀의 자신감 있는 말투에 지난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지금 그녀에게는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의문의 투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용사로서 강화된 투기일까?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암살 부문장은 살짝 미소 짓는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정도의 아주 미세한 차이.

"드디어 내 말을 들을 용기가 생긴 건가. 이니."
"계속해서 저를 불러내는 듯한 표정과 말투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전 직업이 안내원인 만큼 커뮤니케이션과 분위기 정도는 잘 파악할 수 있거든요."
"그렇군. 정보에 따르면 너는 그중에서도 꽤 수준 높은 녀석이었으니까 말이야."

혹시라도 무슨 짓을 벌이지 않을까. 내심 노심초사하면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지난.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그를 뒤로하며 서로 간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 흑월과 같이 손을 잡아보지 않겠나?"
"뭐?! 지금 네 녀석,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격분하여 잠시 감정이 차오른 지난을, 이니는 한 손을 그의 앞으로 내밀며 진정시킨다. 여기서는 자신의 영역이라는 뜻.

"그래서, 저에게 주어지는 이득이 뭐가 있죠?"
"이득? 굳이 그런 것이 필요한가?"
"당연히. 지금 당신의 꼴을 살펴보세요. 길드 마스터에 당해 온몸은 만신창이. 게다가 이제 곧 체포될 운명인데도 제가 따라갈 이유는 없을 텐데요. 거기다가 이득도 없다면, 들을 필요도 없는 제안이죠."
"그렇다면 내가 그 너에게 그 '이득'이라는 것을 주면 이쪽으로 넘어온다는 얘기인가?"
"그럴 수도 있죠. 이 불리한 상황을 역전할 수 있다면야."

자신을 앞에 두고도 점점 진행되는 이야기에 이니의 진의를 알 수 없어 불안해한다. 사무적인 태도의 그녀 앞에서는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더욱 그렇다.

(도대체 목적이 뭐야, 이니...?)

"어찌 보면 말이 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면 정반대의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여러모로 밀당이 뛰어나시군. 내가 이 사태를 뒤집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나의 제안에 귀를 기울인 거지?"
"그게 그렇게 들린다면 거기까지가 당신의 한계라는 거겠죠."
"말 한번 잘하네. 그래서? 내가 신호를 주기는 했지만, 그 기회를 직접 손으로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너다.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지?"
"네, 조금 전의 말입니다만.... 저는 믿지 않습니다."

그 말에, 꿈틀거리며 암살 부문장의 어깨가 살짝 위로 움직인다. 혹시나 해 언제라도 그녀를 보호할 수 있게끔 지난의 손이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 전의 말이라면.... 그건가? <모험가 길드>의 치명적인 결함."
"분명 그런 이름은 아니었지만, 생각하고 있는 그게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을 믿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결함이 있으니까요."
"내가 얻은 자료의 신빙성은 그렇다 치고, 아까의 반응을 보건데 너도 그 자료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그녀의 표정을 읽어 진실과 거짓을 가려낸 것인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응수하는 암살 부문장. 지금이라도 이런 녀석을 잡았다는 것이 안심될 만큼 그가 가진 경험은 사람의 마음을 악독하게 짓눌러 버릴 수 있었다.

"그쪽 정보의 신뢰성은 차차 하고, 제가 가진 보고서의 정보는 이것뿐이었습니다. 매년 행방불명되는 모험가의 수가 많아졌다. 그 어디에도 모험가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어요."
"안 봐도 뻔하지. 아까도 말했을 텐데. 모험가라는 녀석들의 특징을."
"...계속해서 말을 들어봤을 때, 당신은 그저 그들에 대한 악감정을 토대로 내용을 전개할 뿐입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거죠."
"...너도 저런 녀석과 동급의 뇌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거냐."

빠드득, 이빨이 갈려 나갈 정도로 거센소리가 조용한 뒷거리에 울려 퍼진다. 연기라고 볼 수가 없는, 아마도 진심으로 분노한 것이다.
이 틈을 노려, 지난은 재빨리 그 둘 사이에 끼어들어 거리를 벌려놓는다. 이 이상으로 시간을 허락하다가는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을 직감했다.

"됐어, 이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다음부터는 나의 일이다."
"예. 저도 그와의 대화는 끝났어요.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길드 마스터."

만약 그녀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집을 부렸다면, 억지로라도 서로의 대화를 차단할 생각이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범죄자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자발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저도 저희 <모험가 길드>가 모욕당하는 것은 기분이 나쁘니까요."

작게 읊조린 그녀의 목소리를 지난은 듣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도 이니가 자신을 대신해 변호해주었다는 느낌이 들어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군. 무력으로는 저 녀석이, 두뇌는 그쪽인가."


그때, 그녀의 뒤에서 불어오는 약한 바람.

이니의 입장에서는 적당히 시원하기까지 한 산들바람이었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여러 물품, 특히나 한 명의 사람이 거세게 밀려나는 것을 보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길드 마스ㅌ-!"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부르려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로막는다. 연륜에 따라 어느 정도 주름져있는 중년의 손.

아니, 그것보다도 저 길드 마스터가 저렇게까지 무력하게 날아가는 모습은 최근 내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전까지는 그의 강함을 모르고 있었기에 눈치채지 못했다지만, 경계 태세를 갖춘 그가 저 정도로 날아가는 모습은 그녀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 해답은 바로 내가 지금 끼고 있는 반지에 있지. 마법을 강화해주는 마도구다."

뒤에서 자신의 존재를 그녀에게 각인시킨 암살 부문장은 손으로 막고 있던 이니의 입을 곧바로 풀어주었다. 조금 전의 거래를 다시 제안하기 위해서.

"알겠지? 네 말대로 지금 상황을 역전시켰다. 너는 나의 인질. 하지만 나와 손을 잡는다면 정당한 거래 상대로서 서로 이득을 볼 수 있겠지. 이 정도의 고급 마도구를 손에 넣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라고."
"...제가 그런 것에 넘어갈 것 같나요."
"아니, 너는 충분히 넘어와. 너는 네가 생각한 만큼 정의로운 자가 아니거든. 아까까지는 주변에 그 녀석이 있었지만, 이제는 없어. 무슨 말인지 아나?"

-이렇게 해도 된다는 뜻이지.

콰직, 그녀의 신체 중 일부에서 나는 소리다. 무기가 없는 맨손으로도 독기와 악의를 지닌 암살 부문장은 충분히 그녀를 죽일 수가 있었다.

"아, 아...."
"인간은 자신의 본능을 한순간에 속일 수 없어.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씩 하나씩 부러트릴 뿐이다. 그 성가신 길드 마스터도 이미 강화된 <풍압>으로 저 멀리까지 튕겨 나갔으니 곧바로 오지는 못할 테니까. 희망은 기대하지 마시지."

서서히 그녀에게 공포심과 좌절감을 심어준다. 조금 전, 자신을 속이며 그와 정당하게 대화를 했던 용사 후보의 용맹한 모습은 이제 없다. 절대적인 강자 앞에서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이미 그녀가 버팀목으로 삼고 있는 지난이라는 자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여 한 줌의 희망조차 무의미하도록 만들어버린다. 다만, 그 괴물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니 조금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자, 그러면 다음-"

천천히 다음의 발언을 얻기 위해 신속히 손을 뻗는다. 조금만 더 압력을 가하면 알아서 꺾여버릴 것만 같은 그녀를 향해.


"이봐요. 아름다운 여성을 그렇게 괴롭히면 안 되죠."
"...누구냐."


아무도 없을 법한 뒷골목에 그의 위에서 낯선 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지금의 그를 제지하는 듯한 내용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말하고 있었다.

다만, 이 목소리는 남성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목소리는 마법으로 속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길드 마스터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설마 아직도 적이 숨어있었을 줄이야.

(쳇, 거의 다 됐었는데.)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 지금은 조그만 방해라도 큰 여파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시기였다. 어쩔 수 없이 모두 대응해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기습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는 것 자체가 전투력의 유무를 판가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실력에 여유가 있어 말을 걸었거나, 그게 아니면 실력에 자신이 없어 일부로 말을 꺼내는 걸지도 모른다.

"흐음, 그 눈초리는 아직도 포기를 못 한 모양이네요. 따로 정보를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지난이 몰렸다는 것도 이해가 되기는 해요."
"지난이라고? 그 길드 마스터를 이름으로 부르는 거냐?"

적어도 이니가 그를 길드 마스터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그는 친밀한 사이에서도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를 이름으로 부를 정도의 사이라는 말은-

"-그 녀석과 동급, 최소 바로 아래까지의 권력이나 힘을 가졌다는 말인가.... 그 정도의 녀석이라면 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그래?"

마치 경비 부문장과 같은 단순한 도발 방식이었지만, 지금껏 무리해온 것이나 아까 전의 <풍압> 마법 등, 이미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상태였다. 지금도 간신히 서 있는 상태로 버티고 있다.

포션을 먹어 어느 정도 치유하기는 했지만, 그건 응급처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이미 소모된 에너지나 신체를 뚫어버릴 정도의 상처는 어떻게든 할 수가 없다. 거기에 피로도 이미 많이 쌓여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인데...!)

"아, 혹시 제 모습을 보고 싶으신 건가요? 본래는 안 됩니다만.... 당신 덕분에 저희의 주인께서 아주 격노하신 탓에,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저도 성이 풀리지 않네요. 부디 그 도발에 어울려드리겠습니다."
"...그것 참 고맙네."

암살 부문장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상대도 놀라웠지만, 그 또한 어느 누가 상대라도 절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로 다짐한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해도 수많은 역경과 방해가 있었는데, 그걸 이렇게 허망하게 끝내지는 않겠다는 집념만이 그를 버티도록 도와주고 있었으니까.

(무엇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죽여주지!)

하지만 그때까지의 그는 몰랐다.
지금의 그가 상대해야 하는 자는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분노한 천사라는 것을.

펄럭거리는 거대한 날개와 머리 위의 고리,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긴 창.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자애깊은 미소와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절대로 이길 수가 없는 상대라는 것을.


"처음 뵙겠습니다, 암살 부문장 씨. 제 이름은 세라 피아. 종족은 천사입니다."


곧 있을 싸움을 앞두고서 그녀, 세라 피아가 말했다.
직접적으로 나설 수 없는 주인의 명령을 받고, 기쁜 듯이 웃음을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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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4-04 18:36 | 조회 : 705 목록
작가의 말
The ZXC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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