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일 (1)

<전이> 스크롤에 새겨진 마법이 찢어지자, 목덜미를 잡힌 이니는 어딘가로 강제 이송당하게 되었다. 그녀의 곁에는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등을 돌려 서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분명히 이 나라의 왕을 노리는 줄 알았는데 갑작스레 옆에 있던 그녀를 데리고 이곳으로 이동해왔으니까 말이다. 한순간에 이동한 것이 마치 꿈만 같았다.

(아니, 아니지! 이건 꿈이 아니야! 현실이라고!)

잠시 가만히 있었지만, 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운 돌바닥에서부터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지독히 깨닫게 해준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를 입은 것에 잠시 의심해 볼 여지가 있었지만, 차가운 감촉이 그녀를 다시 현실로 돌려보냈다.

뒤의 그녀가 그러든지 말든지 중년의 남성은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고는 입고 있던 윗옷까지도 벗어 자신의 상처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얼핏 뒤에서 봐도 선명히 새겨진 등 근육과 상처들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저 정도의 힘이라면 등급은 분명....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재빨리 도망가야지! 그,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주위를 둘러봐도 이곳은 아까 전과 같은 광장이 아니었다. 그 떠들썩한 소리도 들리지 않고 말이다. 아무리 봐도 한적하고 조용한, 나쁘게 말하면 음산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뒷골목이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소용없다. 네가 어떻게 도망간다고 하더라도 그 광장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해. 이곳은 그곳과는 한참 떨어져 있는 지역이니까 말이야."

혹여나 빠져나갈 곳이 있을까 격하게 고개를 돌리자 뒤에서 낮고 음산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면 다시 옷을 차려입은 암살 부문장이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단검을 든 채로 말이다.

어두운 초승달 무늬가 단검의 손잡이에 새겨진 것이 약간이지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가 길드에 있었을 때도 몇 번 본 적이 있던 무늬였다.

"서, 설마 당신은-"
"그래, 분명 전에는 <모험가 길드>의 접수원이라고 했었나. 그렇다면 너도 알겠지. 이 문양이 뜻하는 것을. 우리 흑월(黑月)에 대한 것을 말이야."

그녀 또한 이쪽에 어느 정도 몸을 담그고 있는 이상, 그 조직에 대한 정보는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설마 이번 사건을 일으킨 조직이 흑월이었다니.

"그렇다면.... 혹시 저번에 나를 노린 암살자도 흑월 소속이라는 말인 건가요!"
"그래, 웬만한 자들이라도 이틀은 넘기지 않는데 내가 죽인 녀석 중 네가 가장 많이 버틴 녀석이다. 뭐, 그것도 왕가의 보호 덕분이다고는 해도, 저승에서 자랑해도 좋을 정도라고."
"제가 그리 쉽게 죽을 것 같나요! 당장 원래의 장소로 되돌려 주세요!"

그녀의 말에 암살 부문장은 당연히 안된다는 것처럼 불쾌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서 가지고 있던 단검은 품속으로 넣고 망토 속에서 포션을 꺼내더니 단숨에 들이키기 시작한다.

바닥에 앉아 소탈하게 쓴맛만 나는 액체를 마시는 모습을 보니, 그 또한 중년의 남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방심하지는 않는다.

저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 등을 돌려 뒤쪽으로 도망가고 싶지만, 아직 긴장과 불안 때문인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차가운 돌바닥에 앉아 쳐다보는 그의 일상적인 모습이 참으로 무서웠다. 뭔가 어디에서도 볼 수 있을 소시민이 살인자였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랄까.

"그래, 당연하지. 용사의 힘을 받았다고는 해도 아직은 애송이. 아무것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여기에서 죽음을 기다릴 뿐이야."

지금 살아있는 시간을 즐겨두라고, 그 한 마디만 남기고서는 암살 부문장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마치 지금 당장은 그녀에게 해를 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중년에 불과한 모습이다. 이때 도망간다고 해도 금방 다시 잡힐 뿐이겠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혹시나 대항할 수 있는 물건이 있을까 했지만 초라한 뒷골목에는 먼지가 잔뜩 쌓인 건물들밖에 보이지 않았고 나무판자 몇 개와 더러워 보이는 물건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소중한 <전이> 마법을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장소로 옮겨놓았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가 아까 들고 있던 무기가 이곳에 있는 유일한 무기일까. 하지만 저 남자의 품에서 단검을 꺼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그가 자신의 망토를 열어 보이는 행동을 하고 있더라도,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우선 다행인 것은 지금 나를 죽일 것 같지는 않아. 그렇지만 만약 내가 잘못해서 저 사람을 건드릴 경우, 마음을 바꿔 나를 죽일 수도 있어.)

언제까지나 감정적으로만 행동해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성적으로 재빨리 마음을 차분하게 바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사태를 해결 가능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보다 못해.... 마법이라도 쓸 수 있다면...."

만약 <전언> 마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면 길드 마스터한테 연락을 취하는 것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긴 해도 이만한 계획을 세운 자라고 하면 그에 대한 대책도 해놓았을지도 모르긴 해도 시도할 만한 가치는 있었을 터.

몇 번을 더 생각해봐도 가능성이 모두 희박했다. 도움도 싸움도 할 수가 없다. 모든 수단이 막혀버렸다. 계획된 범행 속에서 현장의 환경을 이용할 뿐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


-분하다. 힘이 약한 것이 이렇게나 큰 죄라는 말인가.


단지 용사의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이렇게 자신이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아니, 차라리 저항할 힘이라도 있었으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니는 너무나도 분했다.

(저렇게 가만히 있어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기껏 용사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아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런 나 자신이 한심해서 눈물이 그녀의 눈에 맺히기 시작한다.

"...곧 다가올 운명을 느끼고 질질 짜기 시작한 건가. 포기해라. 내가 몇십 년을 살아온 결과, 이 세계에서는 강한 자가 정의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게 전부일 뿐이야. 그리고 약한 너는 죽을 뿐이지."

암살 부문장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조롱한다. 평소에는 그런 말 한마디도 던지지 않을 그였지만, 그때 이후에 계속 받아온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순한 화풀이다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통했다. 그리고 더 그녀를 처참히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런 기분이 든 것은 이쪽 세계에 몸을 담근 이후에도 거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왠지 기묘한 현상이었다.

왠지 더한 고통을 주기 위해 현실을 알려주도록 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다면 그녀의 절망적인 표정을 더 볼 수 있을까 생각하는 암살 부문장.

"뭐, 마지막으로 네가 인생의 마지막에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는 것이 좋으니 말해주도록 할까. 애초부터 우리의 계획은 저 왕이 아니었다. 바로 너였지. 깊게 생각해보면 당연히 답이 나오지 않나? 우리가 저자를 노릴 이유가 뭐가 있다고?"

흑월이 무력으로 나라를 차지해봤자 이득은커녕 손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왕만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곧장 약이 오른 기사 단장한테 목이 따이는 미래밖에 생각되지 않고 말이다. 그럴 바에는 무시하는 편이 좋다.

"그 반면에 너한테 신생 용사라는 것은 아직 칭호일 뿐, 대중들에게 완전히 공개된 자는 아니었지. 죽여봤자 이 나라 시민들의 반발도 적을 테고. 그들에게 있어서 이번 사건은 그냥 우리 흑월의 테러일 뿐이지, 너는 안중에도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리 거창한 방법을 써서 저를 죽이려는 거죠? 이 정도로 크게 판을 키울 바에는 왕궁에서 몰래 다시 죽이는 것이 더 안전할 텐데 말이에요."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눈앞의 망토의 남성을 노려보면서 이니가 질문한다. 그녀의 또 다른 질문에 그는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무언가 고삐가 풀린 듯한 얼굴로 답을 내놓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정상적인 생각을 품은 인간의 눈은 아니라는 것.

"어이, 네가 그때 살아남아서 말이야. 곤란해졌다고, 이런 방법이라도 쓰지 않으면 그분에게 언제라도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게. 네가 이런 내 마음을 아는 거냐?"
"....."
"더군다나 너를 이곳으로 이끌고 와서 직접 살해 인증까지 해야 한다잖아.... 정말로 귀찮아 죽겠다고."

이때만큼은 무언가에 무력한 표정으로 자신과 같은 감정을 품은 듯이 바닥을 보고 있는 그였다. 말한 대사 자체도 그의 입장에서 그녀를 일방적으로 탓하는 어이없는 화술. 하지만 곧바로 그녀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텅 빈 포션 병을 바닥으로 던진다. 중력을 거스르지 않고 천천히 떨어져 간다.

"너무 승리의 분위기를 탔는지 생각보다도 많이 말하게 되었군. 그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보고 말이야. 광장에서 잠깐 보였던 그 포커페이스라는 건 쓰지 않는 건가?"

쨍그랑, 그녀의 눈앞에서 유리병이 깨져버렸다. 그가 가지고 있던 상처들이 어느 정도 치유되기 시작했다. 대조적으로 그녀의 표정은 어두워져 간다.

암살 부문장이 깨진 유리 조각을 천천히 손에 들었다. 아직도 그녀는 겁을 먹어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봐, 최고위 암살자인 내가 무기를 들었다고. 그런데 아직도 도망갈 생각조차 없는 거냐? 작은 유리 조각이라고 내가 너를 못 죽일 것 같은 거냐는 말이다."
"아, 아뇨.... 그것이...."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니는 순순히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권력이나 힘을 가진 자에게서 나오는 무언의 압박감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한 듯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는 맨몸으로도 그녀를 죽일 수 있을 테고.

어쨌든 여기에서는 일단 남자의 비위를 맞춰 어떻게든 시간을 끄는 것이 중요했다. 여기서 죽어버린다며 지금까지 그녀를 지켜준 길드 마스터를 볼 면목이 없으니까.

"....."
"침묵으로 대응하는 건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도망칠 생각은 말아라. 언제든지 죽일 수 있으니까. 다만 시간이 되지 않아서 보류할 뿐이다."

검은 망토는 그렇게 말하고선 유리 조각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발로 세게 짓밟아 산산조각낸다. 마치 그녀의 희망은 없다는 듯이. 그리고 다시 주저앉아 체력을 회복한다. 이니는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여기서 순순히 죽을 생각은 없다.

(최대한, 버텨주겠어.... 분명히 길드 마스터라면, 나를....)


★★★


스크롤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남겨진 광장의 인물 중 몇몇이 패닉에 빠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니의 정체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던 자들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이 광장에서의 용사 환영식은 의미가 없고, 단지 <유메니티>의 역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테러 사태가 된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다. 시민들로서도 트라우마가 될 만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층부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르다. 시민들은 이니의 정체가 용사라는 것에 이미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로서는 그녀가 용사가 됨으로써 사상 처음으로 나온 이질적인 용사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이럴 수가.... 설마 노리는 것이...."
"폐하가 아닌...."

이 나라의 기사 단장과 같은 동료가 된다고 통보받았던 용사.

"짐이 아니라 이니였단 말인가....!"

그들이 알아차렸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그가 없어졌을 때 지휘권을 가지게 될 간부 포어가 <확성> 마법을 사용하여 전 광장을 울린다.

"어이, 쓸모없는 녀석들아! 계획이 성공했다! 철수한다!"
"오오!"

그 말과 동시에 살아남은 암살자들과 경비 부문의 용병들이 싸움을 멈추고는 등을 돌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미 계획을 완수한 이상, 더 여기에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겠지.

한 번 더 혼란스러웠지만, 여기서는 역시 다스 에이나 폴로의 명령이 중요하게 작용할 또 한 번의 기회이기도 했다. 잘해본다면 흑월의 전력을 어느 정도 깎아낼 수 있을 테니까. 도망가기만 하는 흑월 따위는 무섭지 않다.

"철수해라, 이 자식들아! 좋아, 이 정도면 모두에게 들렸겠군. 그래도 싸우고 싶으면 알아서 싸우다가 죽어도 우리에게는 별문제가 없지, 크헤헤헤."
"그렇게 놔둘 것 같으냐!"

아까까지 싸우고 있었던 기사 단장이 창을 내리꽂는 것을 백스텝으로 가까스로 피하는 포어. 여러 파편이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미 목적을 이뤘으니 더 싸울 필요도 없다.

"더는 싸울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지. 니네들이 우리를 쫓는 것도 의미가 없다. 다친 병사들이나 좀 치유하지그래?"
"닥쳐라! 너희 흑월 녀석들은 전부 처형이다!"
"호오, 그래? 그렇지만 나를 쓰러트리면 인질을 조심해야 할-"

그때, 포어는 그의 등 뒤에 있던 왕녀라는 인질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도주하는 인원들이 생겼기에 상대적으로 전력에 여유가 생겼기에 인질들이 대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제 기사 단장의 행동을 굼뜨게 만들었던 제어 장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난 기사 단장의 표정이 투구로 감춰져 있더라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이었다.

-그냥 단순하게, 분노가 치밀었을 것이다.

"아, 이건 좀 위험한데.... 나 <전이> 스크롤도 못 받았는데."

단순히 가진 장비뿐만 아니라 실력으로도 이 나라 최강이라는 그를 이기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도주하기에도 주위에 기사들이나 모험가들이 그를 놓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간부로서 암살 부문장님께서 채택해주신 것은 좋지만, 이런 점에서는 좀 불만이란 말이지.)

그래도 도망갈 수밖에 없다. 독이 묻은 단검을 이용하면 어느 정도의 상처만 입혀도 쉽게 무력화된다. 이것만을 믿고 포어는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속도로는 자신이 따라잡히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보다도 더한 실력자들이 주위에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대략적인 도주로를 확보하는 것이 좋았다.

(다행히도 주위의 기사들과 경비병들은 아직 혼란해 하고 있는 상황. 거기에 아직 저 왕의 명령도 내려지지 않았으니, 아직은 괜찮은 상황인가.)

포어가 그리 안도하며 도주로를 찾고 있을 때, 그 희망을 부숴버리려는지 바로 다스 에이나 폴로의 명령이 또 한 번 더 내려졌다.

"도망가는 녀석들은 잡지 않는다! 서둘러 다른 이들의 치료를 부탁한다! 다만, 지금 잡은 이들은 수로 제압해도 좋다!"

역시나 그는 같은 편의 안위를 생각하여 치료를 우선적으로 하여 전력을 다듬는 방침으로 나가기로 한 모양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그 내용은 기사 단장이 그를 쫓기에는 충분한 명령이 되어 있었다.

"쳇, 거지 같군!"

더군다나 그사이에 또 우글우글 몰려왔다. 정말로 귀찮은 벌레들이다. 더군다나 앞에는 가장 거대한 벌레가 있으니, 참으로 끔찍하다.

독검을 뽑아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기사의 빈틈을 노려 피해를 준다. 몇십 초가 지나자 바로 효과가 나오는 것을 보면 새로운 독을 바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쫓아오고 있는 기사 단장을 따돌리기는 결코 쉽지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도주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니다. 계속 관찰한 결과, 저자는 <가속> 마법을 쓰지 않았다. 단순한 스피드로는 포어가 위일 터.

물론 주위의 기사들과 경비병들을 모두 뚫고 나가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그건 그가 가진 특수한 무기로 제압해버리면 될 뿐이다. 요컨대 계속 앞으로 끊임없이 달려간다면 따돌릴 수도 있다.

"우선, 움직인다! 일단은 저기로!"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루트인 직선 부분에는 마침 아무도 막고 있지 않았다. 연이은 전투로 약간 지친 기사 단장과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기사들을 뚫고 나가기에는 지금밖에 없었다.

"<가속>!"

순식간에 바로 뒤에까지 쫓아온 기사 단장을 가속화된 신체로 단번에 거리를 띄워놓는 포어. 더불어 자신의 곁에 있던 세 명의 경비병들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기사들보다 상당히 빈약한 장비를 하고 있기에 틈을 노리기가 쉬웠다.

아직은 움직이고 있더라도 조금 있으면 속도가 극악으로 느려지겠지. 이렇게 부상자를 만드는 데에 성공한다면 다스 에이나 폴로의 성격상, 그를 내쫓는 것보다 그들을 치유하려는 데에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치유를 시도해봐도 헛수고겠지만.

(아주 완벽한 작전이란 말이지, 크헤헤헤헤!)

벌써 3인은 중독된 신체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에 쓰러져 있다. 그들의 뒤에서 달려오던 기사 단장도 이제 벌써 시야에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느리길래 이렇게까지 보이지 않는 걸까.

"아니, 아직 그 정도로 멀리 오지는 않았는데...?"
"어딜 가는 거냐!"

바로 그의 앞에서 쿵, 하고 묵직하게 떨어지는 기사 단장.
견디지 못한 바닥에 약간 금이 가지만 어떻게든 표면에 금만 갈 뿐, 부서지지는 않는다. 그것보다 어떻게 여기까지 단번에....

(잠깐! 방금 이 녀석 위에서 떨어졌었지? 그렇다면 이 괴물 녀석, 점프해서 여기까지 뛰어오른 건가?!)

속도는 느려도 힘으로 이곳까지 올 방법을 찾은 기사 단장. 이미 기사 단장이 자주 유지하는 공격 거리까지 왔으니 도망가기에는 약간 위험하다.

그렇게 되면 포어도 자신이 애용하는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자신보다 확실히 약할 경비병들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무기에 독이 발라져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확실히 자신에게 공격을 가하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해 나온 발상이었다.

"그렇게 놔둘 것 같으냐!"
"-읏!"

그러나 곧바로 그의 속내를 알아챈 기사 단장에 의해 제지당한다. 설상가상으로 주위의 용사 일행들까지도 이곳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차피 탈출 불가능.

그때, 저 뒤의 부하가 용사에 의해 쓰러지면서 놓치게 된 스크롤이 눈에 띄었다. 다행히도 그 용사는 적을 처치하고 있는 데에 집중하고 있기에 지금이라면 눈에 띄지 않고 스크롤을 주우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저기는 조금 전에 암살 부문의 암살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뭐, 상관없나. 나만 무사하면 되고 말이지.)

점차 체력도 떨어져 가고 있었기에 저 스크롤을 주워서 탈출하면 리스크 없이 탈출할 수 있었다. 거기에 용사는 검은 망토들에 의해 주위를 둘러 싸져 있기에 자세를 낮추면 눈치채지도 못할 것이다.

"<창격>!"
"이, 망할 녀석! 언제까지 방해를!"

문제는 귀찮게 다가오는 이 거대한 녀석을 따돌리는 것부터가 그렇다. 그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이상, 쉽게 놓아주지는 않을 테다. 마법을 쓰기에도 체력이 많이 남아있지가 않다.

그렇다면 남은 수단은 하나.

"이봐! 저기 뒤의 녀석들, 불쌍하지도 않은 거냐! 지금 치료제를 먹인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

말로서 시간을 벌어 빈틈을 찾아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봐, 저건 그냥 포션으로는 치유할 수 없어! 게다가 웬만한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어! 하지만 나는 치유제를 가지고 있지. 나를 죽인다면 저 녀석들을 살리는 건 불가능해!"
"...그딴 말을 믿을 것 같으냐."

기사 단장은 그런 말을 뱉기는 했지만, 정작 말과는 달리 행동은 창을 잠시 내리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서 스크롤을 줍기 위해 움직이는 것에 도박을 걸어볼 수도 있지만, 아직 체력이 충분치 않았다.

"어때, 나만 놔줘라. 다른 녀석들은 말고 딱 나 하나만 말이다. 어차피 흑월에서의 내 지위도 높지 않고. 나를 놔주면 3인분의 치료제를 주지."
"....."
"그래. 1명 놔주고, 적어도 세 명은 구하는 거다. 이 한 번의 순간으로 저들의 목숨이 달려있다고? 구할 수 없는 목숨은 몰라도 서두른다면 구할 수 있다고?"
"시, 끄러워...."

좋아, 거의 다 넘어왔다. 지금 분명 동요하고 있다. 말로는 거부해도 마음만은 그렇지 못하다. 포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기사 단장님. 이미 저들은 치료했습니다."

갑자기 그의 가까이에서 신관 옷을 입은 남성이 그렇게 말하더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기사 단장을 부르면서 말을 이어간다.

"벌써 저기의 세 명에게는 신의 이름으로 치유를 거행하였습니다. 예상한 대로 아주 극악의 맹독이더군요. 하지만 제가 바로 치유했습니다."
"설마, 그 독은 나로서도 절대로 고치지 못하는 건데-"

무심코 그의 말에 반박하여 포어의 옆에 조금 전까지 거래하고 있던 자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보다 그 남자의 말이 더 중요하다. 그 독을 치유했다고?

확인을 위해 고개를 돌려보면 저 멀리 조금 전에 쓰러트린 세 마리 벌레들의 얼굴이 확연히 나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들을 낫게 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저들의 상황은 기사 단장도 봤을 터.

(거기에 내 계획까지 방해하다니, 저 쓰레기가!)

우오오오오, 모든 수단이 막혀버렸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포어를 움직이게 하였다. 재빨리 품속에서 독이 든 병을 던져 단검으로 확 잘라버린다. 깨진 유리병 안에 있던 독들이 떨어지면서 단검의 칼날에 더욱더 짙은 농도의 독이 묻혔다.

"이제는 됐어. 네 녀석을 인질로 삼아주마!"
"이런이런, 저는 치유계이므로 전투는 저의 역할이 아닌데 말이죠."
"그걸 알고 있으니까 잡으려는 거 아니냐, 이 멍청아!"

신관들은 보통 후방에서 적을 치료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전투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 있다고 해도 지금의 그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기사 단장도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반응을 하지 못한다.

(내 계획을 방해한 저 새끼는 무조건 죽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파티에서 한 주축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는 전투력은 가지고 있단 말이죠."
"-!"

그때, 곧바로 자신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문득 세상이 한 바퀴 돌더니, 큰 충격과 함께 쓰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세상이 이상해진 것이 아니었다.

(이 내가 지금 균형이 이상해진 거야?! 고작 저딴 신관 따위한테?)

예기치 못한 충격에 잠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존심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신관이 자신을 올려다보더니 활짝 웃는 얼굴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지껄였다.

"말했지 않습니까. 저는 그다지 약하지 않다고. 아아, 아무래도 저의 정체를 모르셨던 것 같군요. 제 이름은 켈럽. 용사 일행에서 치료를 맞고 있습니다."

무려 용사 일행의 수행원이었다. 평범한 자가 아닌, 그 괴물 같은 집단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자.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이상하긴 했다. 평범한 자라면 처음 보는 포어의 독을 시간 내에 쉽게 치료할 수는 없을 테지만, 신의 사랑을 받는 그라면 당장이라도 세 명을 치유하는 게 가능할 테다. 거기다 간부인 자신을 쉽게 넘겨버리는 전투 능력까지.

(이 얼마나 사기적인 스펙이냐, 용사 일행들은.)

그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곤, 기사 단장도 움직이려던 손을 멈추고 켈럽에게까지 천천히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전투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다른 용사 일행들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켈럽 님, 갑자기 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제가 곤란해하는 것을...?"
"아아, 저는 전투직보다는 약하기에 다른 기사들과 경비병들의 치료를 돕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황을 살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요. 저자가 일으킨 독도 전부 치유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독을 쓴 이유가 없잖아!)

저렇게 여유 있게 적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하다니, 부쩍 분노가 오르는 포어였다.

하지만 덕분에 어느 정도의 체력은 다시 회복했다. 아직도 용사는 검은 그림자들과 싸우고 있긴 하다만,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죽을 힘을 다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죽어버릴지도 모르니 방법이 남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주위를 확실하게 돌아보면서 경계한다. 제일 거슬리는 용사 일행들도 지금은 각자가 퍼져있다. 그렇다면 기회는 지금뿐.

"-<가속>!"

발 하나로 도약하여 마법을 사용해 거리를 벌려놓는다. 두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그를 쳐다보지만, 다른 제약이 없어졌으므로 확실한 탈출이 가능했다. 흑월이 들고 온 스크롤은 <전이>밖에 없으니, 그 점에서도 안심이었다.

"이, 이런! 빨리 쫓아야-"
"아뇨. 괜찮습니다. 저 앞에는 그가 있거든요."

그들이 쫓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지만, 이미 포기한 거로 생각해 그냥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용사가 앞에 있더라도 스크롤을 잡는 데에는 문제가 될 거라 생각은 되지 않는다.

(이제야 탈출이다!)

드디어 스크롤에 가까워진 포어. 이제 손만 뻗으면 이 지옥과도 같은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쨍그랑!


그때, 무언가 검은 파편들이 깨지면서 누군가가 또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그것도 아까와 같은 점프가 아닌 갑자기 앞에 등장한 것.

"후우.... 드디어 탈출한 건가."

그 남성은 양복과 같은 말끔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짊어지고 있는 짐처럼 보인 것은 바로 검은 망토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포어가 제일 혐오하는 인물이 그가 묶어놓은 제어 장치에 의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신...? 어째서 네가 거기서...."
"뭐야, 이 녀석은.... 의상을 보니, 적인가?"

그가 싸늘한 표정으로 그 말만을 마치고 그를 적으로 판단해 발차기를 시원하게 날렸다. 피할 능력도, 체력도 줍지 못하는 포어는 기절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그리고 곧장 광장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주위를 바라본다. 곧 알게 된 절망의 소식을 알지 못하고.

0
이번 화 신고 2021-04-04 18:24 | 조회 : 715 목록
작가의 말
The ZXCV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